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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05. 2018

가려진 진실, 그 금기에 닿았을 때

엄마, 전 여전히 함부로 '침범' 당하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편지 열셋)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고 싶어요. 아직까진 그렇게 일해보고 싶나봐요


엄마. 가끔 당신은 회사에서의 제 '일'을 묻곤 하셨죠.

 아마 그때쯤부터 였을 거 같아요. 당신이 딸의 일과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를 가끔 궁금해하셨던 건. 걱정 때문이셨죠? 입사 후에 회사에서 소문이 걸쭉하게 날 만큼 얼큰하게 강한 사수 선배 만나서 꽤 엄격한, 지금 생각하자니 말도 안 되는 스파르타식 교육 아닌 교육(?)을 받느라 호된 시간들을 보내던 날들이었으니까요. 가뜩이나 감수성 철철 넘치는 저질체력에 비리비리하게 말랐던 저는 퇴근하면서 눈물 콧물 질질 짜 가며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견뎌야 했던 날들이었죠.


  그 날 기억해요?

 늘 타던 새벽 5시의 강남행 9200번 광역버스가 하필 그 날 만원이어서 서서 타고 가다가 몇 정거장 가지 못한 채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엄마 그때 슬리퍼 차림이었던 거 알고 있었어요?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사무실에서 신고 계셨던 슬리퍼 채로 단숨에 달려온 당신을 저는 가끔 기억해요. 일이 재미없거나 고될 때. 혹은 안 좋은 일을 듣거나 직간접적으로 당해야 했을 때. 뭐랄까. 그 날 엄마의 슬리퍼를 생각하면 겸허해지면서 '이 정도쯤 괜찮아'라는 어이없는 저만의 위로를 해본다니까요.


당신을 생각하면, 대부분 용기가 났던 것 같아요. 새벽에 출근할 때 같이 일어나 준 당신이어서...


최근에도 당신의 슬리퍼를 떠올리게 된, 제겐 좀 슬픈 일이 있었어요.

 물론 당신은 지금도 '그만한 회사 없다'라고 하시겠죠. 추운 날 따뜻하게 일하고 더운 날 시원하게 일하는 '사무실' 일에 대해서. 맞아요. 정말 맞는 말이에요 엄마. 현장에서 직접 뛰고 땀 내고 추위를 느끼며 고독하게 일하는 아빠 같은 현장에서 정말 직접 날씨와 세상과 더 거칠게 마주해 내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더 겸허해지곤 하니까요. 아마 그에 비해서 최근의 제 분노의 사유를 아마 당신이 듣고 나시면 이런 일 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실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엄마, 이번 일은 뭐랄까요. 제 일도 아니고 '남'의 일임에도 이상하게 슬픈 분노 때문에 점심을 먹지 못할 정도였답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나 같이 점심 먹자고 불러낸 동료의 간접적 고충을 들으면서 '그럼에도 믿고 있던' 회사에서 점점 더 애석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요지는 이래요. 요즘 저희 회사는 연봉이 오르지 못할망정 동결이 당연하고 또 삭감되는 대상도 있었죠.

 저도 올해 연봉협상 시 거의 동결 수준이었으니. 말이 좋아서 '협상'이지 '통보'나 다름없는 형식적 사인 의식인 셈이죠. 올해 저희 회사 대부분의 직원들은 연봉 삭감이 아닌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했죠. 요즘 회사가 그만큼 좀 어려운가 봅니다. 그다지 유쾌한 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지는 않죠. 다 힘든 건가 봐요. 경기가, 돈이, 사람이, 업의 현장이. 물론 제가 분노했던 문제의 요지는 돈은 아니었지만, 그 '연봉 삭감'의 대상과 연관이 되었답니다.


육아 휴직 후 복직한 '일하는 여성'이 타깃이었다고 해요. 연봉 삭감과 권고 퇴사를 받은 대상들이.

