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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27. 2018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당신과 내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여전히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편지 열둘) 어제의 일상이 오늘의 불편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선택했었죠. 숨기든가 드러내든가.


엄마. 요즘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하나 생겼어요.

 이야기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역시나 '드라마'고요.  육아 시작하면서 드라마는 멀리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요. 몇 년 만인 듯해요. 이렇게 열심히 챙겨 보는 프로가 생긴 건.  TV 보는 것보다 라디오 듣는 걸 더 좋아하는 당신으로선 아실 지 모르겠네요.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보자마자 꼭 챙겨 보고 싶어 졌거든요. 현재 중반부에 다다랐는데요. 기대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아니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만들어요. 크게는 일터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일을 하는 '여자'의 서스펜스 심리극 정도로 해 둘게요.

  

 드라마를 보면서 사실 유쾌하지 않아요. 언제나 찜찜하고 불쾌해요. 그래서 더 챙겨보는 걸지 모르겠어요.

 비치는 영상과 사람들의 대사가 말이죠. 실은 드라마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암묵적으로 숨기고 있는 어떤 것들을 말이에요. 엄마가 같이 그 드라마를 본다면 과연 제게 어떤 말을 해 주실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당신과 나도 '일하는 여자'였잖아요. 언제나 늘... 거기 나오는 주인공처럼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명목 하에 모순적으로 변하죠.  정의롭지 못한 비열한 방법으로 저급한 사람들을 상대하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아니 생존을 뛰어넘어 '성공'하려 하다 보니 생기는 사회의 여러 모순들, 그리고 올라가려 애쓰는 주인공.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생각들을 해 보게 됩니다. 특히 요즘은 더더욱 말이죠.


엄마도 스스로 일을 해 나감에 '목표'라는 게 있으셨겠죠.

 안타깝지만 당신의 '자아'를 위한 '목표' 보다 '우리'를 위한 '밥벌이'로 일을 시작하셨다는 걸 알아요. 아버지가 그러셨듯 당신 또한 부모의 역할에 무엇보다 충실하셨다는 걸 모르지 않아요. 그 내면에 깃든 자신 보단 가족을 위했던 다수를 향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고맙고 또 한편으론 이상하게 미안해지기도 했으니까... 특히 일과 집안일을 모조리 챙겨야 했던 당신에겐 더더욱.


 해내고 싶었던 일이, 꿈이, 당신에게도 있었겠죠.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당신만의 목표 보단 생계의 연장선, 가계의 도움. 이 정도의 키워드로 일을 해 내기 시작하셨겠죠. 그래도 엄마. 당신이 본격적으로 공부라는 것을 하고 본인의 주업을 자연스레 찾아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난 그런 당신이 멋있고 그만큼 좋아했어요. 말끔히 옷을 차려 입고 나서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당신. 부동산 영업을 해내고 있는 당신의 그 시간들이... 물론 저와 동생은 몰랐고 여전히 잘 모를 거예요. 당신의 그 시간들이 내게는 빛났을지언정 당신 본인에겐 보이지 않게 고되고 가혹하고, 때론 치사하고 더러운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를 테니 말이죠. 사실 엄마. 저도 '일'이라는 걸 해내고 있는 10년이 좀 지난 지금에서야 아주 조금, 아니 더욱 깊숙이 이해할 것 같아요. 드러나지 않은 당신의 삶 그 너머에 자리하는 또 다른 불편했던 일상들을 말이죠. 지금 서른 중반을 닿아가는 이 길을, 당신은 이미 비슷하든 다르든 어쨌든 가 보셨을 테니까요.


엄마는 치마보다 바지를 더 즐겨 입었어요. 그때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요. 당신에게는 입고 싶어도 '불편'했을 테니까..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진실과 마주한 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어제의 편안함은 불편한 오늘로 다가와요
목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절규를 바라볼수록 더더욱...  


