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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18. 2017

#57. 상식에 대한 집착

틀에서 벗어난 비상식에 속해도 그것에 나와 모두에게 플러스라면 '라이 킷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서 늘 가던 페이스북의 페친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인의 글 한편을 읽었다. 

먼 타국에 있는 것 같은, 실재하는 그의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며 다만 유추할 뿐인 채, 글을 읽다가 어느새 빠져 들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거침없이 발설해 내는 그의 자유로운 문장, 세상에 정해놓은 소위 '잘 사는 삶'에 대한 일침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문맥을 걸어가는 삶을 택했고 그것에 대한 동경과 마음의 동요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순간 '라이 킷' '좋아요'를 눌러 버리고 댓글을 달고 싶었던 것은. 


 남이라는 타인으로부터 의심을, 걱정을, 미움을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내가 있었다. 

 소위 '미움받을 용기'라는 타이틀이 그토록 많은 열광과 환호를 받은 이유도 어쩌면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였는 지 모를 일이다. 어떤 것을 믿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관념들, 세상 속에서 너무 다치지 않게 살아 내려면 그 정도의 관념은 존재하고 또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 게 삶일지 모른다. 


 상식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의 삶에 지쳤을지 모른다. 

 이미 살아온, 그것도 성공하고 잘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규정지은 세상의 경험이 만들어 놓은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좀 더 스펙트럼을 넓혀서 윤리적 판단이라는 거대한 집합체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직관적인 생각이 나한테는 옳다 한들, 객관화된 프레임에 조금이라도 거스를 법하면 단번에 아웃되기 십상이다.  


그대로 투명하게 비춰지는 상식이라면 don't care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있는 게 현실이라 아쉽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의 상식들, 그 안에서 적절히 섞여야 한다.
그래야 덜 다칠 수 있다.



 겨울 뒤에 왜 봄이 왜 오는지, 얼음은 왜 차가운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만큼 바보처럼 되묻는 게 바로 상식에 대한 반항 일지 모르겠다. 


"보통 그러니깐.. 그래야 되잖아."
"그 보통이 누구에게 보통이죠? 그래야만 된다는 건 또 누구의 기준인가요? "


보통을 불편해하는 이 목소리는 다수에게는 개소리에 헛소리에 프로반항러에 프로불편러로 낙인찍히기 쉽다.

 웃으며 말하는 얼굴이니 침은 뱉지 않았다만, 아마 나와 말을 섞어본 이들 중 누군가는 내가 '보통'은 아닌 세상을 사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사람처럼 느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아무리 보편에서 벗어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 한들 여전히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다수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관습에 반항하는 '나'와 같은 캐릭터는 이상하게 캐릭터 설정값 잘못된 소위 아싸 (아웃사이더)의 시선을 받기도 쉽다. 다수의 당연한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치부해버리는 통에, 아싸 들은 각자들이 가진 개인의 소중한 내적 인식은 부딪힌다. 

스스로 물음표를 품으려 하는 자들의 의지는 
개인의 강한 의지가 여전히 살아 숨 쉬지 않으면 곧잘 꺾인다. 


수동태다. 꺾이게 된다. 

 돈과 권력이라는 영향력으로 꺾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그 자체로 상식과 관념을 세우는 데 필요한 미덕일지도 모를지언정, 인문과 철학을 일상에 피력하는 누군가들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닌 듯도 싶다. 최소한 시를 쓰고 여전히 이곳저곳을 부유하며 자신의 삶의 가치관에 대해 써 내려가는 그의 행보에, 수 천명이 '라이 킷'을 눌러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회와 동떨어져 살아가는 듯 보이는 그의 시 속에서 삶의 또 다른 면들을 보게 된다. 그는 세상의 상식들 속에 케케묵은 다른 어두운 면들을 조용히 비판하며 자신의 가치와 삶의 철학을 주장해 낸다. 그 문맥들에 나는 열광했고 이 같은 우리는 호응했다. 다만 아주 조용히. 여전히 수면 위로 올라오진 못한다. 그럴만한 힘이 용기가 아직 없는 걸까...


그럼에도 삶을 부유하며 감각이 살아 숨쉬며 그 감각을 지켜내는 삶을 응원한다. 그러니 나도... 나를 응원하는 중이다.


 그의 시와 삶의 단편들을 적어 놓은 문장들을 읽다 보면, 인생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거리낌 없이 발설하는 사람들이 가진 윤리적 관념이란 대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식의 되풀이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발설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그 파괴는 사회와 상식에 대한 파괴다. 
껍데기를 벗어내고 새로운 살갗에 찬바람을 쏘이는 아픔을 감내한 채, 
벗어내고 또 벗겨내 간다. 



