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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ug 13. 2018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헝거"를 읽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이 가는 책의 팔 할은 제목에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이라는 작은 제목 때문이었을까. ‘몸’. 그리고 ‘허기’. 이 두 단어로부터 자극받은 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전작인 ‘나쁜 페미니스트’와 ‘밥벌이로서의 글쓰기’ 덕분에 이미 ‘록산 게이’는 나로선 믿고 보는 작가가 되어 버렸다. 그녀를 향한 팬심을 굳혀 가고 있을 무렵, ‘헝거’의 출간 소식을 접했고 ‘철렁’ 하는 무언의 전율로 그녀의 문장들은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헝거, 록산 게이, 사이행성, 2018. 03. 08. p.340


상처받은 기억은 시간이 흘러 그녀에게 ‘거구’를 선물한다. 

어린 시절, 좋아했다고 믿었던 남자 친구로부터 원치 않은 관계와 집단 강간, 이후로도 몇 번의 성폭력을 겪었다던 그녀는 결국 폭식을 하고 방황을 한다. 


때로 누군가의 삶은 어떤 시간을 전후로
비포와 애프터로 선명하게 나뉜다. 


그녀가 겪었던 것처럼. 삐뚤어진 자아의 결심이 넌지시 그녀 안에서 솟구쳤을지 모른다. ‘뚱뚱하고 못 생겨진다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라는 어떤 목소리가.


음식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 혼자, 내 아파트에서 음식으로 나를 달랬다. 
음식은 나를 판단하지도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먹을 때는 오로지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45킬로그램이 늘고, 45킬로그램이 더 늘고, 또 한 번 45킬로그램이 늘었다.


그녀의 문장은 어느새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한다. 

격한 공감은 한순간이다.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면 누구나가 그러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짧은 문장으로 마음을 나열해 놓았고 나는 깊이 빠져들었다. 사실 나도 그랬었으니까. 먹고 토하는 짓을. 사유는 달랐지만. 비슷한 시간을 경험해 봤기에. 그래봤기에 알 수 있는 어떤 애정들이 있다. 



우울증 전후로 그 행위는 언제나 내 곁에 맴돌았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도 음식이 유일한 안식처였던 시간들. 사실은 여전히 아주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 재발하려 한다. 안간힘을 다해 애써 막고 있으며, 이젠 그 방어가 건강을 향한 습관이 되어 나를 많이 찾아오지 않은 요즘 이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가끔 내 몸에 들어간 모든 음식들을 다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은 죽지 않고 다만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결국 나도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동물이고 여자였으니까...


좀 더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최선이자 최후의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폭식과 거식의 반복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붇고 또 불어났다고 했다. 결국 고스란히 거대 비만아는 형태가 되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몸의 주인이 ‘나’ 임엔 분명하지만 때론 그렇지도 않은 게 불공평한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뚱뚱하면 어떻고 날씬하면 또 어때,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데!라고 솔직하게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겉으로는 아닌 척 하나 늘 다이어트라는 강박을 알게 모르게 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또한 미디어 속 '아름다움'의 기준은 이미 '날씬하고 멋짐, 혹은 S라인의 아름다움'이라는 모순을 여전히 낳고 있지 않을지. 






얼마나 용감해질 수 있을까.

그녀의 문장들과 만나면서 시종일관 스스로 반문하는 내가 어느새 존재한다. 나는 얼마나 스스로 발가벗겨질 수 있을까. 이 정도로 대담하고 용감하게 쓰린 상처와 마주할 수 있을까. 내면 아이를 꺼내어 겨우 잠든 심연을 건드리면서 자기 성찰을 해낼 수 있을까. 


동시에 사회와 집단의 횡포와 폭력에 맞서서 거침없이 펜을 통해 이런 목소리를 내면서 살 수 있을까. 내게 그럴만한 힘이 남아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한건 지도. 어쩌면 힘겹게(?) 발언을 해 가며 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그러면서도 인간은 얼마나 타인에게 잔혹해질 수 있을까 등등. 꼬리를 물며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질문들은 끝내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내린 스스로에게 던지는 얄팍한 결론은 고작 이것이다. 
 ‘그럼에도, 그래서 쓴다.’라는 것.  그녀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힐링하기 위한 도구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토해낸 것처럼. 그리고 그 행위들을 통해 어느새 타인에게도 좀 더 나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단 마음이 샘솟았을지 모른다.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쓰고 또 쓰고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희망을 가졌다. 
학교에 다니고 일하고 공부하고 점점 더 조금씩 더 나은 직업을 갖고 학교를 더 다니고 조금씩 더 나은 작가가 되었고 아주 천천히 더 나은 사람도 되었다.


드러내기도 감추기도 하면서.. 스스로 조금씩 투명해지다보면 결국 홀가분한 날도 찾아오는 것처럼. 



저자는 작가로 명성을 얻고 꽤 눈부신 성취를 해냄에도 여전히 뛰어넘지 못하는 벽을 인정한다.

‘뚱뚱하다’는 외적인 요소가 결국 이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임을 그녀는 깨닫는다. 여전히 외모 지상주의에 '여성'으로서의 몸은, 특히나 지나친 사회적 억압과 코르셋을 장착해야 살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는 걸 보면. 


그렇다. 생각해 보면 김연아 선수나 손연재 선수는 경기가 끝나기 전후로 수많은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기 일쑤이며 여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나, 그에 뒤지지 않은 업적을 남기고도 왜 역도계의 장미란 선수는 경기 전후로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되어야 하는 걸까 라는... 불편한 의문이 생기기도 했으니. 


이야기의 끝에서 그녀는 말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사는 수치심과 자기혐오,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들에 대해서. 이렇게 가장 인간적인 고민을 한끝에 그녀는 우리에게 ‘자유’라는 화두를 자연스레 던진다. 결국 개인의 정신적 자유뿐 아니라, 몸에 관해서도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삶의 자유가 가능하다는 어떤 깨달음들에 대해서. 


내 행복의 기준은 내 몸무게가 아니라 내 몸에 더 편안해하는 감정임을 배우는 중이다. 
여성이 삶을 사는 방식과 몸을 다루는 방식을 너무나 독단적으로 규정하려는 이 악독한 문화적 관습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개인의 이야기지만 비단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이야기. 


어쩌면 그게 ‘헝거’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더욱 알려져야 할 사람들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녀의 용기 어린 다음 행보를 나는 여전히 응원하고 있다. 물론 이제는 시종일관 응원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은 나는, 이제는 좀 더 열심히 꿈틀거려 보고 싶어 진다. 


읽고 쓰면서. 어떤 나약하고 은폐되며 폐기된 채 사라지는 것들에게, 미약하게나마 작은 시선과 마음을 좀 더 보태 보고 싶다는 알량한 욕심을  감히 내 본다. 


'나'라는 인간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며 사는 것과, 알고 난 이후 작은 꿈틀거림을 이뤄내는 건 분명 다를 거 같아서. 나의 아이들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나조차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쓰면서 종종 허기가 지는 배를 물로 달래가며 나는 오늘 내면의 허기와 잠깐 마주해 보려 한다. 

상처받고 미워했었던 한 때의 몸과 마음을. 또한 시간이 흘러 여전히 사랑받고 또 사랑하고 싶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공허한 욕심에 허기가 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비움으로서 다시 채워나갈 수 있기를. 그러나 여전히 비워내고 싶기도 한 내면의 목소리와 마주해가며.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좀 더 괜찮았던 오늘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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