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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23. 2018

그만둘 수 없어요. 아직은.

허울 좋은 명분에 휘둘리지 않기로 합니다.

편지 스물둘) 마음이 스스로 허락할 때까지. 멈출 수 없어요. 아직은. 아직까지는...


엄마. 주말에 본 당신웃고 계셔서 다행이었어요.

다음 주에 친구분들과 여행을 가신다며 잃어버린 소녀 감성을 다시 찾으신 듯한 당신의 웃는 얼굴을 주말에 보았어요. 그래서 차마 제 이야기를 건넬 수 없었답니다. 당신의 웃음을 좀 더 지켜보고 싶어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까르르 거리는 그 볼 레진 미소를.


희망퇴직, 알고 있죠 엄마.

아빠가 몇십 년 전 겪으셨던 그 일이요. 그러니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테죠. 아버지는 거의 첫 직장이나 다름없었던 곳의 무사고 모범 근속상까지 받으셨던 장기 근속자셨지만. 그럼에도 회사의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이 떨거지로 나갈 때, 의지와 상관없이 반 강제 적으로 나가셔야 했죠. 노조 가입자라는 명분도 한몫 했으려나... 여하튼 회사에선 아버지께 몇 개월 치의 근속 월수를 곱한 값의 월급을 주고 미련 없이 퇴사 처리를 했다 했죠. 엄마가 그 이야기를 흘리듯 건네주셨을 때 저도 사실 흘려 들었어요. 근데 엄마. 그때 흘려 들었던 그 현실이 제게 다가왔다면, 믿으실까요.


혼자 일했을 텐데. 언제나 혼자였을 아빠 생각에....


스스로 고함이나 칠 수 있는 기회, 아빠에게 있었을까 싶어요
때로 세상은 의지와 상관없이 잔인하게 다가오니까..


당신 딸이, 흔히 회사에서 기준 없이 멋대로 정한, 아니. 정정할게요. 멋대로는 아닐 테죠.

엄밀히 그들의 명분에 기준이라는 게 있을 테니. 여하튼 네. 엄마. 이런 운을 구차하게 띄우는 이유는, 저 또한 희망퇴직을 장받은 듯 하거든요. 당신 딸, 초년생 시절 술 진탕 먹고 반 떡실신이 되어 겨우 귀가하고선 아버지 앞에서 소주 따면서 도저히 못 다니겠다고 그 난리를 치고서도 어쩌다 보니 11년 차 밥벌이를 열심히 해냈었던, 제 20대와 30대의 반 이상을 함께 해 온 곳에서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애정과 애증이 아직도 도사리는 이 곳, 함께 한 시간 덕에 미련 없이 돈 줄 때 나온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곳. 걱정마요. 엄마. 저는 이번 권고사직자의 대상자는 아니래요. 그렇지만 12개월치 기본급이라는 위로금을 줄 때, 생각 잘 해 보라는 그의 말에 이상하게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아니 참담이라기보다 서글프고 애석했다고나 할까요. 쓸데없이 말이죠. 무슨 미련이 남아서....



스펙도 좋고... 굳이 여기 있을 이유 모르겠는데.
제가 원해서 이 사업부 오지도 않았어서요. (웃음)
아무튼, 이번 대상자는 아니에요. 일도 1년치곤 이 바닥에서 잘 배우고 있고.
네.
그렇지만... 이번만 회사차원에서 배려를 해주는 거고 다음엔 사업부 차원에서 사람을 건드릴 수 있어요. 그때 내 원망하지 말고 미리 깊은 고민을 해 보라고.
... 저기 사업부장님. 실례지만 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해봐요.
그 말은 제게 퇴직을 '권장'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맞나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난 원망받지 않으려고. 그때 대상자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어서
반대로 그때 대상자일 가능성도 농후하고요?
아무래도 회사가 힘들어지면 '직출' 즉 필드에서 바로 뛸 선수가 필요하니까
직출의 기준은요? 하긴 요즘 기준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저 여기 육아 휴직하고 복직 전후로 강제 발령된 지 1년도 안 됐습니다. 당연히 직출 선수 아니겠죠. 제 의지와 언제나 달리.
... 그렇지만 업무역량은 높게 삽니다.
알겠습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아무튼. 고민 많이 해요.
네.


