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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1. 2018

삶의 가이드라인을 잃었을 때

내 삶의 가이드라인은 다시 쓰였어요.

편지 넷) 엄마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완벽한 착각이었어요.   



엄마. 생각해 보면 당신은 내 삶의 가이드라인이었던 것 같아요.

 어린아이의 대부분의 행동은 누군가의 미러링(Mirroring) 일 테죠? 보고 느낀 그 상태 그대로 아이의 세상 속 화면에 다시 복사가 돼요. 당신의 껌딱지 딸내미가 되면서 어린 시절엔 늘 당신의 목소리, 말투, 눈짓, 몸짓, 표정, 행동 등등 모두 다 은연중에 따라 하고 또 보고 배웠던 것 같아요. 다행이죠. 누굴 본받아 자의적으로 따라 하고 싶다는 마음. 그건 어쩌면 내게는 평균치로 호의적인 가족이니 가능했다는 증거일 테죠.


이 세상에서 피로 연결되어 맺어지는 '가족'들이 다 좋을 수만은 없죠.

 가족이라곤 해도 무늬만 가족 있잖아요. 서로에게 폭력의 대상이고 존재이며 아프고 상처 덩어리로 존속되는 모습들요. 요즘 들어 더더욱 시야와 관점이 넓어지게 된 탓일까요. 사각지대 속의 어두운 가족들의 모습이 더 생생하게 보이거든요. 사건사고들은 늘 있는 일일 테지만 그 잔인함이 점점 깊어지는 시대 말이에요. 물론 '우리 가족'도 비단 서로에게 호의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당신의 마음에 생채기가 더해지고 나중엔 그것들이 쌓여서 '갱년기'라는 어마 무시한 놈에게 걸리기 이전까지.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은 내 삶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저한 가이드라인이었답니다.


내게는 최상이자 최적이었는걸요. 살아내는 당신의 씩씩한 모든 것들이.
그러니 내 삶의 최고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밖에요.


그러나 가이드라인도 박살 나는 건 한순간일 수 있겠구나 라는 걸 왜 그때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요.

 더 일찍 알았다면 엄마의 쌓여만 가는 상처와 더불어 갱년기의 혹독함을 좀 더 공감해 주고 좀 더 보듬아 줄 수 있는 나였을까요? 개미지옥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결심한, 순도 100%의 순진하고 바보 같은 아가씨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속을 제가 어찌 알겠어요. 다만 당신에게는 비빌 구석이 못 되어준 안타까운 친정. 그곳의 바퀴벌레가 식구이고 쥐가 일상다반사인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으셨던 걸까요. 먼 훗날 비슷한 마음으로 순간의 선택을 해낸 나처럼..


엄마의 밤들을 제대로 안다는 건 아마 불가능할 테죠. 다만 작은 빛이라도 엄마가 비빌구석이 있기를 늘 바랐던 것 같아요.


"엄마는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어?"
"없어. 엄마는 과거가 싫어. 지금이 제일 좋아."
"왜? 할머니랑 있을 때 안 좋았어? 난 엄마랑 있을 때 제일 편하고 좋았는데..."
"친정이 힘들었어. 찬 물에 씻고 바퀴벌레 나오는 집에 살고 똥 푸다가 똥독 걸리기 일쑤고."
"미안. 괜한 거 물어봤다."
"너희들 보란 듯이 다 키워냈고 지금이 딱 좋아. 허리 아픈 거 빼고. 얼마나 좋냐. 깨끗한 집에 화장실 두 개"
"엄마...."


 결코 순진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고처럼 생겨 버린 나 때문에 덜컥 책임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했던 걸까요. 그러지 않고서야 당신 같은 여자가, 아빠의 어둡고 나약한 모습을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부질없이 미운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답니다. 


 그래서였을까.. 늘 내 존재는 죄책감 덩어리 같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아요. 빛 진 마음 같은 것. 나 때문에 결혼해서 두 사람이 힘든 시기를 겪었던 거라고. 돌아가고 싶던 과거는 없이 그저 '현재'가 가장 좋다는 엄마의 대답이, 사뭇 단단하게 대단해 보였지만 씁쓸했어요. 나 때문에 모든 시련이 시작된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때면 이상하게 미안해져서 고개를 떨구기 일쑤였던 나였다는 걸,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요. 


