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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Nov 27. 2017

#48. 표현하고 살아. 참지 말고.

한 여자를 만났다.

 다이어리와 핸드폰 메모장에는 늘 그렇듯 매년, 매달, 매일의 소망들이 적혀 있다.

나만 알아보는 암호 같은 문장들과 함께. 이뤄지든 아니든 일단 적고 보는 성격 덕분에 상상이 현실이 된 소소한 것들이 꽤 생기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이어리에 적힌 나만 알아보는 문장 중 단연코 꽤나 간절한 건 늘'사람'과 관련된 상상들이었다.


만나든 만나지 않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어 내린다.
사람과 사랑과 관련된 크고 작은 상상들


 세 권의 에세이를 먼저 출간해 낸 작가를 만나고 싶은. 그냥 보고 싶고 만나서 일상의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던 바람은,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책을 읽으면서 더 커져만 갔다. 사연을 다 까발리 듯하면서도 절대 그 안에 자리한 깊은 내면의 진짜 이야기는 숨기는 듯한 느낌이어서. 아니 사실 나도 그런 삶을 지금 사는 듯해서. 비슷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냥 무작정 보고 싶은 작가가 있었다.


'어라'하는 물음표와 동시에  '아아'라는 느낌표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찬 책은 흔치 않다.

그런 흔치 않은 책 중 요즘 단연코 푹 빠져서 읽었던 올해의 책 중 하나는 바로 '이혼 일기'다. 그런 그녀를 11월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만났다.


https://brunch.co.kr/@heaven/73


사람은 어느 정도 연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나서 들었던 그 말에 이유 없이 공감이 되었다. 나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고도 했다. 전업주부로 13년 동안 살다가 이혼을 하게 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얕은 우울함을 마음에 담은 채 일상을 흘러가 보고 있다는 그녀의 한마디 한 마디 한 문장들을 이상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 작은 목소리 하나하나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런 거일 거다. 소중한 건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은 법이다.



손편지를 적어서 가져갔다.

그리고 작은 수제 쿠키와 함께 책의 독자로서, 한 여자를 응원하는 또 한 여자로서, 그리고 이제는 같은 에세이를 쓰게 된, 글쓰기 제자(?) 가 되고 싶은 마음도 동시에 품고. 신변에 큰 사건(?) 있지 않은 이상, 미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도. 늘 궁금할 것만 같다. 내게 누군가가 궁금해진다는 건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그녀의 문체와 말투, 일상을 해석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 좋다. 특히 사랑을 분산시키며 에너지를 쏠리지 않게 한다는 마치 '참 바람둥이의 스킬'을 잘만 구사할 법한 그녀의 삶이. 비록 스스로 공식 이혼녀가 되고 맞닥뜨린 삶이, 물론 큰 사건은 어쩌면 아닐지언정, 인생을 살다 잠깐 마주한 교통사고 같은 그 일 때문에 어쨌든 마음 깊숙한 곳에 이상한 우울과 슬픔이 깔려 있어서 지금을 살아가 본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행복보다는 사람들은 익숙한 불행에 더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일 테니까. 그녀는 낯선 행복을 용기 있게 선택했고 익숙한 불행에서 나오고자 애썼을 테다. 불행은 번식력이 강해서 폭과 깊이에 따라 빨리 적응한다. 이걸 당연히 여기는 게 문제라는 걸 그녀는 알았던 걸까.


천천히 가라앉고 있으면 바닥에 닿기 전까지 가라앉고 있다는 걸 꺠닫지 못한다.


글쓰기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더 시선이 간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좀 더 드라이하게 객관화 해 낼 줄 알고 감정을 배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우리 두 여자에겐 '글쓰기'였고 그건 하나의 삶의 슬픔을 정화시켜 나가는 도구로 자리한다. 그녀에게 '이혼'이라는 통과 의례를 아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아니 그저 흘러가는 삶을 다시 두 다리를 대지에 디디고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글쓰기'는 분명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다.


 내게도 나만 알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절박한 마음과 아픔이 있었다. 그때마다 늘 마음으로 손으로 뭔가를 적고 있었던 내가 있었다. 눈물은 흐르고 내 손을 누군가가 마주 잡아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내 두 손은 나 이외엔 그 누구도 잡아 주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동시에 마음에선 이미 한 문장 두 문장,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것들은 타이핑되어 세상에 조금씩 희미하나마 그 아픔을 드러내며 그렇게 나를 치유 해내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적고 적고 또 적어내려갈 뿐이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었으니까...그때처럼 지금도. 아니 지금은 더더욱.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또 다른 면도 알 것만 같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이거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허락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때로는 말이다. 욕망해선 안 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내가 보인다. 많은 역할극을 치러가면서. 우리는 하루에서 몇십 번 자기검열을 하면서 살아가곤 하니까. 자유롭지 못하고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아무리 말한 들, 때론 대응책이 없으면 그냥 일단 살아본다. 덜 자유로워도 덜 불행하다면 일단 살아보는 거다.


내게 좋은 에세이는 그저 미사여구가 가득 찬, 누구나 말할 법한 그런 이야기들의 짜깁기들이 아니다. 실제 경험에서 추악하고 아름다운 모든 삶의 것들이 소재가 되어 진짜 목소리를 내주는 에세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는 걸 지 모르겠다.


거침없이 과감하게 표현해 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한 수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좋다.


아마 그녀도 나도, 진짜 숨겨진 '나만 아는 이야기'는 쉽게 드러내지 않을 듯 싶다. 그렇게 누구에게든 마음에 담아둔 진짜 이야기가 있기 마련일 테니까.



그녀에게 책의 사인을 받으면서 좋아하는 문구를 적어달라고 했었다. 그러더니 웃으면서 이런 거 잘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수줍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건넸다.


저도 퇴폐적인 거 은근히 좋아합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커버 페이지 뒷장에 이렇게 적어 주었다.


자유롭게 퇴폐적으로.
표현하고 살아요. 참지 말고.


 되도록 오래 기억하려 한다. 적힌 문장이 빛 바래는 순간까지도. 참지 않고 표현하고 살려하는 자유로움을. 그리고 때론 주저 없이 흘러나오는 귓가의 음악의 이 가사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퇴폐적인 마음도 동시에 담아두려 한다.


Somebody I can miss,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누군가 그리워할 수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이런 것뿐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47. 모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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