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미친 의식의 기록. (아무말주의)
10일. 한국 시간 기준 미국으로 떠난 이후 흘러간 날들의 합이 벌써 일주일을 넘기고 있다.
스스로 옭아맸던 지나친 무게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중증외상센터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이들을 보며 피 터지게 혈전을 벌이고 있는 누군가들에 비하면.... 내 삶은 참 평화롭고 순탄함에도 불구하고 난 뭐 그리 무겁고 힘들게 산다고 자주 징징대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럼에도 무거웠고 한껏 예민함이 치솟아 있었을 무렵. 결국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신랑은 몇 달 전부터 농담 삼아 '정말 갈까'라고 무의식에서 터져 나오곤 했던 내 한마디들에 종지부를 찍는 듯 비행기 티켓을 끊어내는 사고를 질러 버렸다.
- 애들은.... 어쩌지...
- 원했던 거 아냐?
- .....무슨 말이 그래. 당신. 나한테만 말 곱게 안 하더라...
-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가기로 했잖아. 론하고 마리아도 보고 싶댔어. 올해는 가자. 어머님들께 신세 지지 뭐.
- ..... 죄송하게 됐네 또.. 맨날 신세나 지고... 용돈 두둑이 드려야겠다..
- 이해해 주실 거야. 그리고 우리도 좀 쉬어야지. 나도 좀 쉬고 싶어.
- ...... 그래... 당신이나 나나. 안 쉬고 살았었네. 그랬네...
비행기 표를 끊었다고 메일로 flight schedule을 보여주던 날.
신랑은 야근을 했고 나는 육아 퇴근을 마치고 치솟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연신 맥주캔을 따 댔었다. '나도 좀 쉬고 싶다'는 말이 내내 생각나서 그랬던 걸까. 미친 듯이 나보다 바쁜 그는 연차가 20일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만큼 회사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더 바빠야 했다. 심지어는 출국 하루 전날까지 급하게 해외 출장을 연달아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생계를 책임지고 업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도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적으로 그이에 비해 일이 바쁜 건 아니었지만, 정신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치닫고 있었다. 마음이 바빴다. 언제나. 그래서 편안한 적이 별로 없었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월급을 위한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위한 또 다른 일, 그리고 그 외 주어진 역할 속 관계들을 위한 모든 것들 - 육아, 가족, 대인 관계 등등 - 모두. 비록 완벽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최대의 에너지를 이곳저곳에 펼쳐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들에게는 열정 뿜뿜하는 슈퍼 워킹맘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틀린 말.. 슈퍼는 개뿔. 마음 챙김엔 여전히 하수에 불과해서 책을 읽다가 눈물을 쏟고 마는, 혼자 감정조절 안돼서 여전히 회사 화장실 변기 붙잡고 울기 일쑤인 나는 역시 지쳐가고 있었다. 차라리 일이 바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은 여전히 흐트러지기 일쑤고, 소소한 꿈들을 감사하게도 이뤄 해내감에도 어딘지 모를 공허함에 미친듯한 외로움을 혼자 다 겪어내고 있었던 찰나에.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쉬는지 모르는, 제대로 쉬어 본 적 없는 그와 나. 우리는 결국 떠났다.
어렵게 만들어낸 시간이기에 소중하다는 걸 알았기에 후회를 최대한 덜 하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좀 꼬였다. 출국날부터 사실 제대로 감정의 병신 짓을 일삼았던 나는 (사연을 구구절절 털어놓을 수 없지만) 국적기 라운지 앞에서 나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그이를 보자마자 한없는 미안함에 눈물로 여행을 시작했었다. 어떻게 만들어 낸 소중한 시간인데, 절대 망가뜨릴 수 없다며 그렇게 다시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많이 웃고 울지 않기를. 배려하고 감사만 하기를.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니 최소한.
내가 마주하는 지금 내 곁의 이 사람에게만큼은. 상처보다는 사랑을 더 주기를...
그 마음이 헌데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가고 있었던 감정의 풍선이 결국 날카로운 바늘 하나에 '푹' 하고 찔리면서 '팡' 하고 터져버린 것 같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꼬여버린 걸까. 나는 지금 방안에 콕 박혀 있고, 남편은 지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있다. 아마 그는 불편한 마음으로 코로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방금 전 그이 앞에서 결국 터진 분노를 애써 조용한 목소리로 분출하면서 질질 짰던 나보다는 우선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했으니. 그를 이해하지만, 사실 그이를 향한 비겁하고 비극적이고 얄궂은 내 모든 나쁜 생각들을 애써 잠재우기 위해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니 여전히 이렇게 글로 도망치는 순간이 전부라니. 여행 오면 별 거 있을 줄 알았더니, 따지고 보니 또 별 게 없는 듯싶다.
일상은 어딜 가나 반복되고 여행도 누군가에겐 일상의 연장선이 되기도 한다..
