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Sep 07. 2018

사랑을 기억했어도, 그렇게 가버렸을까

메멘토 모리.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것들..

편지 열하나) 아픔을 지워 주지 못하지만 곁에서 함께 울어 줄 거라는, 구원의 목소리가 있었더라면.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도. 기억해요. '나'는 사랑을 주고 받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그래야 천천히 시들죠.






선선하고 맑은, 가을의 시작입니다.

그렇지만 엄마. 이렇게 좋은 날씨를 맞이해도, 잠깐은 짓궂은 생각을 해 버리기도 합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뛸 때가 있습니다. 요즘 참 요동을 칩니다. 차분하지 못하다는 거죠. 마음 상태가.. 일상 속에 쌓여가는 스트레스가 또다시 정점을 찍어가나 봅니다. 가라앉았다고, 괜찮아졌다고 믿고 있었는대 제 자신에게 배신당한 기분입니다. 그래도 날씨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편이 역시 나아요. 고맙거든요. 그나마 잠깐이라도 맞이하는 선선한 바람과 햇빛, 구름. 그런 것들을 살아서 맞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잠깐 하게 되니까요.


마음의 민낯을 다 드러내며 사는 사람은 없겠죠.. 

그러나 때론 드러내기도 하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라는 게 그 민낯을 감추고 검열하다보니 내면이 썩어 문드러지고 마는 일종의 마음의 감기 같은 병이라면서요. 아마 제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도 재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네요. 날은 선선하고 참 화창했어도 제 세계는 잿빛 그 자체였습니다. 깊은 슬픔으로 빠져 들기 일쑤였죠. 철저히 삐뚠 마음을 숨긴채, 모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하려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 했던 엄마역할.. 당연한 책임인데 왜 그리도 무거웠고 여전히 때로 힘겨운건지. 원치 않게 좌지우지되며 휘둘리는 삶 같아서 말입니다 .. 다둥이를 당신의 도움을 받아 키워 내면서도 저는...참. 몹시. 슬펐습니다.


그런 한때의 제 슬픔을 '그녀' 도 간직했던 걸까요.

사실 엄마. 한 가정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일시 후원을 했던 날은 제 원고료의 남은 잔액이 입금되던 날이었습니다. 참 신기했죠. 우연인지 운명인지 아니면 그냥 제가 스스로 끼워 맞춘 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 마음이 요동 친 건 '죽어버린 세 쌍둥이 엄마'라는 단어 때문이었을 겁니다.


후원 광고 기사 내용에 별 건 없었습니다. 세 쌍둥이가 태어났고 아이들은 아직 갓난쟁이이고 그들의 엄마는 산후우울증으로 죽었고, 남겨진 아빠는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며 양육을 하고 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세상의 숱한 구원과 후원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 하나였겠죠. 근데 제가 단박에 꽂혀버렸던 건, 지나칠 수 없었던 건 딱 세 가지 단어 때문이었어요. '쌍둥, 엄마, 우울증'이라는 이 키워드 때문에..  


일시 후원을 하고서도 그 날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쓸데없는 생각'을 또 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인간 다움' 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 라든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등.. 근데 엄마 그거 아세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나 답다는 게 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기억하고 싶은 거예요.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기적입니다. 누군가에겐.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인간다운 삶'.

그건 지켜내기 꽤 어려운 숙제기도 할테죠. 예컨데 피가 철철 흐르는데 그걸 지켜보는 사람은요. 정작 흘리는 사람만큼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인이 되어 버린 그녀, 세 쌍둥이 엄마에게도. 아마 혼자 제일 아프고 고통스럽지 않았을까요.

천사 같은 아이 셋을 두고 가버린 그녀에게, 엄마로서 자격미달이라거나 매정하다거나 어리석다고 누구들은 날카롭게 비판할지언정 - 요즘 댓글들, 왜그리 잔인한걸까요 - 저는 그녀가 불쌍해져서... 세 쌍둥이 엄마가 된 그녀의 숨겨진 이야기만 상상 되더군요..그 엄마에게 과연 노출된 그 환경이  어땠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아기라는 소중한 생명은 확실히 사랑받아 마땅하다해도 때로 남들에게 비춰지는 보물이 나에겐 일종의 끊임없는  터널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그래서 그 엄마가 선택한 최후의 결정죽음이었다면. 그만큼 극한으로 스로를 몰아붙였거나, 주변에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거나 알려하지도 않았거나 보듬어 주지 않았모릅니다. 한없이 지쳐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를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기억은 그렇게 순식간에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기도 하나 봅니다.