일. 가정. 사랑. 자아실현과 출산 육아. 이 모든 것들이 다채롭게 버무려지죠. 여자의 삶에선 더더욱

 따지고 보면 위의 키워드들에 성별 가릴 건 없겠지만요. 아니요 엄마.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가 자신의 본업에서 보란 듯이 스스로의 목표치와 성공이라는 키워드를 다른 여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다가가려 애쓴다면 분명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장면은 다가와요. 더욱이 출산과 육아를 병행해보고 있는 지금 제가 보고 느끼고 간접 체험하는 사회 곳곳의 면들이 그래요. 요즘 보는 그 드라마에 빠졌었던 것도 어찌 보면 현실 대비 약간 극적인 요소가 더해지겠지만, 근본적으로 불편한 것들을 여실히 까발리는 듯했거든요. 그러니 한편으로 속은 시원했죠. 캐릭터의 대사 한 마디 한 문장 속에서. 다만  한편으론 씁쓸해서 마음은 서글펐고요.  


 겉으로 모든 걸 가진듯한 삶도 실은 모든 것이 위태롭기도 할 테죠.

 그 드라마 주인공이 딱 그 경계에 속해요. 어릴 적부터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며 자랐던 터라 정의사회 구현을 목표로 언론계에 뛰어들었죠. 말단 기자로 시작해 굴지의 앵커의 자리까지 오르고 공정한 뉴스를 위해서라면 거침없고 무서울 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스스로의 원칙과 정의 소신이 정말 훌륭한 캐릭터죠. 그렇지만 정작 그녀의 일상은 정의롭지 못해요. 좋지만도 않고요. 외롭고 힘겹죠. 막강한 권력과 돈, 젠더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성차별에 맞서려면 모순적이나 그녀로서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덫을 놓아야 하거든요. 상대를 대항하려면, 그들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며 비열하다 싶을 만큼 치열하게 싸워내야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드라마긴 하지만 그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모습도 그렇지 않겠어요? 나이와 출산을 이유로 내 자신을 내치려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순적으로 원칙과 소신, 정의를 때론 버려야 하는 셈이죠. 착하게만 살아서는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조건이 대등하지 않다면 그 조건을 대등한 근사치에 만들고서라도 정면으로 승부하려는 캐릭터에 빠져들게 되요...


 50대 남자 앵커가 뉴스를 주도하고 2,30대 여자 앵커가 멘트를 덧붙이며 거드는 진행을 하는 풍경.

 저녁 9시에 아버지와 뉴스 보려고 TV 앞에 앉았을 때 늘 보는 장면이 그랬어요. 별로 대수롭지 않았죠. 그때는 몰랐어요. 당연했거든요. 여자는 젊고 아름다워야 하며 남자는 나이가 조금 든 중후한 매력이 '멋'으로만 알았었거든요. 어리석고 어린 생각이었죠. 지금은 이 모든 일상들이 이상한 모순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남자의 주름은 연륜이나 여자의 주름은 퇴물로 보잖아요.


드라마 속 그녀가 대항하는 하나의 모순은 바로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리는데요. 엄마. 드라마 속 주인공은 앵커 면접을 보기 위해 아이를 지워요. 엄마로선 '미친년'소리 하실 법했겠죠? 근데 엄마. 저는 그녀를 이해했어요.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생명'이란 존엄한 가치를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는 논쟁이 일어나겠지만 최소한 일하는 여성 젠더로서의 그녀의 치열한 일상, 그리고 성공으로의 기회, 그녀의 자아실현을 생각해 보면... 고개를 나즈막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일로 남편과의 관계는 완전히 어긋나 버리고 일로서 보란 듯 성공을 얻은 대신 아내와 엄마는 지키지 못하죠.