걱정 말아요. 사실 저 대화를 나누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만큼의 깡이 붙었나 봐

근데 사실 엄마. 그 날요. 회사에서 한 달도 전부터 온갖 악소문이 다 나서 그야말로 제 옆 동료 다른 사업부 동료. 그렇게 한결같이 대부분의 직원들의 사기가 거의 바닥을 치고 있는 요즘이에요. 물론 당신에게 들키진 않았지만, 여러모로 회사에서도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웃음 띄며 일을 악착같이 병행하고 있었답니다. 위태위태한 밥벌이와 육아... 그 와중에 당신에게 간혹 냉대와 걱정 한바가지로 먹어가면서도 원고 작업까지 병행해나가고 있었죠. 그러나 막상 정말 닥칠 상담이 일어났을 때 뭔가 기분이 되게 언짢은거예요. 좋을리 없잖아요. 누구라도..


혼자 안간힘을 써 내고는 있는데, 때론 녹슨 칼로 야채 써는 느낌...알아요?


따지고 보면 '이직' 혹은 '전업작가로서의 깡' 이 덜 붙었나 봐요. 비빌 구석이 아직 없어요.

 곳에 다니면서 저요. 온갖 여자직장인 잔혹사. 꽤 스펙터클하게 경험해서 그런 걸까, 이상한 정과 미련이 붙어버린듯 합니다. 돈 때문이었다면 진작에 나와야겠지만, 이 정도 다녔다는 건 돈만 보고 회사에 다닌 건 아니니까요. 회사는 일을 하고 그만한 보상을 받는 곳이라지만 곳은 솔직히 일은 그만큼 해도 그만큼의 보상은커녕 상처만 더 줬으니. 그럼에도 엄마. 그래도 다녔다는 건요. 제가 돈만 바라보고 일했다는 아니란 반증일지도요. 그래서 더 서글펐었나 봐요. 결국 지금이든 나중에든 '아웃'처리될 수 있는 대상자의 한 사람은 상사의 눈에 잘 모르든가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든가 혹은 여성이든가 워킹맘이라든가. 제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요? 제가 정말 일을 못해서 못난이 취급받았으면 진작에 아웃되지 않았을.. 여하튼 엄마. 그냥 상황이 그래요. 그래서 주말에 친정 집에서 당신과 아버지를 봤을 때, 손주들과 오랜만에 놀아주고 계시는 아버지를 특히나 뵈었을 때. 그의 그때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 혼란스럽고 서글펐을지를. 진작 알아줄 걸 그랬어요.


엄마 내 사주 봤다면서
응. 봤지
왜 말 안 해 근데
몰라.. 너 혹시 이름 개명할 생각 있어?
갑자기 뜬금포. 웬 이름 개명이야
휴.. 아무튼 그래. 너 사주 자체는 좋은데... 선택을 잘못했대 여러모로
뭐야 갑자기... 뭐 안 좋게 나왔어?
몰라. 딴 건 됐고. 아무튼
엄마, 나 이직할까?
뭐야 너 요즘 자꾸 그만둔다거나 이직할까 소리 하고. 이참에 떄려치라니까. 너 글이나 써. 니 좋아하는 글.
전업작가 쉽지 않아 엄마... 내가 그만큼 유명한 건 더더욱 아니고 내가 뭐라고
... 이직하지 마
웬일이야. 엄마.
사주가 그래. 이직해도 똑같대. 더 힘들 때. 버텨 그니까.

......


'안쓰럽다 내 딸'이라는 말- 


안쓰럽다. 너무 애쓰지 말라는 당신의 그 말 한마디..


네. 엄마. 집에 가서 차에서 잠든 아기들 재워두고 오만가지 잡생각에 괜히 또 눈물을 훔쳐버렸죠. 요즘 왜 이렇게 눈물이 잦아진 건지. 나 다시 약해졌나 봐.... 그때처럼, 주저앉긴 싫어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어요. 그것도 화사한 매일매일 웃으면서도 혼자가 되면 늘,  약해져...나요. 별로 애쓰면서 살지 말라는 당신의 말이 이상하게 서글퍼지는 거 있지. 애써서 살아본들, 남는 거 없다는 마치 정해진 결론을 듣는 것 같아서. 그래서였을까.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고.


