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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0. 2018

엄마의 엄마들이 미웠어.

여전히 때론 안타까워 슬프고 미워요. 그녀들을 이해할 나이가 돼감에도..

편지 셋) 하고 싶은 거. 이제는 하면서 살아도 괜찮아요 엄마. 



엄마. 요즘 이런 책들이 유행을 타고 있어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  

 너도 나도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좀 더 당당하게 말하는 시대가 온 셈이죠. 물론 알아요. '나'라는 존재가 안 중요할 때는 사실 없었다는 것을. 다만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해도 현실을 살아내는 누군가들에게는 '나'로 완벽히 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어요. '나'를 주장하는 시대를 사는 저 조차도 여전히 쉽지 않은데 말이죠. 엄마의 과거, 그 시절은 더더욱. 


'나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 여유가 허락되지 못했었겠죠.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에게 무슨 '나의 삶'을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나 싶어요. 그렇잖아요. 월세와 전셋집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계약을 해야 하죠. 보란 듯이 브랜드 아파트 분양권에 당첨되었을 때 기뻐한 엄마를 보았죠. 그럼에도 속내는 마냥 기쁠 순 없었겠죠. 남은 은행 대출을 갚고 아빠의 권고퇴직도 겹치고. 그러니 부단히 당신은 일을 했고 가계에 뭔가 보탬이 되려 했죠. 돈이라는 자산을 선순환시키는 데 소위 말하는 재테크에 무지하지 않은 명석한 당신이었기에 어쩌면 더더욱 돈을 벌려했던 걸까요. 어쨌든 엄마는 현실에선 '엄마'였고, 그 삶을 꽤 노련하게 대처해 나가는 데 집중했죠. 그러니 당신에게 태어나 주어진 그 촌스럽고 귀여운 이름 세 글자는, 어쩌면 역할극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본의 아니게 부정되는 시간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만 생각하지 않아 주었기에 지금의 현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그래서 미안해. 그냥 다. 


그러니 엄마. 요즘처럼 늦기 전에 '나'를 찾고 살자라는 주장들이 때론 불편하기도 해요. 

 '나'로 살지 않음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감성 다분한 글들을 접하며, 사실 가끔 저도 취하곤 하죠. 그러나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요. 치열한 시간 속에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그 메시지가 이상하게 나와 엄마의 삶을 온통 부정하는 것만 같아요. 그래서 때론 거부감이 느껴지나 봅니다. '나'만 생각하는 그 마음을 말이죠. 나만 생각할 순 없는 노릇인데 말이에요. 아이러니죠. 나를 포기한 대신 주어지는 소중하고 미안한 것들이 일상 곳곳에 이미 참 많은걸요. 내가 사랑을 받았듯.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내주는 것처럼요.


그러고 싶어도 누군가에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시간들 말입니다.
그러니 '나로 살겠다'는 이 말이 여전히 불편해요


 그래서 였을까요. '나'를 생각하다 때론 '엄마'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엄마의 엄마들이 미워졌어요.

 엄마만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하게 만든 상황들을 연출하게 만드는 장본인들 같았거든요. 누가 뭐래도 공부를 더 잘하고 여러모로 영특한 건 장녀인 엄마였다면서요. 일 년에 치러내야 하는 명절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지긋한 제사음식들을 위한 장보기와 망자들을 위한 음식 만들기, 그렇게 동방예의지국 특유의 이벤트를 치르고 밤늦게 그릇 정리를 같이 돕다가, 당신과 맥주 한잔 들이키며 듣게 된 이야기들. 그 옛 과거 이야기를 엄마는 제게 넌지시 잠깐씩 흘리시곤 했죠. 나이가 제법 먹어가고 머리에 가득 '먹물'이 찰 무렵에서야 저는 점점 알게 됐던 것 같아요. 당신이 '여자'고 '장녀'였고 '누나'였으며, 장남의 '큰 며느리'였고 '큰 형님'이었고 '아내'이자 두 남매의 '엄마'로 살아온 기억이 참 고단했다는 것을. 거기에 '나'라는 게 있다면 쉽게 유지되지 못했을 지금이었다는 것을. 


당신의 이름 석자 생각할 겨를 없이 '내 시간'을 부정해야 겨우 살아졌다는 것도.


 옳고 그른 건 없을 테죠. 엄마는 내색하지 않고 씩씩했으니. 