아주 선명하게 생각나는 몇 날의 밤들이 있어요. 심장이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뛸 수도 있구나 알았죠. 

 그중 하루는 14살 때였나. 아무튼 교복을 입고 있던 때는 분명해요. 아빠의 고단함도 엄마의 지침도 그땐 피크치를 찍었던 걸까요. 안방에서 엄마와 아빠의 언성이 높아지며 급기야 쿵하는 소리들이 연거푸 들렸어요. 그 흔한 부부싸움이었죠. 그러나 엄마. 지금 생각해보면요. 부부 사이에 부부싸움이 흔할 수 있다 한들, 사실 그걸 바라보는 자식새끼였던 저와 남동생에게 당신들의 다툼은 매번 흔치 않은 특별한 사건이었어요. 그렇잖아요. 흔하게 느낄 수가 없어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의 뜻을 학교에서 배웠어도, 다 의미 없는 개소리처럼 들렸던 때가 있었거든요. 두 분의 작고 큰 몇 번의 부부싸움을 보고 느끼며 겪어낼 때마다, 동생 손을 꼭 잡고 식탁 밑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어요. 


무서워서 떨었지만, 사실 마음 속에는 뭔가 뜨거운 게 가득 차며 심장이 그렇게 뛸 수 없더라고요..그떈 그랬어요.



 '흔한 게 부부싸움'이라는 텍스트는 당시 제겐 완벽한 오타였어요.
마음을 죄여 오는 트라우마란, 그렇게 '흔한 사건'들로부터 씨앗이 되는 셈이니까.



"엄마랑 아빠랑 이혼하면 넌 누구랑 살 거야?"
"몰라. 그냥 무서워. 언제 문 열어 누나."
"기다려봐.. 조용해지면..."
"누난 누구랑 살 건데"
"나야 당연히.. 엄마랑..."
"그럼 나도 같이 살래"
"근데... 아빠는 어쩌지."
"아빠도 같이 살자 그냥."
"...."


평소에는 과묵하고 여리다가도 핀 하나 빠져서 갑자기 무섭게 돌변해 버렸던 아빠도 나름 걱정하긴 했죠.

 다만 상대적으로 끝내 엄마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물건들이 떨어지는 듯한 소음이 방안 가득 강해지는 것 같으면, 두 분이 계신 안방 앞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마구 울어댔었죠. 당신들의 소음에 잠식되어 들리기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검게 변한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의 남자로 기억돼요. 엄마는 두 눈이 시뻘게진 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선 바깥으로 뛰쳐나갔고요. 그리곤 아빠도 따라 나가셨죠. 바깥에 비도 오지 않았는데 옆에 놓인 우산을 들고 말이죠. 난 서둘러 작은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어요. 아빠가 우리 세 가족보다 더 좋아하는 듯 보여서 내가 어렸을 때 우습게도 미워했었던 그 잘난 분에게 말이죠. 어린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떼려 치웠죠. 다만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만 연신 말했던 것 같아요.


우리 엄마 좀 구해달라고. 무슨 일이 정말 벌어질 것 같다고.
아빠가 우산을 들고나간 게 아무래도 영 불안했었던 거죠.
나이가 어려도 알 건 다 아는, 그러나 힘이 부족한 나였으니까.



아빠의 그늘진 고단함과 엄마의 인정받지 못한 분노가, 그 당시엔 피크치를 찍었던 걸 거예요. 그렇죠 엄마.  

 그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쓴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놀리듯 냉소 섞인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금이지만. 그럼에도 엄마. 여전히 그 날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아프고 두근거려요. 


그래 서였나 봐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있는 힘껏 보여주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웃게 만들어 싶었거든..

 뭐가 됐든 당신 두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자 작정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공부를 해서 1등도 해보고. 집 공간의 반을 버젓이 독차지한 내 보물 1호인 피아노를 사주신 노고를 기억해내며 악착같이 콩쿠르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내고. 비록 예고에 가진 못했어도 어떻게 배운 악기인데, 열손가락 감 썩히지 않으려고 반주 알바를 몰래 하며 돈을 모았더랬죠. 