 임산부도 혹은 할머니도 TV에서 당당히 뉴스를 보도하고 있는 장면을 제가 죽기 전에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엄마. 비록 드라마겠지만 아이를 낳았으면 그녀는 9시 뉴스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해낼 수 있었을까요? 공명하고 정직한 뉴스를 보도하기 위해 밤낮 가릴 것 없이 일에 몰두하고 자신을 부단히 관리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슈퍼맘은 가능하다고요? 아니요 엄마. 남녀 불문,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는 법이에요. 그렇잖아요. 하나를 가지려면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셈이잖아요.


 그녀의 선택이 타인의 시선으로는 냉소를 받을 만했겠지만 그녀 자신에겐 정직한 선택이었다면요

  그건 그 누구도 뭐라 해선 안되잖아요. 엄마는 어떻게 보실까요.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위해 살아야 된다고 그게 먼저라고 이야기하셨을 것 같아요. 예전에 당신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들려 하고 부단히 '나'를 위해 공부를 하고 뭔가 움직이려는 제게 해주셨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거든요. '지금은 아이 잘 기르고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라고 하셨던 저로서는 아팠던 당신의 그 말들은,  애석하게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네요.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이란 현실 속에서 극단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비정하다 싶어도 말이죠. 여자인 그녀의 선택을 탓하기 이전에 돌아봐야 할 것 같거든요. 사실상 일과 육아 중 하나만 택일할 것을 요구하는 이 사회의 비극적인 시스템을 말이죠.


분노할 수 있는 얼굴도. 사랑에 빠진 얼굴도. 그 모든 건 다 내면의 다채로운 모습일 뿐이죠. 다 '나'의 모습이예요..


 설상가상으로 여러 사건에 휘말린 그녀에게 과거의 남자까지 등장해요.

 자신이 버렸던 남자가 성공한 골프 선수로 돌아와 복수를 다짐해요. 결혼했지만 바람을 피우는 중이던 그는 주인공에게 과거의 동거 사실을 남편에게 밝히겠다고 협박까지 해 내고요. 그의 불륜 사실을 아내에게 밝히겠다고 대응하나 오히려 적반 하장으로 나오죠. 정말 화가 났답니다. 고구마를 한 100개는 먹은 듯했다니까요.


 한마디로 유부남이 바람을 핀 것보다 처녀가 결혼 전 동거한 게 더 큰 약점으로 보는 셈이잖아요. 

 폭로 후 대미지를 감안하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닐 거예요. 엄마. 따지고 보면요. 사회의 시선은 유독 여자의 행실에 좀 더 엄격한 것 같아요. 특히나 '처녀성'을 알게 모르게 신성화하죠. 성녀 아니면 창녀 둘 중 하나겠고요. (극단적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항상 저도 궁금했고, 아니 이젠 궁금을 넘어서 언제나 '의문'인 건 바로 이런 거예요. 남자에게 이런 면이 유독 관대한 나라..

 여자에 비해 남자의 섹스는 최소한 결혼 전후로 여전히 관대한, 대단한 나라 같아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런 면이 없지 않겠지만 다른 나라 사정 따위야 관심 없고 그저 제가 태어나고 자라고 아마 죽을 때까지 큰일이 없는 이상 이 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겠죠. 그래서 그래요. 같이 잤잖아요. 동의 하에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동거 사실이나 관계 동영상을 가지고 이별을 하거나 자신에게 불리할 때 협박하는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는 사회 현상이죠.


 '일'의 연장선도 옳다곤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밤 영업과 접대 노동도 한 몫할 테니까요. 억울하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언제나 중요하고 은밀한 비즈니스는 공공의 회의실보단 담배를 피우는 옥상과, 그들만의 또 다른 리그인 밤의 시간에 이뤄지곤 한다는 걸 우린 모르지 않는 어른이 되어 버린걸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을 해 나가면서 어쩔 수 없이 알 게 된(?) 이런 것들을 여기서 일거수일투족 열을 내가며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엄마도 아실 테죠. 성 접대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전히 난무하잖아요. 다만 조용히 사그라드는 척할 뿐. 요즘 같은 '미투 운동'이 거세지면 더더욱.  없어지진 않을 거예요. 그러지 않겠어요? 성매매 업소가 여전히 여러 곳에서 '겉포장'되어 여실히 존재하는 현재인걸요.