내가 아는 당신은 늘 그랬죠. 부업이든 주업이든 돈이라는 걸 벌면서도 집안일을 해내고 육아 3종 세트 (보육/훈육/양육)를 주 양육자로 해내며 제사음식도 거뜬히 치러내는. 뭐라 불러야 할까요 이런 종족은 진짜 슈퍼맘? 단어가 뭣이든, 어느 새부터 당신이 살아온 그 현실과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무거웠을까 싶은 마음에 새삼 서른 중반이 된 이제서야 저는 눈시울이 붉어진다니까요. 냉정한 현실을 담담히 인정하며 타협하고 살아낸 셈인 엄마는, 그 옛날 엄마의 엄마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그 두 여자들의 변하지 않은 '여자' 로서의 일을 고스란히 등 떠밀린 것 같아서. 


 어린 삼촌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했죠. 

 어린 동생이라는 건 핑계 같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엄마도 어렸잖아요. 2살 터울이면 도긴개긴 아니던가요. 공부에 관심 1도 없는 동생들, 그럼에도 학교에 다녔던 삼촌들과 그러지 못해서 야간 학교를 악착같이 겨우 다녀 졸업한 엄마는 공장에 취직해서 돈벌이를 시작했다 했죠. 이 모든 것이 자의든 타의든 외할머니 혼자서는 감당해낼 수 없는 현실을 엄마에게도 떠맡기듯 물려준 것 같았어요. 이런 치기 어린 제 상상 때문에, 저는 외할머니가 몸서리치게 어리석고 화가 나고 미웠어요. 정작 할머니를 도와주는 건 엄마였을텐데, 할머니는 삼촌들을 더 걱정한 것만 같아서. 아니라곤 해도 가계와 경제적 짐은 엄마에게 더 몰렸던 건 반박할 수 없는 팩트잖아요. 

 

설거지의 달인, 청소의 달인, 집안일의 달인, 그 모든 달인들이 그냥 생긴게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홀몸으로 세 아이 돌보며 아들 둘 양육은 큰 딸에게 떠맡기고 시장바닥에서 생선을 파셨다 했죠. 

 외할머니는 가장으로 돈벌이를 하느라 그녀의 안타까운 전전긍긍 궁핍한 생활을 이제야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엄마.   역시 아쉽고 아프고 슬픈 건 어쩔 수 없는걸요. 7살 때 아궁이에 불 떼 가며 냄비에 밥을 했다고 했었나요? 믿을 수 없어요.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죠. 지금의 단련된 엄청난 솜씨의 집안일은 어쩌면 그때서부터 훈련된 것일까요. 역시 사람은 훈련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건, 제 아주 가까이에 있는 당신을 보면 알 수 있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당신과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흘리듯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단편적인 과거의 이야기들. 그것들은 제겐 커다란 충격이었죠.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표현해낼 수가 없었죠. 과거의 단편들을 두서없이 담담히 말하며 웃는 엄마가 저는 왜 슬프게만 보였을까요. 이 또한 아직 한참 모자란 모지리의 치기 어린 생각이겠죠. 삐뚤어지고 잘못된 인식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그러나 어린 제 눈엔.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여전히 가끔 할머니들이, 밉고 안타까웠어요. 


엄마도 다만 침묵할 뿐, 사실 느꼈던 건 아닐까 싶어요.  

당신이 '엄마'라고 부르는 그 두 여자는 뼛속 깊은 전통 여성 캐릭터이셨기에. 옳고 그르기보단 그저 빌어먹을 동방예의지국에서 돈이 궁한 집에서 태어난 여자였을 뿐이라고. 딱 그뿐이라고. 


비가 개이면 날이 밝아지지만, 그 비가 너무나도 계속 되면 맑은 날이 오기는 한건지 의심될 때가 있죠. 그런 시기였을까요..


내가 아니었더라면 엄마는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결혼 전에 내가 있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장남에게 시집가서 천 기저귀 빨아 가며 신혼여행은커녕 현실을 살아내기 시작한 당신을 생각하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때가 가끔 있었어요.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할머니는 손도 넉살도 퍼주는 인심도 크다 했죠. 근데 그 인심이 왜 당신에겐 크지 않았던 걸까요? 그래서 늘 제삿음식이든 술상이든 허구한 날 엄마는 만들어내야 했잖아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어른이 하는 말은 그냥 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면서요. 웃으면서 그때 좀 하기 싫은 건 안 하겠다고 댐 빌걸 이라는 말을 뒤늦게야 농담 삼아 말을 주고받았을 때. 엄마 기억해요? 나 그때 엄마의 그 말 듣고서 얼마나 울었었는지.. 


