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의 대화
한 해가 벌써 지나가고 있다.
숫자나 시간의 개념이 인간사에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저 한 해가 지나갔다거나 새해가 다가온다 하는 것들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언젠가부터 숫자로 카운팅 되는 나이라든지 새해라든지 그런 것들을 대함에 약간의 심드렁함과 시크함이 붙어 버렸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더욱.. 지나가는 계절을 모르고 살았으며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여전히' 잘 모르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런 걸까 싶다.
올해의 마지막 날, 그이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속으로 물어봐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게 몇 주였던가. 이제야 둘이 눈 마주하고서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이야. 그간 사용하지 못했던 회사의 연차를 12월 연말에 몰아서 장장 2주간을 쉬기로 했으나 사실은 그이로서는 가당찮은 일이란 걸 그도 나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올해부터는 사용하지 않은 휴가에 대한 회사 기준의 그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으니 - 즉 수당으로 지급되지 않으니 - 일이 있으면 연차가 남았어도 쓰고 알아서 나오라는 식(?)의 얄궂고 지독한 일터의 현실에 놓여 있는 우리였었다.
- 자기, 올해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네
- ..... 좋아. 그럼 새해에 가장 이루고 싶은 건 있어?
- 시간이 좀 있으면 좋겠어.
아차 싶었다.
연차를 내고서도 크리스마스 다음날 해외 출장을 떠나는 사람에게 괜한 걸 바랐다(?)는 걸 이렇게 뒤늦게야 깨닫고 후회한다. 요 근래 일로 지치고 건강도 좋지 않아 져서 여러모로 한껏 티 나지 않는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무리함이 쌓여가는 그에게 나의 새해 소망이나 당차고 야무진 꿈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 일거라는 것도 눈치껏 알아채고 아무 말하지 않고 다만 마시던 얼그레이 차를 마시며 딱 한마디 했다.
- 안녕하자. 당신이 그랬으면 좋겠어..
이미 변했나 보다. 내가.
예전 같았으면 '뭐 그렇게 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러느냐'며 약간의 화풀이로 따지고 들었을 나였겠지만, 요즘 들어 나 또한 급 하락하는 체력과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묘한 해탈감마저 느껴던 탓인지. 아니면 하루를 그저 무탈하게 흘러감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그 이상 그이에게 바라는 건 크게 없어진 탓인지. 아니면 그이의 목소리가 애달프게 느껴졌던 건지. 우리는 서로에게 잔소리도 간섭도, 또한 불필요한 질문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올해 마지막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2019년 다이어리에 한 문장을 더해 보았다.
그리고 이 말을 쌍둥이들의 하원 길에 무심한 듯 툭 던져 보았을 때. 그가 웃으며 다시 목소리를 건넨다.
- 당신이 안녕하면 좋겠어. 정말..
- 하여튼 엉뚱하기는. 덕분에 안녕하심 ㅋㅋ 왜 이래 또
- 고마워...
- 뭐가.
- 그냥.. 올해 고마웠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
- 나도.
우리들의 한 해는 이렇게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하려 했다.
언제나 비슷한 일상을 반복할지도 모를 새해 일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갓길에 간절하게 바랐다.
여전히 생기 어린 엉뚱함이, 조금 더 오래 버텨 주기를...
아직 건조해지고 싶지 않은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욕망하기를 꿈꾸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조금 더 살아 보고 싶으니. 꿈을 여전히도 간직하며 그걸 바랄 수 있는 용기가... 아직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누군가의 안녕을 바랄 수 있는 마음으로 좀 더 사랑해볼 수 있는, 그런 새해이기를도.
당신과 내가 여전히 안녕하기를 바라. 새롭게 시작되려는 시간들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