 삭감 대상이 되는 우선순위는 대부분 '능력과 직급 대비 상대적 고연봉자'라고 암묵적인 정의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업실의 그 팀은 달랐나 봐요.물론 직원 중 대부분이 남성인 회사 성비와는 비대칭적으로 여성 비율이 꽤 높은 그 팀의 업의 본질 상. 뭐 굳이 여성이라고 타겟팅 하겠느냐마는. 그곳에서 휴직 후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하는 여성 몇 명이 그 쥐꼬리 만한 월급에서 상당 부분의 %를 삭감 다했고, 더군다나 3개월치의 월급을 챙겨 줄 테니 퇴사를 권고받았고 결국 남은 연차 휴가를 모두 다 쓰고 이미 퇴사 처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래서야 결혼하고 일 하겠어요? 좋은 선례가 없어요.


 같이 밥을 먹으며 농담 섞인 씁쓸한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제게 건넸던 말에, 쉽게 장담하지 못했죠.

 다만 그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제 일을, 제 현실을 떠올려봤죠. 엄마.. 당신에겐 말하지 못한, 그리고 굳이 말해서 당신의 걱정을 살 법한 일들은 참 많았답니다. 여전히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요. 자발적이긴 하나 퇴사를 생각했던 숱한 일들이 저라고 왜 없었겠어요..


 임원을 '달았었던' 그 닝겐과의 회식자리에서 버젓이 성희롱적 19금 발언을 듣고도 웃으며 능청스럽게 맞받아쳐주며 (그때 그럴 깡이 있었거든요 뭣도 모르고) 청하에 처음처럼을 일잔 시원하게 말아주며 (독사 같은 발언엔 독한 술이 진리라며) 그저 웃으며 넘겼던 그 때의 제 모습을.. 그럼에도 스스로 수치심에 퇴사하거나 혹은 퇴사 당하지 않기 위해 모나지 않은 돌인 '척' 했던 제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업무행태나 납득 안되는 부서의 방향성에도 '돈 벌어야 하니 그래야 한다'는 선명한 명분 하에 말도 안 되는 스케쥴 안에서 꾸역꾸역 야근 휴근 해 가며 제안서를 쓰고 가격을 후려 치고 내부 재료비를 타 부서 쪼으고 쪼아가며 깍아내야 했던 현실을.  그러면서 유산 하고서도 개인 휴가 쓰고 '여자니까' 라는 말 듣기 싫어서 감추며 지냈던 혼자 눈물 삼켰던 그 시간들을...


그 땐 좀 다크미 쩔었었죠 엄마. 좋게 생각하면 그 시간들 덕에 지금의 밝음도 되려 생겨난 걸지도....모르겠어요.


협상 없는 강요된 월급 삭감, 맥락 없는 권고 퇴사를 받은 그 직원들은 과연 부당함을 토로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를 다 듣고 물어봤죠. 그럴 기회가 주어졌는지. '악'소리 한번 내 보고 그나마 시원하게 퇴사하셨는지. 그러나 또 한번 슬픔이 밀려왔던 건, 당사자도 조용히 처리되길(?) 원했고 사실 그 분위기에 동조된 듯 함께 곁에서 '악'소리 같이 내주는 '동료라고 믿었던 옆의 동료들'도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들 쉬쉬했다고 해요.  물론 누가 누구의 힘이 돼준다는 걸 회사라는 현장에서 찾는 게 좀 오만한 착각일 수 있겠죠. 화가 났던 건 되려 임원 등급으로 승진된 그 팀장의 편에 서서 '어쩔 수 없지. 그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 그럴 줄 알았으니까 받아들여'라는 식의 남 일을 정말 남의 일로 대하는 차가운 목소리들과, 떠나는 그녀와는 반대로 살아 남아 되려 임원 클래스로 승승장구 하는 또 다른 이의 모습이었어요.


 물론 보이지 않는 속사정이야 제가 알 턱은 없죠.

