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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25. 2018

남자 직원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고리타분에 골이 다 아파지려 하기 전에 남기는 '아무말대잔치' (요주의)

솔직히 말할게요. 우리가 필요한 건 남자야. 



그는 '남자 직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 귀를 잠깐 의심했었다. 11년 차 일개미로 한 일터에서 뚝심 있게(?) 버티고 앉아있던 나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듣는 희귀 문장이었다. 그 누구도 면전에서 그 말을 '대놓고' 일삼지 않았었기에 오늘 들었던 그의 말이 굉장히 신선했다. 아니. 사실 곱씹을수록 알 수 없는 씁쓸함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지는 대충 이랬다. 

사내 희망퇴직 프로그램이 몇 달 전 돌았고, 많은 이들이 퇴사를 했고 현재 퇴사 준비가 여전히 한창이다. 회사가 바라는(?) 대로 인건비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을 테다. 그러면서도 아이러니하게 회사는 있는 직원은 내보내고 새로운 직원을 다시 충원하고 있다. 그것도 값싼 신입 혹은 인턴들을. 물론 경력직도 최대한 '말 잘 듣는' 사람으로. 


여하튼 그 여파로 현재의 파트원 중 3명이 퇴사를 했고 남은 3명이 2인분의 몫을 해내야 하며 더군다나 '목표 달성 매출액'은 2배로 뛰어야 했다. 연봉은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깎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복리 후생도 줄어든다고 회사는 당당하게 선포했다. 소위 말하는 '밥줄 안 끊은 것만으로도 복으로 알아' 식이었다. 


더군다나 영업매출 신장을 위한 소위 말하는 '단타 치기'로 적합한 사업개발이 바로 우리 파트에서 대부분 일어났기에. 이제 그 업계를 알아가는 초보 1년 차인 나를 포함하여, 10년 이상 그 업계의 타성에 익숙했던 남자 직원 2명. 이렇게 우리 세 명은 으쌰 으쌰 고군분투 대동단결을 파트 미팅이라는 목적 하에 모인 셈이었다. 전략을 짜기 위한다는. 그렇지만 결국 필사적 생명 연장 (은 그에게는 더욱 필사적이었고) 한번 잘 해보자. 뭐 이런 느낌의 결속력을 다지려는 회의였다. 굳이 회의체에서 그런 '단결이'를 다지기 위해 회의실을 예약하고 시간을 소비해야 하나 싶었지만. (너무 인간미가 없는 걸까. 아니면 다만 생산성을 생각하려는 나의 드라이한 고지식함 탓을 해 본다) 


그와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난 중간에 껴들지 않았다. 그냥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오해 말고 들어요. 솔직히 김 책임이 애국하는 건 알고 있어.
네?
아들 둘 낳아주면 나라 애국이지. 
.... 아들이면 애국하는 거군요. (아니 왜?) 
해외든 국내든 고객이 부르면 달려가야 하는 게 영업인데 출장 자체 잘 못 가잖아. 이 바닥이 원래 그래 뭐든지 급이야. 근데 애기 봐야 하니까요.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겠어
... 제가 못 가는 처지였군요.
(내 입으로 못 간다 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미 '못 감'이라 생각하는 건 누구?)
애기가 아직 어리니까. 
네. 
필요하면 밤에 접대도 해야 하고 고객도 자주 만나야 하는데 여러모로 힘들게 굴릴 남자애가 필요한 거지 
안됬네요. 남자들은 힘들게 굴려도 돼서. 
아니 내 말은 하여튼 남자 여자 좀 다르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그 허드렛일도 김 책임 스펙에 시키는 거 미안하지. 원래 여상 나온 여자들이 하는 건데
..... 파트장님. 전 제 일을 그냥 하는 거지 한 번도 하찮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만...
(왜 여자상고 나온 여자들이 하는 일을 당신이 구분 짓는지? 또한 일에 경중을 왜 둬야 하는 건지? 비정규직 혹은 저임금노동비율 중 대부분의 성비가 왜 하필 '여자'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긴 하시는지요. 딸 둘 두신 아버님꼐서 더더군다나) 
아니 알아. 그래 나도 알아요. 인정해. 어쨌든 그건 여상 나온 친구들 계약직 쓰면 되고 김책임도 원하면 사업개발 영업 막 뛰면 되는 거라고 
... 저 배려해 주시는 거죠. 네. 그렇죠. 여러모로 도움 못돼서 참 죄송하네요. 하하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슈트가 잘 어울리면 그만 아닌가. 슈트=남자 라는 식의.... 여전한 생각에 가끔 답답했던 건..




부정하며 토를 달았다면 또 이런 말을 직접 말하든 돌려까든 들을 것 같았으니까. 


'여자들은 하여튼 감정만 앞서가지고'

'그러니까 여자들은 피곤하다니까요'

'여직원이 그렇지. 뭐 하나 그냥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여자 앞에선 말도 쉽게 못한다니까'



그의 '남 직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이런 전제가 담겨있었던 걸까. 