 발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회에서는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풀이 개를 뜯어먹는 헛소리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두뇌가 서서히 나아질 기미가 요새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읽단 읽어 내리기 시작한 올해다. 근 30년 이상 살아온 '나'라는 캐릭터 상 몰입해서 죽기 살기로 그 시간을 내 시간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이미 파괴적인 영감이 철철 흘러넘쳐도, 그 상상 속의 삶을 살려 애쓰고 또 애써본들 쉽게 상식 밖으로 나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은유하고 부유하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사회가 바라는 삶과는 동떨어진 채 전혀 다른 형질의 인간으로 변화하는 삶을 거부할 수 있는 깡단. 그래 나는 다시 그 깡단을 키워내고 그 똘기 충만한 근육을 길러 내리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소설을 쓰는 일도, 시를 쓰는 일도, 노래를 만들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 모두 그러할까. 

 최소한 상식에 대한 집착에선 벗어난 삶을 살고 있을 것임은 분명할지도 모르겠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스스로만의 예술을 삶에서 조화시켜 나가며. 그렇게 유니크하게 그로테스크한 시간에 에너지를 쏟는 이들은 소위 일반적이지는 않은 게 현실일지 모르겠다. 


한 꺼풀만 깨고 나오면 날개들이 마구 돋아서 새로운 세계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몰라...응? 응! 


 사실 요즘 나는 이 일반적인 것에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고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글을 다시 쓰고 세상을 좀 더 입체적인 시선으로 관찰해 나가며, 나의 너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싶은 이유는, 나 또한 이제는 만나는 혹은 스치는 모든 사람과 인연을 대함에 좀 더 그 겉에서 보이지 않은 내면들을 바라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높은 성공이 아닌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연습의 과정 중 단연코 첫 번째는 일반화된 모든 상식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었던 나를 거부하는 일일 테고. 


행복보다 차라리 상처 고통 통증 이런 것들을 사랑해 보고 싶어 졌다.
아파도, 좀 더 감내하고 인내할 근육을 만들어 나가보자며...


마음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간절함이 여전히 담겨 있는 요즘이다. 

 가족들과 잠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솔직히 일단 물리적으로 편했고 그 편함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엄마라는 타이틀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 나는 그 감정에서 여전히 엄마 강박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육아에서 잠시 벗어난 그 시간 동안 내 마음대로 나의 시간을 주무를 수 있었다. 생각도 상식에서 자유롭게 벗어나서 하고픈 상상을 마음껏 해 냈었던 일주일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곧이어 이상하게 마음속에 간격과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여전히 상식으로 돌아와야 하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서 그런 걸 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 마음을 쓰는 그 순간의 사람 혹은 사랑의 대상은 때론 피로 혹은 사회적 약속으로 맺은 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상처받을 수도 있단 생각. 그 정도 상식을 모르지 않은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틈이 생긴걸 지 모르겠다.  


 옷을 입은 나와 벗지 않은 내가 다른 표정으로 거울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때론 내가 스스로 정해 놓은 '그래야만 하는' 일상 바깥의 영역 안엔 나를 내맡기고 싶을 때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꿈'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놓진 않았지만, 사실 이루지 못할 '꿈'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때론 매일 벌어지는 일상 속 타협과 줄다리기가 요구되는 삶의 평정심은 때때로 그 고귀해 빠진 평정심 따위 개나 줘 버리고, 마음에만 맡긴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다는 욕망에 가끔 사로 잡히니. (원, 이것 참 때때로 곤란하다.) 


밤하늘은 매번 반복되지만, 그걸 바라보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같은 듯 다를지도 모른다. '꿈'도 그런걸까..


 다만 다행히도 그 마음을 글로 발설해 낼 수 있는 요즘에 감사하다가도, 다만 여전히 현실의 장면에서는 정복하지 못하는 몇 가지 장면들을 위해 오늘도 있는 힘껏 그저 일단 살 아내 보고 있다. 생각이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채 다만 입체적이고 좀 더 생동감 있고 깨어있으며 진짜 살아있는 듯한 생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다시 한번 오늘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는 어떤 예기치 못한 기쁨을 꿈꾼다는 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상식적인 삶을 살아오며 내면은 외로웠는지를 반증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의 새벽 시 한 편을 읽고 잠시 생각에 빠지다가도 상식 따윈 잘 모르겠을 정도로, 잠든 아가들의 꼼틀거리는 발가락을 보며 기쁨과 동시에 어딘지 모를 공허함을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과 오후, 오늘은 한국은 눈발이 흩날렸다. 


 이 흩날리는 눈발과 하얗게 덮인 세상을 보니, 갑자기 양평의 생각 속의 집에서 하루만 비상식적인 일상을 흘려보내고 싶다는 이 마음은 다시 마무리되지 못한 채 노트북에 잠들어 있는 원고 속에 숨겨진다. 


It's  Snowing Day. so Beautiful our Life. 를 외치며
 상식 속의 삶을 부유하며, 상상 외의 장면을 꿈꾼다. 


생각 속의 집이든, 집 속의 생각이든, 공간이 주는 위로와 그 영향력은 작지 않음을 알고 있다.. 언젠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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