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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18. 2018

#1. 흔한 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한쪽 벽이 책으로 가득한 북카페 느낌의 오픈 회의실이 가득한 사무실)


읽고 있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덮으려 할 때였다. 

여느 때보다 좀 더 들떠 있는 지현이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른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어떤 사건을 알리는 듯한 예고편을 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처럼. 



- 언니. 아직 있었어요?

- 응. 어쩐 일이야. 아직 퇴근 안 하고. 

- 내 정신 좀 봐. 내일 남자 친구 줄 선물 두고 갔지 뭐예요. 주말에 생일이거든. 근데 퇴근 안 해요? 불금인데! 

- 응. 오늘 좀.. 할 일도 있고 이상하게 발이 안 떨어지네.. 근대 저기 저분 너 쳐다보는 거 같은데? 누구..

- 아. 언니 그 날 휴가여서 몰랐었죠? 이번에 대표가 새로 섭외한 작가님! 

- 작가님이 왜 이 시간에..

- 아 그게. 언니 오해 마요. 주차장에서 다른 동료 카풀하다 책 가지고 낑낑대는 사람 구제해 준 구원자! 

- 너한텐 구원자가 여러 명이네. 언젠 나라면서. 

- 에이~ 언니는 나의 포에버 구원자고. 그나저나 언니. 그것보다 대박이야. 저 작가님. 

- 생긴 건 대박이네. 

- 헐. 남자한테 관심 1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반응! 혜연 언니 저런 스타일 좋아해요? 

- 스타일 같은 거 없어진 지 오래다. 애 보고 일 하고 남들 쳐다볼 겨를도 없는데 뭐



정말 여유라는 걸 찾아볼 수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었으니까. 

가족이나 일로 만나는 사람들 이외에는 함부로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부터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게 되는 어떤 것들이 시간이 비례하며, 흰머리와 주름과 늘어나는 뱃살의 튼살과 함께 비례하듯 생긴다. 사람의 스타일을 따지는 것은 내 관할이 아니며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럴 만한 심신의 여유는 동이 나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현실을 버티며 그냥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전부인 삶이었다. 단지 꿈에서만 상상의 나래는 날개를 펼치고 있었을 뿐. 어떤 사건들이 무료하고 지칠 법한 일상에서 부디 다가와 주기를 바라면서. 



- 저기 지현아 저분 기다리신다. 어서 가봐 

- 아무튼 이 건물 7층에서 일한다니까요! 대박이죠?

- 7층이라면....

- 그니까요! 최근에 신문에도 났잖아. 투자 유치했다고. 유니콘 뭐라고 하던데 말이죠. 

- 유니콘 스타트업.... 아... 그 기업가치 1조 뛰었다던 그 신문기사.. 거기 분이셨구나

- 역시 우리 출판사 정대표 님, 작가 섭외 하나는 끝내준다니까요. 얼굴에 성격에 더군다나 CEO 애잖아. 능력까지 넘사벽. SNS에서 그런 글까지 쓰는 사람일 줄이야. 진짜 다 가졌죠? 

- 그러게. 다 가졌네. 재수 없다. 

- 하여튼 우리 시크 도도 혜연 언니. 인사할래요 언니? 

- 아니 지금은 됐어.. 

뭐가 됐어요? 

- 대표님! 



전혀 뜻밖의 순간에 애드리브처럼 받아 쳐내야 하는 대사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입술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어떤 일이 드디어 찾아온 것을 반기는 것 마냥. 



- 읽다만 책. 

- 네?

- 그만 읽을 때가 다 됐어서. 

- 하하. 재밌는 분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정태민입니다. 지현 씨께 편집주간님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론 처음 뵙네요. 

- 아... 네. 안녕하세요. 정혜연입니다. 

- 성이 같네요.

- 네. 성만 같네요. 

- 하하. 재밌는 분이시네요. 약간 이미지가 차가우신 것과 달리 

- 저희 편집주간님이 워낙 길쭉길쭉한대다가 살도 없으셔서 앙상한 이미지라 그래요. 얼마나 퍼펙트 우먼이신데요. 일. 가사. 사람 챙기기. 척척.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츤데레 신여성상! 

- 지현 씨.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 대표님, 아니 작가님 기다리시는데 

- 아 네. 가실까요 대표님. 아니 작가님. 이거 참 저희끼리 호칭은 작가라고 통일하는 거 어떠세요?  

- 그러시죠. 편하실 대로. 

