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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22. 2017

#58. 저스트 원데이

하루, 그 하루의 기적이 있을까. 있겠지. 있다.  

  얼마 전의 대화였다.


"가고 싶은 데 있어? "
"생각 속의 집. 거기 가보고 싶어 졌어. 그러니까 가게 된다는 거지. 이미 한번 다녀온 거 같아. 상상했거든.   
"가면 되지. 여전해 하여튼"
"여전한가... 하여튼. 가면 되지. 그래 가야지 언젠가는.."


 뭐에 홀린 듯 나는 마음에서 연출된 상상 속 장면을 그려내는 버릇이 좀 더 진해져 버렸다는 핑계로, 12월의 마지막 주, 회사의 모든 임직원들이 강제 휴가를 받은 터라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는 10일가량의 휴일 동안 서로들은 연말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돌아가며 비슷한 질문이 주어졌을 때, 갈 계획 없고 아직 가지 못하지만 어느새 생각 속의 집에 있는 나를 입으로 내뱉어 버렸다가 아차 싶었다. 다행히도 상대가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듯 피식하고 웃어 주었다. 다행이었다.


 마음이 그렇게 입으로 종종 잘 새어 나오게 된다.

 요즘은 그래서 좀 위험하다 싶다. 귀가 아닌 입은 여전히 이야기를 토로해 내려하니, 더욱 새어 나오는 마음을 그렇게 발설해 내선 곤란한 게 현실일 테니가. 마음의 감정들이 쉽게 기복이를 타게 되는 요즘 내게는 더더욱 그 감정들을 모조리 현실로 내뱉는다면 아마 미 처버 릴 지도 모를 일이다.


 도망치고 싶어. 단 하루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사실 한 번도 멈춘 적은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다 보면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건 비단 나뿐은 아닐 테다.


 엄마도 연년생인 나와 남동생의 천 기저귀를 추운 겨울 온기가 다 빠져서 식은 물에 손을 담가가면서도 그랬을 테다. 지게차 운전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낸 탓에 목돈이 나가버리는 바람에 괜한 돈 걱정에 잠 못 이뤘던 아빠도 그랬을 거다. 고 3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견뎌야 하는 그 고단한 시기에 병원에서 죽어나가는 환자들을 하루 이틀 걸러 바라봐야 했던 그 병동 입원실에서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수능 공부를 해야 했던 남동생도 분명 그랬을테다. 그럴 때마다 우리 네 식구는 단 한마디도 서로에게 도망치고 싶다고 입 밖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다. 서로가 지키는 금기어였다. 도미노처럼 무너지면 안되니까.


겉으론 낡아 빠져 보이는 현실이어도, 그걸 같이 바라봐주고 위로해 주는 이들이 있으면 또 괜찮아진다..


대신 각자 스스로 다짐했을지 모른다. 마음 다 잡고 갈 데 까지 가보자 라고.


 물론 그중에서 내가 제일 여린 케이스(?)에 속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약하고 미련해 빠진 나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네 식구 중 유일하게 '힘들어' 소리를 토해내는 캐릭터에 속했다. 난 그게 솔직하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솔직하게 무엇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게. 그리고 그걸 누가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 누가라는 것들이 바로 나의 가족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다행히도 우리는 바퀴벌레 가족은 아닌 축에 속했다.

 물론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귀가하실 땐 조용히 방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나와 남동생의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심하지는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남동생도 서로가 정말 큰 사건 사고들이 있었을 땐 묵묵히 곁에 함께 해 주었다. 비빌 구석은 역시 죽으나 사나 '가족'밖엔 없었던 걸까. 그들은 다운되었던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타인들이 공격해 왔던 아픈 것들을 들추어내가며 서로 쌍욕을 해 주면서 그 '나쁜 놈, 나쁜 년'들을 같이 혼내 주었으니까.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졌던 건 바로 그런 '귀와 입'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데에는 꽤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내 앞에 마주하는 그 사람을 대함에, 그의 입장이 진짜 되어 보고 그녀의 생각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마주한다는 것. 쉽지 않다. 어렵다. 아니 사실 그러고 싶지 않은, 타인과 섞이고 싶지 않은 피곤한 순간이 사실상 우리 삶의 일상다반사일지 모른다. 그도 그녀도 내가 아닌 타인이기에. 남들의 삶이니까. 타인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나'에겐 그럴 자격도 그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는 원한다. 쓸쓸해질 때. 터무니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순간.


혼자 살아가야 하는게 결국에 삶의 이치인 듯 싶다. 결국 '나'는 이 세상에 둘 일 수 없을테니까.


 들어준다는 건 곁에 있다는 것.

 곁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는 여전히 여린 존재다. 내가 약해지는 순간을 잘 알아서 그럴 때는 더더욱.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토해내어 진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어쩌면 입술과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바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와 듣고자 하는 귀의 만남일지도 모르겠다.