제가 옥상에 올라갔을 때도. 나약해서 울어 버리기 일쑤일 때도.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이게 과연 인간인지 젖 주는 동물에 지나지 않은 건지,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지, 자유라는 게 헌법으로 엄밀히 정의되어 있으나 과연 자유는 누구를 위해 있는 건지. 정말 갖고 살 수는 있는 가치인 건지. 창살 없는 감옥이 뭔지...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도 겨우 버티고 서 있었을 때가 저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죽어 버린 그녀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였나 봅니다. 제가 뭐라고. 그녀의 그 순간을, 그 일상을. 잘 알지 못할 텐데 감히 말이죠. 다만 비슷한 마음을 한때 가졌음에. 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당신을 이해한다고...생각하면서 한편으론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단 한 명이라도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과연 그녀가 그렇게 가 버렸을까 라는 쓸쓸한 생 밀려오기도 합니다.


혼자 어둠 속에 남겨졌을 때. 그 어둠에 삼켜지지 않기를... 그럼에도 꿋꿋히 자신을 세워보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필요해요.


남겨진 남편은 아마 아내의 부재를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이라는 게 때론 몹시도 지독하잖아요. 남겨진 사람들은 살아야죠. 육아와 생계를 위한 24시간의 반복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세 명. 남겨진 보호자. 여유 없는 형편... 아마 세 갓난쟁이를 돌보느라 그 또한 자기감정을 돌볼 여유 따위 사실 가당치도 않을지 모르겠어요. 아내가 왜 죽었는지. 왜 산후우울증을 얻었는지. 막을 수는 없었는지.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아마 그런 생각. 하지 않고, 할 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툭 치면 탁 하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아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몰아붙여질지언정. 마음 한 켠에는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여태껏 사랑을 주고받았던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기를. 그럼으로 인해 다시 살아낼 힘도 생기지 않을까요. 죽어버린 그녀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럴 여유도 힘도 마음도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았을 지 모르지만. 이유야 어쨌든 죽어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요즘 저는 헌법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하다 하다 못해 헌법이냐고, 그 시간에 아이들 더 보고 네 건강 챙기고 살라고 볼멘소리 하실 당신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근데 엄마. 헌법까지 읽게 된 이유는 별 건 없고 다만 한 권의 책이 트리거가 돼 주었거든요. 그리고 제대로 살며 잘 흘러가보고 싶어서... 덜 억울거나 더 깊이 다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유야 어쨌든 엄마. 헌법에 보면 신체적 자유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해. 선명하게 나와 있어요. 법으로까지 '개인'의 '자유'와 '존엄'과 '행복'을 말하고 있다는 걸 여태 몰랐었습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책으로 도망치는 이유는 언제나 그랬던 것 같아요.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죠. 때로는 도피처로도 적합했고..


그녀가 이 사실을 좀 더 냉정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알려 했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할 '권리'를 선물받았고 결혼과 가족생활이라는 것도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걸 기억했더라면...


- 헌법 36조. 1항.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아니. 이런 문장 다 필요 없어도, 태어나 지금껏 살면서 마음 깊이 사랑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 속에 남아 다면, 상기할 수 있었다면... 죽지 않고 버티어 살아갈 힘이 나지는 않았을까요..고인을 두고 어쩌면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생각일 수 있으나, 그치만 저는 헌법 속 이 문장 읽으면서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습니다.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되려 선명하게 누군가에게 증명받은 느낌이라서 말입니다.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도 싶어졌고..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 이런 말 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녀에게도 살아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까... 감히 우습게도 생각해 봅니다. 늦었지만...남아있는 사람들이라도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대 막론, 집값 상승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을 겪으며 가정불화까지 겪으면서 사는 삶이 정말 인간 다운 삶인지 - 하우스 디바이스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이 이렇게 요지경입니다. -  자본의 격차와 타인 혹은 사회의 폐습적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진정한 삶의 행복. 자유.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 살아있는 지금 곁의 그를, 그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너그러이 보듬고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서로 할퀴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건 아닐지. 상생이 원칙이나 여전히 권력 앞에서 알게모르게 행해지는 갑을 수직 관계와 그로 인한 갑질이 만행하진 않은지. 살면서 정말 지켜져야 하고 마땅히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들이 정녕 무엇인지를. 부디 기억하며 살았으면...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것에도 삼켜지지 않을, 단단한 마음으로.


지는 석양도, 시간 지나면 다시 떠오르는 해가 되잖아요. 그러니 살아내 보는 거예요. 지다가도 다시 떠오르기도 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