희망퇴직. 희망은 없고 그냥 퇴직만을 권고하려는 회사의 명분과 시스템이라는 걸 모르지 않아요.  

누군가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빠일 테고, 누군가는 경력 단절되기를 원치 않는 악착같은 엄마일 테고. 이제 막 시작하려는 몇차 안 되는 주니어급 동료들조차 사기 의욕 동기부여, 일에 대한 애정은 이미 개뿔이 되었죠. 이런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이 상황. 납득이 솔직히 잘 안됩니다. 왜 이모양까지 되었는지. 투자금이 필요하나 돈 나올 구석은 없게 되어버린, 그 와중에 허울 좋게(?) 자리 마련해 줄 매니지먼트 급들은 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고요. 이건 분명 정상은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이게 자본주의의 대한민국 상장 회사의 대부분의 회사들이 한 번씩은 치르는 성장통일까. 그렇다면 저는 그 성장통. 치욕스럽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 같은, 나의 그이 같은, 그냥 약하고 비빌 구석 없고 정치 명분 없고 백 없는 게 죄라면 되겠죠. 정시 출근하고 야근해도 야근 수당도 못 받고도 일만 했을 뿐인 직원들 잘못이 아닐 텐데 말이죠. 그러니 인정도 할 수 없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지 모릅니다.


미련한 건 그런거예요 엄마? 짐을 옮길 생각만 하지, 이 짐을 덜 생각이나 누구 줄 생각 잘 못하는..묵묵한 마음은 바보인걸까요


제가 많은 걸 회사에 바라는 걸까요. 네. 그런가 봅니다. 상식이 통하는 회사를 바라는 게 잘못인가 봅니다.

그저 직원들의 최악의 분노까지는 사지 않을 다수가 납득할 만한 상식적인 경영을 하고, 술자리에서 중요한 디시전 메이킹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고. management level 에 올라가기 전후로 그에 합당한 시험, 교육, 레벨, 그런 합당한 스텝을 밟아가는 게 오피셜 하게 인정되는 사람을 올려놓는 게 당연하고. 억대 고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먼저 솔선수범 하고. 돈 받은 만큼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면 돈 많이 받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사내정치에 돼도 먹지 않은 명분과 허울만 좋게, 사람 관리만 하려 하지 말고 정말 제대로 일 다운 일을 하고. 다만 그것뿐인데.. 아니 하나 더 있구나. 대한민국 상장기업에서 여성 직원에게는 결국 아무리 길고 난들 유리천장이 있는 거. 오케이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이에서 전, 워킹맘으로 좋은 선례를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여긴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아니 유리천장은 좀 덜 할 거라는 걸 바라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리석었던 걸까요.


우매한 질문에 현답을 하자면 '인정'이라 누군가 말해요.

그렇지만 엄마. 이젠 억지로 인정 하지 않고 살고 싶은가봅니다. 이제 억지로 뭔가 등떠밀리듯 살고 싶지 않은가봐요. 그래서 저는 오늘 제 마음이 스스로 허락하기 전까지는 마음먹어볼 까 합니다.


아직 여기서 휘둘리듯 그만둘 수 없다고. 아직은 멈출 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좀 더 일을 해 볼 생각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한번 가보는 거죠.

깡도 붙어 버린 데다, 이제는 내일 죽어도 덜 후회될 여한 없는 하루하루를 감히 살아볼 작정이니 말입니다. 이런 말, 했을 때 당신이 한 마디 해주실 법한 근사하고 시원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네요.



 언제는 니 하고 싶은 대로 안 했더냐.
네 맘대로 해


호탕한 당신을 목소리를 떠올리며, 육성지원이 되니 한편으론 피식 웃으며 오후 일을 시작해 봅니다. 또한 감사하게 살아있는 오늘에도 현존하고자 하는 마음 가득으로... :)  


(덧붙여 너무 요즘 개기나 봐. 덜 개겨야 되겠어. 그렇지. 후퇴할 땐 후퇴도 좀 하자는 반성과 함께)


그러니 조금 더 해 보겠습니다. 조금 더.... 누가 알아요 뭔가 찬스가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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