- 그럼 안녕히. 

-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 네...? 

- 하하. 아니 그냥요. 주간님 재밌는 분 같아서. 

- 재미.... 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해당 책 편집주간이 제가 아니라서 장담 못 드리겠어요.   

- 아쉽군요.

- 네.. 책.. 기대하겠습니다. 




(# 엘리베이터 안) 


점심시간에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사람 냄새가 붐비는 것은 여느 때와 같았다. 한 층 한 층 각 층에서 멈추던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사람이 꽉 차서라기 보단 이상하게 그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될 듯해서 머뭇거리며 다음에 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려고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비트는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서 타세요. 안 그러면 지각입니다. 오늘 구내식당 특식이에요. 



여유 있는 표정과 부드러운 제스처. 그는 어른이었다. 

선뜻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하며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뭔가 특별한 아우라가 풍기는 재수 없는 사람. 자신을 쳐다보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네는 그 대표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또한 충분한 어른이었다. 그리고 이미 마음 한 편에서는 그 인사 이후에 앞으로 우리가 나누게 될 대화가 얼마나 진하고 엄청날지 깨닫기에 충분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마주하게 엄청난 시간들이 너무 명백하게 그려져서 굳이 상상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는 그를 향해 잠깐의 주저함과 동시에 이후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 지하 1층 식당 앞)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말을 거는 그에게 한껏 신경을 한껏 쓰고 있는 게 정말 나인지 아니면 그저 지저분하고 진부한 상상 속의 나인지, 누가 누구이며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길은 없었다. 그 와중에 그가 건네는 말의 시작은 나로서는 뻔한 전개라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밝으면서도 무심한 듯한 특유의 목소리로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 혼자 드세요?

- 네. 보통 도시락을 먹어요 

- 아.. 이 건물에 도시락 집도 있어요?

- 네. 지하식당 한편에 

- 몰랐네요. 늘 바깥에서 먹다가 오늘 오랜만에 왔거든요 

- 네.. 그럼 식사 잘..

- 주간님

- 네?

- 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 아뇨.

- 아....?

- 전 지금 바로 먹진 않을 거라. 점심시간에 할 일이 있어요 

- 아... 하하. 네. 바쁘시군요.

- 네. 대표님 만큼은 아니겠지만

- 주간님. 참 재밌는 분이십니다. 어쨌든. 그러죠. 근데 저희. 

- 네?

- 또 만날 것 같네요. 

-? 

- 글 잘 쓰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주간님 덕분에 오늘 원고는 뭔가 더 잘 써질 것도 같네요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어느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고 더 이상 대화를 섞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튼튼한 의식이 나를 막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 이외의 어떤 것도 먼저 묻지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실제로 작가의 신상을 미리 알고 콘텐츠 기획을 하다 보면 원고에 편견이 붙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건 내가 스스로 정한 업을 대하는 소신이기도 했다. 


다만 그가 나에게 뭘 원해서 그때 한번 본 게 다 이면서도 말을 곧잘 거는 건지, 원래 성격이 그렇게 뻔뻔한 건지 긴가 민가 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었기에 그의 의중(?)을 떠 보고자 선수치고 싶은 마음도 도사렸다. 그래서였을까. 나 답지 않은 말은 어느새 입 밖으로 꺼내 버리고 말았다. 실수는 뒤늦게 알아버린 후회에 지나지 않았다. 



- 원고 쓰는 데 제가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만 대표님

- 네?

- 결혼은 하셨어요?

- 예? 



그가 더 대답하기 전에 나는 얼른 말을 이어 갔다. 



- 저는 했습니다. 결혼. 





생각해도 참 뻔뻔하고 우스운 말이었다. 

이미 말은 엎질러졌고 돌이킬 방도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미소를 띠면서도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을 연출하려 애쓰다가 찌그러지는 미간의 주름만이 그에게 비칠 뿐이었다. 갑툭튀처럼 난대 없이 생경스러운 한마디에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빗장은 열리고 내 삶에 커다란 흔적을 남길 사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직 가보지 못한 삶의 어느 지점으로 이미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일상의 위로와 용기와 상처와 슬픔을 동시에 짊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을. 



- 가보지 않은 숲에 먼저 가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다시 인사하죠. 정태민입니다. 



읽다 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 구절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목소리의 시작이었다. 



가보지 않은 자는 알 수가 없다. 그 숲이 얼마나 깊고도 아득하면서도 길을 잃기 쉬운지도.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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