어린아이를 둔 '주 양육자'인 '엄마' 직원은 밤 영업(?)을 뛰거나 고객 상대함에 소홀함 

소위 말하는 그들의 '밤 영업'을 행사하기에 여러모로 '여자 직원' 은 불편하고 뒷말(?) 이 나옴 

출장 보내기 힘듦

막 굴리기도(?) 곤란함 

그 외 기타 그냥 '여직원'은 허드렛일 (이라고 늘 생각하시는 그분의 세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하라고 웃으며 기분 좋게 - 정확히 묘사하자면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기분이 좋게 -  회의를 끝냈다. 

사실 회의 시간에 주고받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 이후 나의 하루는 이상하게 진이 빠지고 연달아 씁쓸함이 밀려 들어와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1도 도움 안 되는 질문을 혼자 하고 앉아나 있었고.. (바보)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워야 하니? 그러나 조물주가 아이를 탄생시키도록 만든 온 뼈 구멍이 열리고 회음부를 절개해서라도 꺼내야 하는 생명 잉태의 몸은 '여성'인걸 낸들 어쩌라고? 

육아를 하고 있음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커리어 보존'을 위해 일터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서? 그렇지만 뭐가 됐든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인데 그걸 타인이 뭐라 할 권리가 있긴 한 건지. 뭐 삿대질을 할 거면 아이 낳고서도 일을 맘 편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든가. (맞벌이 등 하원 전쟁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테다...) 

여자로 태어난 게 애초에 잘못이어서? 이건 사실 뭐 할 말이 없다. 부모와 성별은 권한 밖이다. 신의 영역...

술을 먹고 으쌰 으쌰 지지고 볶고 대동단결 해야 하는 밤 영업을 뛰지 못해서? 아니 근데 도대체 그 바라는 걸 꼭 해야만 뭔가 '일'이라는 게 되는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 상장 회사의 팔 할 정도는 여전히 그런 썩은 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나 싶고..

출장을 잘 못가서? 급하게 갑자기 오라가라하면 여자든 남자든 불편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가야하는 당위성과 내야 하는 시간이라면 그것도 젠더차별이 존재해야 하나 싶고. 그리고 가고 못가고는 누가 결정하는지.

그 외 씨부릴 것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나 이 신성한 브런치의 매거진에서 감히 토해내고 싶진 않다 (지만 조금 토해내긴 했군.... 하. 지금 마시고 있는 3캔째인 맥주 때문이렸다) 



여권 신장, 아니 여성뿐 아닌 그저 인권을 대하는 나라의 품격은  '개개인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걸 테다. 

그런 면에서 이상하게 아쉬운 오늘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고 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조차 어리석을 수 있는 나의 오만한 기대가 남아 있기에. 그럼에도 better today와,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겪을 사회의 실체, 업의 현장은 내가 느낀 오묘한 오늘보단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오늘 스치고 지나가는 일터의 에피소드는 다시금 씁쓸함 한 모금을 머금으며 애써 마음에서 삭혀 본다....라고 끝맺음을 하려다 사실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틀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 뭐가 있는지 모를 뿐 더러, 관심 조차 없다면 깰 생각조차 하지 않을테지..


참다가도 아니라면 아니라고 발언해 보기로 한다. 
그게 설령 분노라는 감정을 머금고 온다 한들.  


분노하는 '여자'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게 생각하며,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한다는 은연중의 분위기 조성.

여전히 잔존하는 그리고 쉽게 바뀌지도 않을 구린 우리 사회의 뒤태를 이젠 능구렁이처럼 애써 넘기고 싶지 않은가 보다. 정신건강을 위해선 '그러려니' 해야 한다던데. 왜 요새 난 그게 왜 이리도 힘든 건지...


면전에 대놓고. '그러는 남자로 태어나신 책임님은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하시고 계셔서 참 존경스럽습니다. 전 감히 따라 할 수 없어서 따라 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 '나 사실 너랑 싸우려고 해, 너의 그 고리타분한 것도 모자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그 싸구려 유교사상 쩐 그 간접적으로 돌려 까는 여혐 가치관에 말이지'라는 나의 속내가 들켜버릴까 싶어서. 나는 오늘도 다만 '침묵'을 스스로 권장해 보며 마음을 쓸어내린다. 


남녀불문. 감정에 젠더는 '이하불문'임. 


그럼에도 희망은 있기에. 이런 인간상이 대부분은 아니라는 걸 믿고 또 알기에 그나마 이쯤에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사실 내 주변의 정말 좋은 '남자 상사와 선배, 동료, 후배'들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그러니 그들과 연대를 이루면 그뿐일 테지만..


그럼에도 '남자 직원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비단 그 만의 탓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여전한 시스템과 바뀌지 않은 딱딱한 인식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 


부자연스러운 게 자연스럽고,
불충분한 게 충분하다고 연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슬픈 현실의 애석했던 오늘을 위로했던 건 맥주 3캔과 짭조름하니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던 언제나 손이 가요 손이 가는 과자 안주인 제크, 그리고 나와 밀당을 하고 있는 지금 곁의 새우깡이 나를 다시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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