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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05. 2018

엄마의 글쓰기

훗날의 너희 둘이 읽어봐주기를 바라며 

아이 둘의 존재가, 새삼 고마워졌던 아침이었다. 

어느새 5~6세 - 4세도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 유아복을 입고, 신발 사이즈는 170이 되어 버린 너희 둘의 등원을 시키며 오늘. '잘 다녀와'라고 말해 주었을 때. 나는 오늘도 좌절과 동시에 기쁨을 맛보았다. 이런 묘한 감정, 알 수 없겠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선일 테니까.

너희들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 여전히 일상에 도사린다는 것. 
말로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너희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내 모습을 끝끝내 발견하게 되는 순간엔. 그렇지만 말과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마음에서, 몸에서 의식이 담겨있지 않은 사람은 말로도 내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일까 싶다. 그럼에도 '고맙다'라고 말하고 있는 지금의 나라서. 

일을 하다 사랑이 찾아왔고 동시에 맞벌이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아이를 잃고 다시 아이를 가졌다. 쌍둥이를 기르는 일은 늘 고됬고 그로 인해 비뚤어진 마음으로 못난 지난날을 살았었다. 족쇄가 채워진 기분으로 한가득이었던 한때를. 여전히 찾아오는 따가운 마음은 나를 무겁게 만들었다. '나 자신'의 기쁨과 '가족'의 기쁨이 충돌하고 말 때면. 

예컨대 아이 둘을 쳐다보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할 때. 가고 싶은 강의를 발견했을 때. 전기밥솥 옆에 나란히 자리한 달력에 어느새 공모전 마감 날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나를 볼 때. 글쓰기 모임에 참석한다거나 목욕을 다 씻겨 두고 TV 삼매경에 빠져 있는 너희 둘에게 말 한마디 더 건네주고 싶은데 어느새 손에 읽다 만 책을 집어 들면서도 말을 건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 맙소사. 언제나 멀티플레이구나. 집중은커녕 -.


여전히 혼자서 공모전 준비한답시고 - 여태껏 되지도 않을 줄곧 떨어지기만 함에도 불구하고 - 백지 한가득 새벽까지 써 내려가다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코코볼 따위를 먹이질 않나.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 에서 때론 묘한 죄의식이 늘 나를 붙들어 맨다. 맞다. 죄의식이다. 죄스러운 감정이다 이것은 분명.

복받치는 마음에, 삶이 엉키고 설킬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다만 이렇게 글을 쓴다.
그게 바로 어쩌면 이제 엄마가 된 나의, 엄마의 글쓰기 일지 모르겠다. 두서없이 제멋대로 누가 보든 말든 이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즉 다른 말로는 잘 쓰든 못쓰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써 내려간다는 말이다. 욕을 먹든 말든.. - 갈데 까지 가보자 라는 심보일까, 사실 잘 쓰고 싶긴 하고 여전히. 욕심 쟁이니까 -  


뚫을 수 없는 어떤 꽉 막힌 삶을 애쓰듯 통과해 보려는 어떤 안간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어. 엄마의 글쓰기란, 지금 내겐 그런 시간이라는 걸, 너희 둘은 언젠가 이해해줄까.

이해를 바라지만, 사실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알 속에 갇힌 나를 바깥 세계로 애써 뚫고 나오는 그런 시간인 것도 같다. 엄마가 되어서야 그제야 보이는 '새로운 세계', 한데 그것에만 갇혀 있기엔 너무나도 무거운 것들을 다 벗어내버리고 싶은 무언의 욕망까지도.  물론 그럴 땐 허구를 써 내려간다. 쓴다기보다 거의 상상의 장면을 캡처해서 찍어 내리는 듯한 느낌이지만. 

왜 기쁘고 왜 행복한지, 왜 불행하고 왜 울고 있는지. 
내 생각이 꼬인 부분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인지 쓰다 보니 알게 되는 날도 오더라. 그건 편집된 팩트로 적어내려 져서 결국 나만의 에세이로 재탄생되기도 했었다. 신기했다. 첫 번째 에세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래서 끊어내지 못하는 글쓰기 작업이다. 에세이는. 사실 모든 책은 저자의 삶이 묻어난 에세이겠지만. 

또한 때론 상상이 날개를 달고 장면으로 그려질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 가는 대로 적어 보고 그걸 사람들에게 알려보고도 싶어 진다. 지겹게도 못 끊어내겠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지 싶은데 말이다. 얼마나 이 상상이 '먹히나' 싶어서. 그래서 저지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그 시간은 문학을 향한 뜨거움이었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아니 사실 너희 둘에게는 은밀히 왜 그랬었는지 알려주고 싶을 만큼.  물론 아직까지는 안 먹히는 글쓰기지만, 그럼 어때. 쓰는 시간이 행복했는걸..

나라는 사람을 어떤 역할극 안에서 세속화시키고 정제시키고 싶지 않아서. 
지금의 글쓰기는 그렇다. 그러다 보니 되려 아이들에게 '미안함' 이 도사려서 그건 죄의식으로 변하고 만다. 고마운 감정만 표현하고 그대로 시간을 지내면 될 텐데, 그게 잘 안돼서 늘 이렇게 미안한 마음을 '고맙다'라는 말 대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툰 나임을. 쓰면서도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얼마나 엉뚱하고도 이기적인지. 마음 끌리는 대로 이렇게 또 자기 멋대로 고맙다고 말해버리는 참 무심한, 나는 '엄마' 다.. 

대신 오늘도 있는 힘껏 꽉 안아 줬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스스로 되묻고 다이어리에 한 문장 적어 본다. 


'고마워' 라고 


더불어, 있는 힘껏 지금 써 내려가는 문장들도, 글 쓰는 이 짧고도 소중한 시간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물러설 수 없는 어떤 의지와 용기를 갖고, 여전히 써 보려 한다. 관성에 젖은 너무나도 일반적인 생활 패턴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내게 지금의 글쓰기는 바로 '이 시간'이다. 나로 살려 애쓰는 시간. 갇혀있지 않고 싶은 시간. 발견해 나가는 시간. '나 자신'을 지켜내는 시간.. 

언젠가 아이들과 같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고 있다. 
오늘 아침에 서로 꽉 안아준 우리들의 온기를 기억한다. 고맙다. 그 모든 것들이 그냥 다... 그리고 쓸 수 있는 시간이, 쓰고 싶다는 마음이,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 나에게도. 그런 나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라봐 주고 있는 나보다 더 대단한 너희 둘에게도. 

고마워. 그냥 다. 


엄마는 주로 점심시간, 그리고 너희들을 재우고 쓰곤 해..그 시간에도 감사해.



#점심시간_삼십분_단상_요즘은_날치기다_땡기면_쓴다 

#소설을_곧_여기에_오픈할_예정이다_미쳤다

#그래서_죄책감에_남겨보는_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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