 등록금 걱정 덜하게 장학금 받고 아르바이트 달고 살고, 자비로 유학 가서 또 그 외국에서 돈 벌어오고. 취직하고 월급 받아 재테크해서 자산을 좀 더 불려보고. 엄마는 여태껏 마음의 상처라지만, 내 딴에는 손 안벌리고 결혼한 것이 자랑스러웠고. 


 사연이야 많았지만 어찌됬든 지금은 쌍둥이 손주 안겨 드리고, 또한 고통이야 어찌됬든 책을 내고 글을 쓰고 다시 이 글마저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이 모든 게 싫지는 않았어요. 힘에 부쳐 짜증과 악이 바치는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어쩌면 이 모든 흘러온 지금의 시간들 덕에 마치 드래곤볼에 나오는 시간과 정신의 방을 내 속에 가지고 있는 듯한 시간을 거슬러 살면서도 여전히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여서 상상하고 마는  발랄한 제 모습도 탄생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몇 번의 달들이 그렇게 변해가면서 같이 우리도 변해갔죠.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렇게 '잘' 변해왔어요. 다행이죠. 그쵸 엄마


내 삶의 레퍼런스였던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그 시절.

 아무리 씩씩하고 위대한 신여성의 표본 같았던 나의 엄마인들, 위태하고 아슬한 온갖 집안팎의 대소사로 인한 당신 내면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겠죠? 감추고 살았고 없다고 생각한 그 온갖 희로애락의 정점들이 한순간에 밀려들었을 테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난 아직 겪어보지 못해서 감히 어떤 텍스트로도 쉽게 표현하기가 미안할 정도지만. 어쨌든 우울과 분노라는 아픈 감정이 속에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혹은 진짜 모른 척하다 보니 내 것이 아닌 걸로만 애써 외면해 온 당신이 집을 나갔을 때 내 삶의 가이드라인은 이미 그때 무너졌답니다. 그리고 다시 써 내려갔던 것 같아요.



누군가 내게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존재가 돼보자는 마음.
거기서부터 삶의 가이드라인은 다시 고쳐 쓰게 됐죠.
내가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당신이 언젠가 내게 의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삶의 가이드는 그렇게 새로고침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 무서웠던 밤들 덕분에.

 당신이 입고 나갔던 하얀 가디건에 묻어 있었던 그것 때문에요. 누가 뭐래도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이라는 게 분명한 그 빨간 꽃 같은 흔적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쓸데없이 기억하게 되어버렸네요. 애써 거짓말을 하며 나와 남동생을 안심시켜 주었던 당신의 묘한 미소와 상기된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의 피가 묻어진 하얀 가디건을. 어이없지만 저는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사실 학교 사물함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나중엔 잃어버려서 한동안 울적했었지만 말이에요. 엄마에겐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던 나였죠.  

 

 더러운 현실을 잠깐잠깐 맛보는 순간들을 절망하고 불평할 시간에 엄마는 '남들보다'가 아니라 '나의 전보다'라는 수식어로 나아가는 여자였어요. 좀 더 나아지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야 살아졌던 사람.. 내 눈에 엄마는 그랬어요. 늘 그래 왔어요. 지금처럼.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주는 거라던데, 사실 난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엄마의 민낯과 감추는 속내마저도 그때 사랑하진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약하고 모자란 마음도 사랑의 한 형태라면.. 그래요 엄마. 난 태어났을 때부터 여태까지. 숱한 이 흘러온 시간들 속에 당신의 삶이 안쓰럽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미웠음에도 사랑했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 봅니다.


생전 못 탈거 같기만 한 비행기도, 한번 타보니 별 거 아니죠 엄마? 우리 또 같이 타면 얼마나 좋을까... 타요. 꼭. 다시.
사랑받지 못하는 건 불운이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건 불행일 테니까.
불운이 때로 찾아올지언정, 우리 불행해지지는 말아요.



고마웠어요 엄마. 그 날 다시 집에 들어와 줘서..

그리고 사랑해요. 당신이 흔들리는, 내게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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