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에고이스트의 책 읽기'
그런 책이 있다. 읽고 싶지만 읽고 싶지 않은 책. 이 얼마나 모순적 말장난일까 싶지만 진지하게 그런 역설적 감정을 경험하게 만들고야 마는. 나로서는 읽는 생활을 지속하며 어느새 그런 책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 감정의 원천을 따라가 보면 나름의 사적 연유가 숨겨져 있는데 아마도 이런 마음의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읽고 싶지 않은 마음. 망각의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읽고 나면 언젠가 잊게 될 테니, 되도록 오래 훗날까지도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서 되도록 늦게 그리고 느리게 읽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 글쓴이의 오랜 시간을 공들여 썼을 그 시간을 향한 최선의 예의는 읽는 사람인 나도 공들여 오래오래. 단숨에 읽어 내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깊숙하고도 확실하게 빠져들고자 하는 의지. 그렇게 당신의 책을 읽고자 한다는 결의라면 어떨까. 그럼에도 참고 또 참다가 기어코 펼쳐보기 시작하다 단숨에 읽어내라고 마는 속수무책의 시간. 기다리던 이야기와 맞닿아 마음을 포개는 열렬한 해방의 시간...
'하나의 사건이 되는 만남이 있다.'로 시작되는, '고독은 연결된다'가 도착하던 날. 나는 바로 읽지 않았다. 마음은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로 책 표지와 목차만 내내 곱씹으며 며칠간은 그렇게 숙성(?) 시켰다. 아마 이 감정은 절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리라.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에 이은, 그녀의 두 번째 책, '고독은 연결된다'의 출간소식을 접했을 때. 바로 예스 24로 달려서 주문버튼을 누르고 도착을 기다리다 두 손에 닿은 새 책의 감촉. 그 순간. 누가 알까. 나조차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휩싸였는 걸. '출간'이라는 탄생 앞에서의 어떤 뭉클함, 선명한 기쁨과 축하, 동시에 밀려오는 이상한 울먹거림의 감정은 정말이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감히 작가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동시대를 비슷한 동년배로서. 심지어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는, 그러면서 읽고 쓰려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 몇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토록 기억하고 싶은 만남은 살면서 몇 번 없다는 것. 오래 알고 싶은 좋은 '연' 이길 바란다는. 일방적인 마음이 연결로 이뤄지기 쉽지 않지만... '닮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히 건넬 수 있다면 좋겠을 만큼. 이토록 읽고 쓰는 시간에 진심의 에너지를 쏟는 사람. 그런 사람의 책이니 어찌 읽지 않을 수 있을지.
도리스 레싱이나 이언 매큐언, 마쓰이에 마사시와 마사누스바움,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마이클 커닝햄의 디아워스. 이처럼 익숙하고 반갑고 친숙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부끄럽지만 아직 접하지 못한 -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 필립로스나 도스토옙스키, 폰 괴테에 이르기까지. '고독은 연결된다'는 '책'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지만 그 책 속으로 풍덩 뛰어든 작가의 사적 시간과 책을 읽는 시간 너머의 또 다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마치 '책의 책'을 읽는 기분에 빠져들게 된달까. '읽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마법이 펼쳐지는 책 (진심이지만 누군가 읽으면 너무 과장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죄송하지만 팬심이 지극히 넘쳐서 어쩔 도리 없습니다)
사건이란 어떤 가능성의 창조라고 정의하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리면 , 어떤 책과의 만남도 사건이 될 수 있다. 나의 감정과 경험을 투사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읽기일수록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 들어서며, p 5 -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는, '나를 사랑하고 읽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p 34, 지키고 싶은 모습) 읽는다는 생각에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절박하게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럴 때 나는 읽던가 쓰곤 한다. 요즘은 쓰는 시간 대신 달리는 시간이 조금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여직 너무 모자란 필력과 읽는 수준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고 느껴져서 스스로 자책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읽는 시간 속에서 어떤 안온하고도 쓸쓸한 해방감을 맞보곤 하는데. 이것이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어떤 독서 공동체적 유대감을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니. 이 책은 나에게 요즘 탐독하는 중인 철학서들 못지않게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이겠다.
읽기라는 행위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누군가 같은 책을 읽는 공통의 경험을 쌓으면서 고독은 연결될 수 있다. (중략) 연결된 고독은 고독 공동체를 이룬다. 고독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은 고독 공동체의 일원이다. 느슨하고 흐릿한 공동체이지만,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유지 비결이 될 수 있다. - p. 87 고독 공동체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말한다는 것은 언어로 발화되는 것. 그러나 발화되지 못한다 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님도 이 부분에 대해 수차례 고심하셨던 건 아니셨을지. 전작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으로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 연결 지어 말한다. '어떤 경험은 이야기가 되지 않은 채 마음에 남는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경험은 돌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 언제 풀릴지 모른 채. 나의 이야기가 곧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정체성이라면 말할 수 없는 경험, 언어화되지 않은 경험은 나의 역사에서 누락된다. 말할 수 없는 경험이 언어로 번역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중 하나는 들어주는 대상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말해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섬세한 듣기가 요구된다. 고. (p. 124,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독은 연결된다'에서 다시금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을 한번 더 우리에게 건넨다.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을 함께 체험할 때, 나만의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문장이 될 때, 그 문장은 오래 기억될 수 있다. (p. 100 -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
말하지 못하는 것.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 나는 문학 속에서 여러 성향의 인물들에 나를 투사하곤 했다. 그렇게 바보 같지만 위로받으며 나 자신을 다독이며 견뎠다.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장르를 약간 비틀어 어느 날부터 철학서에서 어떤 '방향'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다. 미셸푸코, 니체, 그리고 라캉... 다시 읽으려 애쓰는 티베트 사자의 서... 건네받는 메시지에서 보리심을 얻으려 욕망하는 자신, 끝내 나만의 만트라를 점점 확고히 하려는 연약하고 고독한 의지.
읽는 혼자의 시간은 고독하지만 한편 고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모순을. 아마도 충분히 깊숙이 읽으려는 읽는 연대의 독자들은 아실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의 고독은 연결된다는 것을. 나와 당신은 이렇게 읽으며 연결되고 만다는 사실을. 쓰는 사람이 작가라면, 독자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리하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어진다'는 어느 소설가의, 확실히 내 마음에 각인된 그 문장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나의 문장들을 조용히 되뇌어 본다.
당신의 문장들을 다시 책의 형태로 읽게 되어 무척 기뻤고, 여전히 읽으며 어떤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고.
내내 기억될, 온기가 담긴 진실된 애서가의 책이 자명하다고. 그러니 어찌 앞으로도 읽지 않을 수 있을지.
9월의 북토크를 기대하며. 그 단 몇 시간만큼은. 절대적인 해방과 자유를 더더욱 만끽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저는... 책 앞에서. 여전히 힘껏 울어버리지만. 동시에 울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있다고...
몇 권 더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 선물 만큼...오래 회자되는 게 또 있을까요...
곧, 사인을 받으러. 발걸음을 향하려 합니다. 서로의 시간이 허락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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