남편의 미국인 친구 부부네 집에서 머물며 함께 하기로 했던 게 어쩌면 잘못이었을까.
그렇지만 초대받았으니 우리로서는 감사하고 또 미국 가정의 일상이 사뭇 궁금하기도 했으니 크게 반발 없이 why not이었지만.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공기 좋고 다소 한적한, LA 다운타운에서 좀 떨어져 있는 지역인 인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하루 머물다가 서부의 몇 군데를 차로 이동하며 이곳저곳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로 했으니까 별 깊은 생각 없이 OK 했었다.
세도나에서 그랜드 케니언, 그리고 샌디에고까지.
풍경은 멋졌고 생각은 일상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었다. 공간은 이미 한국을 떠나왔기에 걱정은 되었지만 이미 육아라는 과업의 스위치는 꺼져 있어서 큰 불편함도 없었다. 단 하루 신랑 친구네 부부가 찾았다며 데려간 중국 식당의 오싹하게 맛없었던 음식 한 끼를 제외하고는. 그래 사실은 다 괜찮았다고...라는 건 거. 짓. 말.
여기저기 묘한 억울함과 불편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렌트도 하지 않고 차를 신세 지는 덕분에 모든 외식을 우리가 지불하기로 한 살벌한 상황을 충분히 감내하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어떻게 온 여행인데 이런 묘한 억울함과 불편함을 겪으며 미국 여행을 왜 하고 있는지 자체에 좀 감정이 뒤섞였던 걸 테다. 스스로 억울하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미국의 Tax, 경제관념 제로의 지인 와이프님의 고가 외식의 연속과 매 끼니 이후 고급 디저트와 스타벅스의 향연이 점점 나로서는 못마땅했던 건지. 아니면 다소 자유롭지 못한 채 여행 일정을 온전히 타국 부부에게 의지하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해야 하는 그 상황이 나는 이상하게 억울하고 불편한데. 연신 그들에게는 웃으면서 상냥하게 대하고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호탕함과 유쾌함, 그리고 정말 그이가 그렇게 '말을 먼저' 걸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은근한 서운함이 물씬 쌓이다가 밀물 들어오듯 순식간에 훅 하고 감정은 밀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 한국에서 다 챙겨놨다고 생각했던 육아템 마저 미처 제대로 못 챙겼던 탓에 친정엄마만 개고생 시키게 되었던 상황들까지 겹겹이... 나를 다시 마음 무겁게 만들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고.
- 내가 정신 빠져 있으면 자기라도 제대로 정신 차리고 챙겨줬어야지.
- 카시트 없으면 등 하원 못 시키나. 왜 그렇게 장모님한테 쩔쩔매.
- 쩔쩔매는 거 아니고 미안한거야. 몇 주간 아이 돌봐 주는 거. 쉬운 일 아냐. 자긴 미안하지도 않아?
- 그게 미안할 일이야?
- .... 그래. 당신은 늘 그랬지. 미안하단 말. 고맙단 말. 나나 가족들에게 '먼저' 표현한 적 없으신 대단한 분이셨지.
- 왜 화를 내고 그래 여기까지 와서.
- 화 나. 나니까 화내는 거야. 한국에선 말 한마디 별로 안 걸던 당신. 미국 오니 개과천선 하셨네. 남들에겐 고맙구 뭐든 다 해주고 싶지? 그러니 말도 그렇게 '먼저' 걸어주고. 미안하다 고맙다 연신 해 대고. 뭐가 그렇게 남들에겐 미안해? 지금 집에서 애들 봐주는 장모님한텐 안 미안해?
- 누가 안 미안하댔어. 왜 그래 정말.
- 근데 말 먼저 안 하잖아. 지금 론이랑 마리아랑 심지어는 그 버릇없이 패디큐어 해대느라 사람들 기다리게 만드는 그 고등학생 딸애까지는 잘 챙기고 있으면서. 이 사람들이 그런 당신 진심 알아주기는 해? 진심도 통하는 사람에게 쏟는 거야. 뭐가 그렇게 고마운데. 숙박료 세이브? 숫자 계산 제대로 해. 5인 외식비나 숙박료나 그게 그거. 아니. 손해 보는 장사야. 알아?
- 뭐 말이 그렇게 거칠어.
- 그래. 나 원래 거칠어. 그리고 속물이야. 몰랐어? 나한텐 우리 가계, 우리 집, 우리 식구가 더 중요해. 근데 자기 안 그런 거 같아.. 그리고 당신. 내 책.. 책 한 권을 '먼저' 물어보고 사줘본 적 없었어. 먹는 게 읽는 것보다 중요한 당신이랑, 읽는 게 먹는 거보다 중요한 내가 만났으니 어련하겠어. 우리 이제 어련하겠냐구!
- ...싫다 정말.
