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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01. 2018

타고난 거짓말쟁이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될 거예요. 당신한테만큼은...

편지 스물셋)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될 거야. 당신한테만큼은..


엄마. 오늘 손가락의 피는 좀 멈췄나요. 언제나 날 따끔하고 뜨끔하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피'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피' 앞에서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던 것도 같고. 대수롭지 않은 척.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거짓말. 사실은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될 수 있으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몇몇의 장면들은 모두 '피'와 연관되어 있었죠.


당신의 흰색 카디건에 묻어 있었던 빨간색 물감 같았던 동그란 자국, 새벽에 출퇴근하다가 흘려버린 코피를 닦으려 가방을 뒤지다가 아무것도 없어서 수첩 한 장 북북 찢어서 닦아 내다가 옷소매로 코피를 흘긴 날, 위험했던 그날 밤의 택시 안에서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히고 도로 끝을 달려가다가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넘어져서 까지고도 뒤늦게 알았던 무릎에 흐르던 피, 일하다가 너무 배가 아파서 화장실로 갔는데 소변에 피가 흥건히 묻어 나오면서 순간 어지러워서 쓰러졌던 날, 배가 피가 차서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채혈하려 쿡쿡 찌르다가 혈관을 찾을 수 없어서 계속 연신 껏 찔러 나갔던 간호사 언니의 주삿바늘 끝에 겨우 뽑혀지기 시작한 핏방울들. 갑자기 터진 생리는 기본으로 불편한 것도 사실이고.. (근데 나 이런 거 왜 아직까지 기억하면서 이렇게 뱉어 나고 있는지 몰라 바보같이-)


빨간색이 예쁘긴 한데 어딘지 불편해...



누군가가 그랬었는데. 여자의 인생은 '피의 연대기'라고. 

생리를 시작할 무렵이면 더더욱 거짓말이 많아졌던 것 같아. 치마에 안 묻었어, 생리통은 견딜만해, 옷매무새는 찮아 등등. 혹은 첫 남자 친구와 관계를 맺고 난 날, '아무 일 없었던' 듯하게 속으로는 조마조마 애간장 테우며 테스터기를 시험하면서 그 땀 차고 가슴 졸리는 긴장감 백배의 순간을 당신 앞에서만큼은 절대 들킬 수가 없었던 거죠. 애석하고 서글프게도. 감출 필요 없는 것들인데. 세상이 감춰야 한다며. 그렇게 배워서... 다들 그러니까.


엄마는 다 겪었고 나는 아직도 한창 겪고 있는 그 피의 시간들을 말이죠. 한 달이면 꼭 찾아오는 시간들. 여자만 겪어야 하는,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실수 같은 장치. 그래서 한 때 1년이고 6개월이고 생리를 하지 않으면 난 사실 너무 기뻤는데 당신은 왜 그리도 걱정을 하면서 산부인과에 가자고 호들갑을 떨었는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엄마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불안한 상상(?)을 하셨었겠죠. 내가 다 크고 나서야 불안한 순간을 온전히 온몸과 시간으로 경험해 낸 것처럼. 그런 게 그냥 문득 슬픈 거예요. 왜 당신이나 나나 불안하면서 살아야 할까 라며.. 그냥. 갑자기 왜 피 얘기냐고요? 아니... 어제도 채혈하다가 문득 그냥 생각이 나서. 늘 병원에 가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어서 그런가 봐. 단지 그것뿐이에요. 단지 그것뿐...


채혈 시작할게요. 좀 따끔할 거예요.
네.
왼손이시죠?
따끔해요. 따끔... 안 아프죠
네. 안. 아파요

 

엄마. 사실 전 이럴 때마다 깨닫게 돼요. 내가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는 걸.

갑자기 뜬금없이 미안해요. 별 일 정말 없어요. 갑상선도 무사할 것이고 뇌 MRI는 결과 나와봐야 알겠지만 진단서 체크하던 데스크의 간호사 선생님의 한 마디 덕에 정말 별 것 아니게 되었으니까


아직 젊으신데
그러게요. 제가 별 걱정을 다 하죠
원래 다 그래요. 별 거 아녜요.
..... 네. 원래 다 그런...


이 모든 게 다 별거 아닌 것들의 연속인데요.
그 별거 아닌 일상이 만약 거짓이 대부분이었다면, 이건 삶의 대 반전인 걸까?  