"할머니가 생활력이 강하셨어. 그래서 뭐든 아껴야 됐어. 따뜻한 집과 화장실 두 개 딸린 집이 소원이었어. " 
"따뜻한 물 좀 받아달라 하지 그랬어." 
"물은 금방 식으니까.. 고무장갑 끼고 몇 번을 너네 둘 천 기저귀 빨다가 하루가 다 갔어. 지금은 용 된 거야" 
"나 용 됐네..."
"아빠는 야근한다고 늦게 오고. 난 너네 둘 보랴 제사음식 만들고 기저귀 빨고. 그때에 비함 행복한 거다."
"왜 혼자 다 했어. 고모들 뭐했어. 죽은 사람은 아빠네 가족인데 왜 엄마가 다 해야 하는 건데."
"그땐 그런 게 있었어." 
"그런 게 어딨어. 없어 그런 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아빠도 할머니도 고모들도... 다 못났어... 미워"  
"아직 어려서 넌 몰라. 아마 이해하게 될 거야. 너 같은 딸 낳아봐라. 우리 엄마 속은 오죽했겠나." 
".... 할머니가 엄마 공부시켰으면 결혼도 안 했을 거 아냐.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두었음 안 그랬을 거 아냐.."
"그래 넌 그렇게 살아.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살아."
"...." 


 시어머니의 치매로 병간호를 할 때에도 엄마는 늘 씩씩했어요. 

난 그 모습이 싫었고 슬펐고 미안했고 또 대단했고요. 그렇게 귀하던 당신의 딸들이 아닌 큰 며느리인 엄마가 해냈었단 걸 난 잘 알고 있어요. 그땐 중학생이었고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였고 생각이라는 걸 어리지만 해낼 수 있는 저였다는 걸 엄마도 알 거예요. 나와 남동생이 어렸을 때 꼭 쥐어주는 용돈은 남동생에게만 주셨던 할머니가 그럴수록 원망스러웠죠. 남동생 컴퓨터 사 주라고 했던 할머니네 댁에 방문하고 나면 엄마는 몰래 제게 용돈을 쥐어 주고 날 꼭 끌어안아 줬었죠.


 엄마가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서 엄마는 예전의 엄마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날 그냥 말없이 안아줬던 걸까요? 엄마는 내가 당신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아서였던 걸까.. 


엄마에게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지금 살고 계신 그 집에서, 우리가 같이 살았었던 그곳에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실 나는 친할머니에게 몹쓸 짓을, 아니 몹쓸 말을 해 버렸죠. 빌어먹을 동방예의지국에서 어린 자가 어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죠. 아마 천륜 지옥의 옥황상제에게 끌려가면 저는 대박 '탈락'감이었을지 모르겠군요. 


"할머니 듣고 있어요? 들려요?" 
"...."
"우리 엄마 이제 그만 힘들게 해요. 당신 식구들의 하인 아니라고요... 나도 알건 알아요" 
...
"어서 빨리 죽어 주세요. 미안해요 부탁이에요 제발.."



도시락을 싸면 늘 작은 포스티 잇 메모를 남겼던 엄마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 마음과 정성을. 당신이 외할머니에게 받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오히려 내게 해 주고 있다는 것, 알고 있어요. 아니 알 것 같아요.. 그러니 엄마. 


이제는 예전처럼 계산대 앞에서 망설이며 조바심을 내는 시간이 덜 한 삶이잖아요.
그러니 이젠 좀 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더 하면서 지내봐요. 


 

 물론 여전히 손주 새끼들 때로 돌보게끔 만드는 SOS 치는 딸년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의 여유가 쉽게 나지 않다는 데에는 늘 죄송한 마음이에요. (미안 엄마 낸들 쌍둥이 낳고 싶어서 낳았..)



 여하튼 오늘도 저는 본 적 없던 때의 엄마의 선택에 대해 여전히 늘 마음에서부터 지지를 표하고 있어요. 당신이 속내를 아무에게도 드러낼 수 없다는 데에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엄마의 엄마들이 생각이 나면 가끔 하늘을 보며 중얼댔어요. 미워해서 미안했다고...나도 보고 싶다고... 


 또다시 살아가는 오늘. 엄마의 예전의 그 무거운 발걸음들이 점점 더 가벼워지기를 바라요. 또한 엄마의 엄마들을 미워했던 제 무거운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기를 바라고요. 그래서일까요. 우린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 두 여자를 지켜보고 있을 또 다른 세계의 두 여자가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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