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Dec 15. 2017

#56.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왜 그때 묻지 않았을까. 물어봤다면 우린 연결됐을까.


핸드폰의 배터리가 깜빡거리는 것이 어째 불안했었다.

기어코 빨간색 불이 깜빡이다가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듣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도 정지된 채 이어폰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탄식이 나왔다. 이제 단 몇 초면 좋아하는 음악의 트랙이 바뀌는 순간이었고, 이상하게 억지로 그 음악을 듣기 위해 계속 다른 트랙의 음악들을 마치 대기 순서인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렸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배터리가 다 돼서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순간. 탁 하고 내려앉는 느낌은 기어코 나를 사로잡았다.


언제나 그렇다. 단 몇 분 아니 단 몇 초 만에도 상황은 변할 수 있다.

살아있는 이 세계가 새삼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쓰러져서 숨이 머질 수도 있다.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도서관에서 사무실에서 온라인 세상 속에서, 타인과 타인의 접촉으로 인연이 만들어질 수도 혹은 악연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아무 일이 없이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뜻밖의 사건을 겪게 되면 그걸 인지하는 그 시간의 전과 후로 시간은 다시 갈린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평함이라 해도 그것은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생되기도, 흘러가다가 또 멈추기도 한다.


그래. 시간은 때론 누군가에게 거꾸로 흘러가기도 할 수 있겠다.

흘러가고 있지만 사실 흐름을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의 미동과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의 시간은 계속 재생되지 못한 채 어느 트랙에서 멈추어져 있다. 마치 이어폰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갑자기 배터리의 소진으로 인해 잠시 멈추면서 그 상태에서 꺼지는 것처럼.


배터리를 충전시키면서 핸드폰을 다시 켰다. Off를 해 놓지 않았던 터라 블루투스 이어폰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연결을 다시 시도합니다."


음악이 다시 흘러나왔다.

듣고 싶었던 음악은 1분의 기다림 끝에 다시 귀에 흘러 들어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늘 하는 버릇을 어느새 재생시켜 내고 있었다. 노트북의 키보 드위에 잠시 정지된 채 올라가 있는 두 손에서 왼쪽 손을 잠시 떼 내어 꽤 길어진 어깨 위에 닿은 갈색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그러곤 이어폰에 손을 갖다 대어 중얼거리면서 잠시 매만졌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키보드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치는 타자 소리. 그 둘은 이미 내 세계관에서 사랑에 빠졌다.


"그래야지.. 다시 들으면 되지"


요즘 나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 중 커다란 한 가지가 바로 '음악'이다.

엉뚱하게도 그 기쁨의 이유가 사람이 아닌 게 가끔은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 사실 좀 부럽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무언의 것들이 간혹 부러워질 때가 있다. 이어폰과 같은 기계들은 시간이 지나면 고장이 나겠지만 그 고장 나면 다시 부품을 새로 갈고 고치면 그만일 테다. 그러나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의 여러 곳들이 고장 나기 시작하고, 결국에 부품을 갈아 낄지언정 생채기는 남는다.


세계를 살아가다가 뜻밖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파괴되면 고칠 부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게 사람이다. 그러다 어쩌다 만난 행운처럼 갈아 끼울 부품을 찾아서 또 끼워 넣어도 자국이라는 게 생긴다. 신체도 마음도 어쩌면 재생시켜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 더 순식간에 더 자주 혹은 더 불시에 찾아오는 건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는 다름 아닌 여전히 살아서 세계를 인내하고 견뎌내며 우주의 모래알만도 못한 존재였다가도 우주보다 더 커다란 존재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다시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문득 내게 처음으로 이어폰을 선물해 준 사람이 생각이 났다.

글을 쓸 때 항상 음악을 들었던 나로서는 이어폰과 음악 없이 살 수 없는 때가 있었다. 잘 때도 이어폰을 끼고 잘 지경이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새 재생 트랙이 멈춰있는 이어폰을 발견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 정도였다. 음악이란. 그리고 이어폰이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싸구려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음악만 잘 나오면 좋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이어폰에도 브랜드가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그는 어른이었다. 나와는 섞이지 못할 것 같은 어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기도 많았을 법한 그에게 받은 검은색 뱅 앤 올룹슨은 사실 내가 주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당시에 선물을 받고도 선뜻 쓰질지 않은 서랍 속에 포장박스도 뜯어보지 않고 그대로 모셔 두었었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고 여행도 많이 다녀본 사람이 잘 다닌다고, 당시 내겐 매일 장거리 출퇴근 길에 함께 한 1만 원도 되지 않은 그 이어폰이 더 익숙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그 선물의 주인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어야 될 것 같은 선물이었다.