아니면 어쩌면 대 반전을 나는 오묘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문득 수면 위 내시경을 끝내고 나서 이상하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거야. 엄마. 그래서 제가 도대체 나중에서야 누군가들에게 보낸 톡을 읽고서 '아뿔싸' 했다니까요. 프로포폴 때문일까요. 반 수면 상태아직 덜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뭘 '꿈꿨'는지 아무튼 몇몇 지인들에게 어이없는 톡을 보내서 사람 애간장 타게 만들었다니까요. 정말 구제불능이죠. 나 요새 왜 이러지. 정신이 이모양이니 결국 당신과의 점심시간도 망쳐 버렸다니까.




엄마 끝나고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됐어. 너 바쁘잖아
엄마랑 점심 한 끼 먹고 보내려고 그랬지. 오늘 집에 가신다면서
알겠어. 전화해.
응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정말 그런 장소일 줄은 몰랐어요.

점심시간까진 20분 남겨두고, 거의 40분을 기다리고 10분을 후다닥. 나 때문에 급하게 해치워야 했던 당신이 애처로워서. 난 말없이, 엄마는 덩달아 말없이, 우리 두 여자는 그렇게 말없이 약간의 궁시렁 거림을 섞어가며 치즈 돈가스 하나를 베어 무는 순간 '맛있긴 하네'라고 서로 말했던 덕분에 그나마 있던 차가운 냉기가 좀 풀어지긴 했었죠.


근데 엄마. 먼저 차를 가지고 집으로 가시고 나는 회사로 돌아가려고 걸어가는데 나 또 눈물이 났어.

사실 거짓말했거든. 맛이 사실 없었던 거야. 음식에 별 관심이 없는 저로서는 그것이 아무리 줄 서서 먹는 맛있는 것이었을지언정,  그 TPO. 시간 장소 상황 모두가 맛이 없었던 거예요. 반 비몽사몽에 엄마 데리고 와서 맛있게 먹으려고 했던 식사 장소는 터무니없는 지하 1층의 반찬가게 즐비한 곳에 쪽 부분을 차지하고 나선 구석진 포장마차 같은 곳. (그러나 정말 끝내주게 줄은 길고 사람은 테이크아웃을 대기하고 있더라 그만큼 맛집이긴 했으니 반 인정) 그 와중에 엄마 손에 붙어 있던 반창고 사이로 툭 튀어나온 빨간 핏자국. 그냥 그 반창고 생각에 겨우 돈가스를 몇 점 베어 먹고 빨리 엄마한테서 떨어지고 싶었어요. 왜냐면요.


눈물이 주체 없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거든..

우리 두 사람 그동안 외식이라는 거 둘이서만 몇 번을 해봤었나, 우리 둘이 여행 간 적도 별로 없는데. 결혼 전에 좀 해볼걸. 나는 아르바이트하고 학비 벌고 공부하고 봉사 활동하고 연애질 한다고 바깥으로 쏘다니고. 당신도 맞벌이하면서 집안일하고 애 키우고 가족 챙긴답시고. 우리 둘 너무 못한 것들이 많다. 그렇죠? 그럼 지금부터 라도 하면 되는데 말이죠. 근데 또 그게 말이 쉽지 우리 둘, 육아 전선에 같이 동참하면서 쉽지도 않잖아. 이제는 딸린 기쁨 두 명 덕분에...라는 핑계를 여전히 대다니.


 아니 사실은 그것도 거짓말. 사실은, 엄마랑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어떻게 여행을 가는지, 나 그 방법 자체를 잃어버렸나 봐.


정작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은 다른 정 반대의 단어로 나와버리더라...
거짓말을 진실처럼. 진실을 거짓말처럼.




수면 위와 같이 수면 밑이 비슷한 세계는 아닐거야 그쵸 엄마.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은 대로.

애쓰지 말라고 엄마 제게 요새 자주 말씀하시죠. 근데 엄마. 그 애쓰지 않는 삶이라는 거. 나 뭔지 몰라요.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 애를 쓴다는 것도 이게 애를 쓰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허물어질 뿐이죠. 뭐가 뭔지 모르면 거짓도 진실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딱 그 '현실' 자체만 있을 테니까..