- ...왜 나한테만 늘 잔인해?
- 내가 뭘 어쨌다고.
- ...같이 있어도 외로워. 혼자 있는 것보다 더.
- ...소설 그만 써. 그만하자.
- ...말 그렇게 하지 마. 당신, 소설 제대로 써 본 적 있어? 글이 그렇게 쉽게 써지는 건 줄 알아! 내가 무슨 원고 쓰는지 궁금하지도 않잖아. 먼저 안 묻잖아. 관심 없잖아. 당신 나한테. 내 마음 안 궁금하잖아..!
- 그만하자.
..... 나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정말 아닌데...나가줘..이 방에서.
- 저녁 안 먹어? 밖에서 우리 눈치 보면서 기다리잖아.
- 좀 보라고 해 그 눈치. 그리고 안 먹어. 안 먹혀 그놈의 끼니...굶음 어때서. 가서 당신이나 많이 먹어.
상황 종료.
미국 여행 와서 공모전 결과를 받아봤지만 그이에겐 말하지 않았었다. 공모전을 또 냈고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는 나라는 걸. 그이의 '소설 그만 쓰라는' 그 무의미한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서 마음에 꽂혀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무너졌던 건.... 더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감정이 도저히 고삐 빠진 미친 조랑말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가.... 잠깐 생각과 마음이 어느 새부터 정리가 될 것도 싶다. 아주 진부한 어떤 진리가 또렷하게 마음에 남기 시작해서. 결국 흐르는 눈물로 스스로 정화시켜 나가면서도... 어떤 선명한 사실에 닿게도 된다.
결국 '한번' 밖에 못 사는 '삶'이라는 것. 누구나 태어나면 마지막엔 죽는다는 것.
그리고 꿈을 꾸는 이들 중 꿈을 이루면서 사는 이들보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대부분일 지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꿈을 포기할 줄 몰라서 여전히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어리석게 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과....그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라는 것까지도...
결국 한 번뿐인 삶에 내게 남겨지는 것들, 그건....
사랑..... 그 기억, 시간, 그리고 마음이다.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하고 선명한 이 사실을 나는 여전히 지나치고 만다.
그리고 사실 그이도.. 지나치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삶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기 쉽다. 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는 채. 아니 알면서도 어느새 망각한 채로. 아니 기억하지만 그 기억은 어느새 사라지면서도 있다고 믿고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고.
식사를 다 하고 들어와 이 글의 끝 마무리를 해 내지 못하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눈물을 잠깐 닦고 있는 내게 그이가 묻는다. TV 켜도 되냐고. 그의 무미건조하면서 다소 눈치보는 목소리에 나는 결국 차분해진 목소리톤으로 BGM 을 깔고 '응'이라고 대답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은 3일을 힘들게 떠난 만큼 마무리만큼은 잘 해내자는 암묵적인 동의로 이렇게 잠정적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이는 잠이 들었다. 코를 골며 잠든 걸 보니 그도 나와의 신경전에 외국인 친구부부 대함에 약간의 눈치와 미안함에 여러모로 피곤했을 걸 안다. 분노가 조금씩 가라들면서 이젠 다시 안쓰러운 감정단계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빌어먹을 패턴은 여전히 유효하다..예측 불가능하고 종잡을 수 없는 나의 거침 없고 솔직한 몇 가지 면들도 그이에게는 여전히 다루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되서 약간 미안함....의 단계로도 들어가기 시작한다...다행이다. 그래야 남겨진 일상이 덜 피곤할 테니까.
'응'이라는 대답 안에는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쓰고 있는 나의 사랑이 들어있다는 걸 그는 알까..... 별로 알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다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고 애써 알아보려 하는 건 단지 이것 뿐.
내 삶에서 결국 내게 남겨지는 것들을.
그게 내게 '사랑'이라면 내가 사랑이라고 믿는, 믿어야 하는 대상들과 존재들에게 있는 힘껏 솔직한 최선을 다 해볼 작정이라고. 여전히 이렇게 다만 귀중하게 주어진 이 하나뿐인 생을, 혈전까지는 아닐지언정 기쁜 일상의 행복에 감사함을 놓치지 않고 되도록 잘... 정말 잘 살아내 보고 싶다며..(잘 산다는 게 뭔지 때로 잘 모르겠지만)
브런치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랜드 케니언에서의 오전 9시, 잠깐 주고받은 메시지가 문득 기억이 난다. 타이밍이 참 짓궂다. 별 거 아닌 메시지에도 별 의미를 부여하게 되니 말이다. 나 원 참....
- 자유로운 미국이 김 작가에게는 어울리는 것 같아요.
- 살 겁니다. 언젠가 여기에서..
- 잘 지내고요.
저는 지금 잘 지내지 못합니다 라는 말을 끝내 건네지 못했고 당분간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여전히 스튜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