다만 덕분에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에 대한 예의와 정성 그리고 상대를 꿰뚫어 보는 무언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타인을 대하는 데 기적 같은 일이며 대단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인지를. 그는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걸까. 내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턱이 없었을 텐데. 그건 다분히 스치는 우연이었지만 어쩌면 인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년이 지나서 그제야 선물을 뜯어본 미련한 나는 왜 진작 열어보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고가의 것을 받고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싫지 않았던 나는 그 당시 내 캐릭터(?)에 맞는 보답을 했다. 작은 손 편지와 음악이 가득 들어있었던 연두색 MP3 플레이어였다. 나름 내게는 소중한 것들이었지만 아마 그에게는 그냥 서로가 예의상 건넨 선물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마치 누가 차 한잔 사주면 나도 한잔 사주는 딱 그 정도의 예의. 다만 누군가에게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무언갈 건넬 줄 아는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일 테니까. 그 바보 같은 믿음 하나로 일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혹은 혼자 있을 때 그의 귀에 내가 듣는 음악이 단 한 번이라도 흘러나가 준다면, 왠지 기쁠 것 같았다. 그땐 그랬다.  


여전히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부러 음악을 듣지 않는다 말했었던 그가 언젠가 시간이 흘러 흘러 우연히 이 글을 읽는다면 음악을 꼭 들으면서 읽었으면 좋겠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은 단 이 말 뿐이었으니까.


사실은 MP3 플레이어가 아니라
내가 지금 듣는 이 '음악'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고.



당시 내가 그를 대할 수 있는 예의와 정성은 섞이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평행선 같은 시간. 그러나 유일하게 누구와도 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건 바로 음악이라는 연결 도구일 거라 생각했었다. 다만 나의 실수 하나는, 그가 어떤 음악을 정말 즐겨 듣고 좋아하는지 물어보려 하지 않았던 것. 이어폰을 고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할 법한 그에게, 내가 좋아하는 범위만 생각해서 무작정 내 취향의 음악만 잔뜩 들어간 MP3를 선물했던 당시의 내가 얼마나 어린아이로 보였을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갑자기 낮이 확 뜨거워진다.


쓴 커피와 MP3 플레이어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것도 내멋대로 생각한 나만의 자유스러운 착각이었겠지.


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려 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들려주려 했을까. 내 이야기만 들려주고 싶어서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들으려 하지 않았던 어리석은 나였을지도 모르겠고.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오랜 우정을 기념하는, 항상 그리운 친구를 최근에 만났다.  겨우 애써야 만나는 사이인지라,  봤을때 무작정 언젠가 줘야지 하고 준비해둔 크리스마스선물을 건넸다. 곰돌이 모양의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다. 그리곤 물어다. 요즘 어떤 노래 듣냐고. 어느새 먼저 물어보는 내가 되고 말았다. 연결이란 순식간에 찾아오기 마련이기에, 누군가 먼저 물어봐 주지 않는다면 이제는 내 쪽에서 먼저 목소리를 건네는 편이 되고 말았다. 그때 미처 건네지 못했던 한마디 때문에.

궁금한 마음보다는 그저 나의 좋아하는 목록만을 마구잡이로 들려주고 싶었던 바보였다. 내 세계만을 아이처럼 고집했던 미련했던 나는, 당시의 사람을 대하는 예의와 정성이 부족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후회했다. 아니,  그 후회는 요즘도 가끔 해 버린다. 나의 어리석음이 뒤늦게 내게 준 교훈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더 늦기전에 한없이 기다리기만 해선 안된다는 것을. 물을 수 있을 때,  안부를 안녕을 건네고 싶다는 마음..


어느새 재생목록이 끝나간다. 다음엔 어떤 음악을 들을까. 고민하다가 그 몇 년 전에 들었던 음악을 선택했다. 여전한 감동이 귀에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그도 이 흘러넘치는 작은 기쁨을 부디 누리며 살고 있기를. 부디 자신을 덜 속이고 더 기쁘게,  그렇게 잘 흘러가고 있기를. 일부러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얼핏 건넸었으나, 그럼에도 언젠가 음악을 듣는다면 그 순간 부디 기쁘기를. 덜 아프고 덜 불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은 그 바람 뿐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55. 1년 전 상상이 현실이 되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