 여자가 그럴 만했겠지. 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나서. 처신을 잘 했어야지.

 이러 '뭣도 잘 몰라주시는 어른'들의 맥락 없이 따갑기만 한 시선은 사실상 제 주변에서도 매일같이 반복될지 몰라요. 사실 암묵적으로 엄마도 그러셨었어요. 물론 걱정하에 말씀해 주셨다는 거 알아요. 제가 밤늦게 야학봉사 활동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왜 그렇게 늦게 돌아다니냐고 치마 입고 다니지 말고 바지 입고 가라고. 입술 색깔이 너무 빨갛다고. 처신 잘 하라고 말씀하곤 하셨죠.

여전히 '나'라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와 처신의 일로만 치부하게끔 하죠.
젠더 폭력이 여태껏 수면 밑에 있었던 건 이런 것 때문 아닐까요
'내 탓'으로 돌리는 비극적으로 주입되는 타인들의 생각들..


 오빠만 믿으라는, 남자는 다 똑같다던 제 주변의 수많은 '오빠'역할의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달갑지 않았어요.

 사실 여고를 졸업하고 남녀가 공존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수없이 느꼈답니다. 그들의 그 '오빠'언행이 언짢았고 여전히 달갑진 않아요. 여자를 '아랫사람'이고 '보호해야 할' 약한 존재로 걱정해 주는 그 말들에 이상하게 기묘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는 저는 잠재된 프로 불만러였나 봐요 엄마. 제 입에서 '오빠'소리 한번 들어 보려고 그렇게 애썼던 대학 동아리 "오빠"들은 결국 '선배' 소리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그들이 유독 제겐, 독특하고 때로는 예민하고 까칠하며 쉽지 않다고 했던걸까요. 뭐가 쉽지 않다는건지... 내 피로 맺은 혈연이 아닐뿐더러, 왜 사회 나와서도 남자 동기 '동료'들은 모두 당최 '오빠'여야 했었 지..


 

제 안에 자꾸 낮설지만 반갑고 근사한 모습을 이젠 지켜주고 싶은가봐요. 당당히 두 다리로 서 있는 '나'를...

 

막연하게 이론으로만 알았던 페미니즘이 삶으로 성큼 들어오는 과정인 걸까요 엄마. 

그래서 전 요새 이런 화두로 글 한 문장 쓰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함부로 쓰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지만 또 거침없이 마음속 있는 그대로 써내려 가고 싶은 건, 이 감정을 어딘가에 생생하게 표출하고도 싶었나 봐요. 최소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신과 함께 바라보고 싶고요. 정면으로... 또렷하게.


당신이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것들,
늦었지만 제가 대신 드러내 주고 싶은 묘한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부동산에서 그 남자 동업자와 일을 해 내며 숱하게 겪었을 차별과 불편한 시선, 억울했던 시간들. 호의로 가장한 무례함과 예의로 포장된 가벼운 언행 속 하찮은 희롱들. 내보고 들었던, 그에겐 대수로웠을 냄새나는 그 역겨운 말들.... 그러니 엄마. 지독하게 평범했던 일상이 지독히도 무섭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사랑받는 여자의 조건'들을 공유하며 시시덕거리고 있겠죠. '말 잘 듣는 여직원'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올려주고 결국 더 위로 올라가려면 여전히 젠더 차별이 난무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엄마. 사실 최근 회사에서 알게된 충격적 (까지는 이젠 뭐.. 더 이상 충격이 뭐 있겠냐 싶겠지만)인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내 비치고 싶었어요. 근데 오늘 편지는 길어지고 좀 헛나갔네요. 다음에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걱정 말아요. 난 괜찮아요. 아직까지는요.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장담 못하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이지만.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이 마음이 단단해져 가니,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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