 오다가다 인사만 주고받았던 그 팀장이 (동료 말을 빌리자면) '그런 사람'이었다는 건 생각도 못했지만. 여하튼 그도 회사 오더에 맞춰져서 '자신의 일'을 해냈을 뿐일지도 모를 일이죠. 다만 그럼에도 최소한 괜찮은 '리더'라면 타깃이 너무나도 뻔하게 보이는 그 대상들을 (이 또한 곁에서 그 사건을 보고 겪은 동료의 말에 의하자면) '막무가내로 찍어내리면서' 무언의 미안함과 애석함 정도는, 아니 최소한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당사자가 납득 할 만한 명분을 보이는 게 최소한의 예의 아니던가요. 뭐 명분이라는 것도 참 우습긴 하다만. 엄마 제가 너무 여전히 이상적인 업의 현장을 꿈꾸는 걸까요? 아니면 바보 같이 여전히 옆에서 같이 부대끼며 일을 하는 동료를 아직도 믿어 보고 싶은 걸까요..

업에 귀천을 매기고 '돈'과 '생산성'이라는 명분 하에 맥락 없는 기준이 강요될 때
'남'의 사건이 '나'의 일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 셈이잖아요.  


 다른 업의 현장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정말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엄마. 제가 들었던 이 현실은, 제가 여태껏 '말로만 들어서' 가끔 상상만 했던 일이 결국 누군가에겐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알아선 안 될 금지된 세계에 비로소 (이제야) 깨치고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닿아선 안되는 금기시되는 세상에서 결국 사라질 걸 알았음에도..인어공주는 같은 선택을 했을까요.  여전히 궁금해져요 가끔.


질문들이 끊임없이 제 내면에서 돌고 돌았죠. '왜'라는 질문들이요.

 도대체 왜 워킹맘이, 왜 루틴 한 일지언정 본인의 일을 묵묵히 해내 있었을 그녀가, 휴직을 하고 복직을 한 그 직원이 부당하게 해고되고, 터무니없는 연봉을 삭감당해야 했는지. 그들은 제대로 부당함을 이야기할 기회나 주어졌는지. 혹은 그렇게 암묵적으로 강요된 선택에 고개 숙이고 자리를 떠났을 때 심정이 어땠을지... 당사자인 그녀의 심정을 속도 모르고 감히도 제가 분노했었어요.


 타인에 불과한 저는 알량한 타인의 분노를 냈나 봅니다.

 당사자인 그녀가 처했을 그 새까맣게 타들어갈 듯한 속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뭐라고 감히, 파스타 먹다가 그 소리에 분노해서 더 이상 목으로 삼키지 못한 채 돌돌 면을 말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직장이라는 곳이 때론 영혼까지 털리면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이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부당하거나 억울하게. 그렇게 털리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고유한 나'들잖아요. 그러니 그러면 안되잖아요.

 누가 누굴 털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털린다는 표현이 좀 우습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일을 하다 보면 영혼이 탈탈 털리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그럴 땐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강력한 자기 세계를 가진 '나'로서 우뚝 서기를 언제나 마음 한편에선 뜨겁게 바라고 있나 봐요. 그래서 남의 일인 그녀의 일에 저는 같이 분노했고, 그 일을 조용히 넘기려는 그녀의 심정 또한 이해되는 제 자신에게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다만 이렇게 조용히 이곳에서 당신에게 털어놓는 것. 그게 지금의 전부일 테니까요.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져요.

 이런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때마다 저는 제 스스로 저만이 갖출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어 지나 봅니다. '형평성과 부당함과 애매함과 알 수 없는 명분'들을 특히 회사라는 곳에서 보고 느낄 때마다 더더욱.


사실 강하다는 건,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 강함은 아닐 거예요.
나 스스로가 필요한, 견딜 수 있고 소신을 지킬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강함이겠죠


엄마, 당신도 일을 해왔던 분이셨을 테니, 이 정도의 제 분노는 기도 차지 못할 정도의 숱한 에피소드들이 많으셨을 거란 걸 알아요. 넌지시 당신과 주고받은 대화를 가만 떠올려 보면 말이죠. 일하다 만나게 된 사람들 이야기를 당신이 제게 퇴근 후 맥주 마시며 얼핏 이야기 해 주실 때마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저였지만 당신의 업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닝겐'들이 존재하는구나를 넌지시 알았더랬으니까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은 커녕 본인에게 예의이며 타인에게 무례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뭐, 켜져 있는 가로등이 있는 반면 여전히 꺼져 있는 등불도 있을 수 있으니 그 '다름'도 인정해야 하면 그래야 하는 거겠죠.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내가 아닌 타인을 깊이 이해한다는 게 불가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그만큼 타인의 삶도 내 삶처럼 하찮지 않고 각자가 소중하다는 걸 좀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엄마 세상이 좀 덜 냉정해지고 냉혹해지지 않을까요? 여전히 이런 세계를 꿈꾼다는 건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서는 특히 태어난 젠더가 '여성'인 저로서는 더더욱, 터무니없는 '꿈'에 불과한 걸까요.