들어준다는 건 즉 그때 곁에 있다는 것. 곁에서 귀를 빌려 준다는 것. 딱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게도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부족한 캐릭터다. 열려 있는 쪽은 귀가 아니라 입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곤 하는 나는, 언젠가부터 말수를 조금씩 줄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 조언을 구해오는 순간이 있을 땐 더더욱 말을 아끼고 침묵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엔 실패. 대화를 듣고 있다가 어느새 섞게 되고 만다. 코드가 맞는 상대를 발견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어느새 쏟아낸다. 몇십 년간 축적된 나라는 이 캐릭터 세팅은 쉽게 조정되지 못하나 보다. 다행인 건 듣는 상대방도 어느새 기분 좋게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그러니 참 다행이다.


마음은 어느새 입술로 새어 나오고 마는 나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어느새 서로의 입과 귀가 뒤바뀌어 둘 사이의 이야기가 섞일 때. 넌지시 귀를 빌려주고 또 바라봐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작은 위로들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반대로 또 깨닫기도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위로에 그칠 뿐. 더 견디고 인내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시간을 잘 흘러가는 힘은 '나'에게서 나온다는 것.


 그 어떤 위로나 약해 빠진 감정에 치우친 눈빛에 공감하나 더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쓸쓸할 수밖에 없으나 또 그 지독하고 지긋한 외로움과 고독 또한 인내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걸 이제 조금씩 더 알 법도 싶다. 아이를 키우다 오른쪽 손목이 너덜너덜해도 집안일과 일은 여전히 반복되며 해야 하는 시간. 남들에게 휴가이며 타인들에겐 여행이나, 내게는 근무의 연장선이고 여행 다운 여행을 해 본적은 언제이던지. 오늘처럼 공모전에 떨어지고 또 기대하던 무언가에 미끄러져 내리고, 또 기다렸던 사람은 만날 수가 없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도 곁에 없을 때.


 이런 시간들.. 그 어떤 공감과 위로가 있는 들 다크함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을 선택했다.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나와서 마지막 남은 연차를 다 쓰고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은 채 올해의 마지막 근무일과 나의 책상에 슬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아주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 조용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휘갈겨대고 있다.


밖은 한없이 밝지만, 나는 가끔 어둠에 갇히고 만다. 그럴 때 찬물 끼얹는 엄마가 유독 생각이 난다. '정신차려 이것아'라는 그 말.... 들을 수 있을 때 더 들어야겠다.


 말과 단어, 한마디와 한 문장으로 수십 개의 나의 시간을 적어대고 있는 셈이다. 그건 마치 연약한 거미줄처럼 그냥 홱 쳐내면 무너질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생각 속의 집을 그래서 오늘은 더욱 내내 바라다봤다.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보자마자 그 건축물과 공간의 구석구석들을 그림으로 보고 있다가 어느새 실시간 예약 사이트를 클릭하고 남아 있는 객실 수를 보고 말았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 아니 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건, 섬을 향한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온몸으로 체감해 낸 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슬픔 따위는 왠지 모르게 사그라들 거 같은 그 나약한 생각. 아직 그것 안에 사로 잡혀 있어서일까. 빌어먹을.




 오후 1시가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카페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를 꽤나 시끄럽게 해대고 있다. 나는 조용히 빠져나올 준비를 할 것이다. 이 매거진을 저장하고 맞춤법 검사를 해 내고 완료되면 적당한 해시태그를 찾아내고 발행을 클릭을 할 것이다. .. 그전에 다이어리에 '생각 속의 집'으로 향하는 '저스트 원데이' 를 글자로 적는 것도 잊지 않겠다.


단 하루, 나만의 기적 같은 '저스트 원데이' 가 다가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여전히 아름답기를 바라는 나약한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묵묵히 오늘 이 시간에 손가락을 움직이며... 기다리다 보면 더 아름답게 꽃필 하루가 올 거라고.

 어쩌면 살아 있는 이 시간이 기적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좀 더... 바라는 욕심쟁이인 나는 어쩔 수가 없다며 중얼거렸다. 아직 괜찮다고. 잘 컸고 이제는 아기들과 함께 다른 삶을 다시 잘 커나가고 있으며 정말 올해는 새로운 것들에 몸과 마음을 다 펼쳐 놓은 한 해 라고. 그러니 여전히 잘 해내고 있고 잘 되고 있다고.


밤 다음엔 새벽, 그리고 아침. 컴컴한 것 같아도 마냥 추울것만 같아도, 다시 해가 비치고 미풍은 불어온다. 기다리면 찾아와.



고마워 지현아 네가 말해주듯, 내는 족족 붙어 버리면 그건 '사기캐'일 테니까.
넌 언제나 내게 완벽하구나. 그 마음. 참 완벽히 아름다워서 더 눈물이 난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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