너네 신랑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냐
일이 요새 바빠
바람피우는 거 아니지?
그러면 그런가 보지 뭐. 나보다 어리고 예쁜 여자분 있으면 뭐 인정. 보고싶다 그 분..
애가, 큰일 나려고. 너 사람 일 모르는 거다
근데 엄마.. 난 그이가 바람을 피우든 말든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 괜찮을 것 같은데?
뭐? 너 미쳤냐
하하 미친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평생 한 사람에게 종속되어 내 몸과 마음은 한 사람 것이라는 거 그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책 많이 보더니 돌았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뭐 잘못 먹었냐 네가 바람 피냐?
하하 그러게. 나 좋다고 먼저 달려드는 내 눈에 들어온 그는 어디 있나... 연락이 안 오네 연락이
애가 점점.
그이 하도 바빠서 그럴 시간 있으려나 몰라.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한들.요즘 나 같아서는... 별로 흔들릴 것 같지도 않아. 너무 초연하게 들리나
초연이 다 얼어 죽었냐?
ㅋㅋ


러게 엄마. 초연이가 다 얼어 죽었나 봐요. 얼어 죽어서 내가 막 나가나 봐. 흐르는 그대로 정말 그대로.

당신의 그 표정, 너무나도 우스우면서도 당혹스러운 그 오묘한 표정이 어찌나 귀엽던지. 엄마. 나 그런 당신의 '안도하고 편안한' 그런 귀여운 표정 참 보기 좋아요. 그래서... 당신의 그 얼굴을 좀 오래오래 보면서 살고 싶어. 그래서 결심했다니까. 이번 생에 마음먹었다니까. 사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진 않지만 당신의 걱정과 분노를 덜 사기 위해서 약간의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했답니다. 일명 사회에서 그걸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다죠.


당신을 위한 거짓말, 그게 용서되는 것이라면 그래요.
난 평생 당신에게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될 거야.



다만 엄마. 내가 가끔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거짓말에 나 스스로 지레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스스로 내가 날 피곤하게 안 여겨야 하는데, 왜 난 가끔 스스로 조절이 안 되는 걸까요. 모든 초이스는 다 내가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을 다 말해 버리면 내가 이렇다고 다 말해버리면, 당신을 비롯한 가족들은 날 어떻게 바라볼까 싶어서. 여전히 나 이외의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이미 '사회적 관계'를 택한 나로서는. 엄마. 완벽한 자유는 얻기 힘든가 봐. 그렇지.


다만 거짓말을 선택하는 거죠. 나는 그럼에도 자유롭다고. 사랑에도 자유롭고 자아에도, 시간에도 모두 다.

사랑을 하면서 강한 사람은 없잖아요 엄마. 사랑을 하면 모두가 약자잖아요. 나 이외의 상대에게 연연하게 되니까. 그리워하게 되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엄마 우리들은 모두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약자가 아닐까.
사랑하지만 외면하며, 그렇지 않지만 사랑한다고도..


그래서 때론 조용히 한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도 좋은 법이죠.



오늘 아침 첫 소변에, 생리기간이 지났는데도 터져 나오지 않는 나의 피를 걱정하며 테스트기를 해 봤는데 한 줄이 나왔죠. '빌어먹을. 어쩐지. 이게 뭐야 왜 또 나만.' 이냐고 궁시렁거리다가도 그저 '셋째' 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우습게도 내쉬었지. 내가 이렇게 변해 버렸네. 내가 어느새 이렇게...


그러다 보니 막연한 짜증과 원망이 밀려왔어요. 감정적이고 유치한 생각이 들었죠.

마음속에 위험하고 저항할 수 없는 생각도 잠깐 스쳐 지나갔고...  어떤 생각? 그냥 뭐. 당장 이렇게 좋은 날씨에, 난 왜 또 오늘 이렇게 마음에 드는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고 나왔는지. 댄박에 사무실을 뛰쳐나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갈 데도 없고 날 만나줄 사람은 더더군다나 없는 현실을 알기에. 한편으론 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서 막연한 짜증과 원망의 마무리는 '귀가'랍니다.  


당신의 어제 귀가가 무사했기를. 그리고 오늘 병원 잘 다녀왔기를. 당신은 마음이 '단디' 하니까 저보단 피에 덜 흔들리겠죠. 나도 엄마 정도쯤 되면... 그 정도 나이를 먹으면 좀 더 굳은살이 베이려나. 피 같은 거 봐도.... 아무렇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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