 일상의 삶에 만연한 성역할에 대한 무의식적인 학습과 그로 인해 업에서조차 배제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이젠 거부하고 싶어 졌나 봐요. 경력단절, 성평등 격차, 미투 운동 등의 요즘 문제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하는 지금, 아마 즉각적 혹은 단편적인 대안의 제시는 그 누구도, 어떤 연대도 쉽게 하지 못할 거예요. 저 조차도 이런 생각들을 그저 스스로 질문하면서 다만 오늘의 출퇴근을 해냈을 뿐이니까요.


다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유의미한 질문을 계속 목소리 내고 싶은가 봐요.

이런 편지를 당신에게 전하며, 기어코 글을 쓰고야 마는 이 시간들도...

 

가려진 세상의 금기에 다가갈수록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가봐요.  그럴 수 있는 용기, 아직 제게 남아 있을까요.


제게 주어진 이 마음, 부족한 이성과 넘치는 감성, 감각들이 부디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더 움직여 내기를.

 그렇게 최대한 활용하면서 '오늘'을 흘러가 보고 싶어요. 다만 이것도 때론 욕심인 것 같기도 해요. 아직 제게 그럴 용기가 남아 있는 건지 여전히 의문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이런 '돈 안 되는 쓸데없는 질문'들로 가득한 시간이 종종 제게 찾아오는 탓에 때론 현실에서 요구된 역할들을 해내다가 혼란에 잠시 빠지곤 해요. 흔히 현자 타임이라는 게 제게는 좀 더 자주 찾아오는 요즘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리 현명한 인간도 못 되는 저인데 말이죠. 다만 엄마 그래 보고 싶어요. 아니 당신과 나는, 최소한 그렇게 남은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함부로 침범당하지 말아요 우리. 내가 옳고 그게 선함이 더 하다면
믿는 그대로, 계속 나아가 봐요.. 마음이 있으니 우린 결국 나아갈 수 있겠죠.


쓸쓸하고 고독해도 단단하게 제 자리에서 소신껏 서 있는 우리 마음 속의 나무가 좀 더 굳건해지기를...그랬으면 좋겠어요


   고독하지만 단단한 내면을 바라는 오늘, 당신 딸이 회사에서 이런 저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당신에게 다 말했더라면, 아마 사이다각의 걸죽한 욕한바가지를 대신 해 주며 절 위로했을 당신을 알아요. 그리고 속으로 같이 삭히며 걱정을 달고 살 당신이라는 것도. 그래서 전 아직 말로는 다 하진 않을 생각이예요. 다만 이렇게 글로 잠깐 표현해 볼 뿐이죠. 언제가 될 지 모르는, 이 편지들의 묶음이 책이라는 매게체로 나와서 당신에게 전해질 그 섬데이의 언젠가를 생각하며..  


 여전히 기억은 흐릿해지고 그 날 일이 무색할 만큼 저는 여전히 오늘 그리고 내일도 출퇴근을 무사히 해 낼 거예요.아직 사표 쓰진 않을 생각이예요. 아직은.. 생각했던 '그 시기'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저는 잘 버티고 또 즐겨볼 생각이에요. 그럴 수 있겠죠? 부디 행운을 빌어 주실래요. 겉으론 틱틱댔으나 당신이 늘 그래 주셨던 것처럼. 그 이른 아침, 어이없이 출근길에 쓰러져 버린 내게 헐레벌떡 슬리퍼를 신고 달려온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그리고 퇴사한 그녀들의 앞으로의 날들이 덜 서글퍼지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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