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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01. 2019

#3. 스캔들

야간 비행 


밤에 떠나는 건 멋진 일이지

- 야간 비행, 생텍쥐페리 - 





(출판사 회의실) 


떠들썩하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게 지현이 쪽인지 아니면 유진 선배 쪽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두 여자의 음성이 겹쳐져서 데시벨을 높이려 하고 있었을 뿐. 귀는 시끄러웠어도 눈은 뚫어져라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 선배! 지금 편집할 때가 아니라니까요 

- 지금 교정해야 할 때 맞거든

- 아니 이 기사 봤어요? 

- 기사 보지 않고 원고 보고 있는 거 안 보여

- 보면 놀라자 빠질 걸.

- 안 놀라면 만원 빵. 

- 농담할 때 아니라니까 정말!

-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아... 

- 거봐 놀랐으면서. 

-..... 

- 너도 놀랄 때 있냐? 하긴 네 담당 작가 신상에 그 정도 스캔들이면. 만원 내야겠네 정혜연 



그에게 약혼녀가 있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라며 보던 원고를 마저 보려 했으나 이미 몸이 먼저 무의식을 알아챘던 건지 도무지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게 시작했다. 그때였다. 전화기가 울렸고 그의 이름이 떴다. 



- 뭐해 안 받고. 기사 떠서 전화한 것 같은데. 

- 무슨 출판사한테까지 보고할 일이라고... 참 한가하신가 보네 

- 뭐야 정혜연 그 비꼬는 말투는 

- 아뇨 저는 그냥. 

- 여보세요 

- 지현 씨! 

- 아 네. 네. 알겠습니다. 편집주간님 안 그래도 찾아가 뵌다고 했어요. 워낙 프로페셔널하셔서. 네. 알겠습니다. 




제멋대로 미팅을 잡은 건 지현이와 유진 선배 쪽이었지만, 사실은 알고 싶었다. 

마음에도 없는 선수 같은 말들을 하필 왜 나에게 했었는지. 그러므로 인해 잠시였지만 사람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는 악취미가 다분한 바람기를 그럴싸하게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한남에 당신도 속하는지. 몇 번의 섞지 않은 대화 덕분에 누군가의 일상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미련스럽게 들켜 버리면 안 된다는 다짐과 함께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하며 비상구로 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7층 드림타워 한쪽 구석 카페테리아) 



- 잠깐 차 한잔 하시죠. 밖에서. 

- 아뇨 여기서도 괜찮습니다. 일정 체크하려 왔어요. 

- 그거뿐인가요? 

- 그것 외에 더 할 말이 있어야 하나요? 

-.... 화나신 거 같습니다. 

- 아뇨. 제가 화 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 기사 보지 않으셨나 보군요. 

-.... 보지 않고, 들었습니다. 

-... 제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 드라마 그만 찍으시죠. 정태민 대표님. 사는 게 그쪽은 우스운가 본데.

-....

- 더럽게 잔인하고 치사한 게 사람이 벌어먹고사는 거예요. 알아요? 밑에서 돈 안 벌어봤잖아 당신. 

-..... 정혜연 씨. 

-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정태민 대표님. 

-... 장난친 거 아닙니다. 그리고 난 그 날 

- 그만 하시죠. 원고 일주일 딜레이 됐다고 저희 대표님이 좀 걱정하십니다. 저희로선 기대작이에요 이번 작품 

-..... 혜연 씨 

- 목차 주신대로 순서대로 세 꼭지 분량이라도 먼저 주세요. 그래야 저희도 감 잡고 다시 아이디어 드릴 수 있어요. 제 메일 주소 아시죠. 그리로 메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 말씀하세요. 

- 더 이상 제게 사적인 대화 엮지 말아 주세요. 

-.. 왜 그래야 되죠. 

- 그래야 되니까요. 

- 그니까 왜 그래야 되는지 물었습니다. 

-.... 신경 쓰이니까.





(혜연의 집, 노트북 앞) 


그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한동안 열어보지 않고 제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든 지우의 이불을 덮어 주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서 클릭을 해보려 할 때였다. 그이가 들어왔다. 



- 아직 안 자고 있었네.

- 왔어. 오늘은 늦었네. 저녁은. 먹었어?

- 대충. 아참 혜연아 나 한 건 했다. 

- 응? 

- 아참 너도 알 거 같은데. 같은 층에 있는 사무실 쓴다 했던 거 같다만 

- 뭐가? 

- 신규 사무실 설계 하나 따냈거든. 근데 정태민 대표라고. 혹시 알아? 그 오늘 약혼녀 스캔들 기사 뜬 

- 아...

- 하여튼 잘생기고 돈 좀 있고 방송 좀 타면 개나 소나 연예인 대접이라니까. 아무튼 이번 딜, 거기 따냈어

-... 그거 해야 돼?

- 무슨 말이야? 신축 사무실 스케일 장난 아닌데. 무조건 해야지. 

- 아니. 아냐... 축하... 해. 바빠지겠네..

- 어. 미리 예고편 때리는 거야. 이제 바빠질 거라고.

-.... 그래요. 씻고 쉬어. 나 이거 메일.... 좀 읽어봐야 해. 

- 뭔데. 

-... 그냥 이번 내 작가 원고. 

- 누군데

-... 당신이 땄다는 그 신축 사무실 대표

- 대박. 뭐냐 이거. 소름인데. 

-... 내가 할 소리야. 



적잖은 당혹스러움이 찾아오려 할 무렵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에 들어가 씻고 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메일을 확인하려 클릭을 하려던 손가락은 또 한 번 그 자세로 일시 멈춤이 된 채 애꿎은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즘이었다. 두 번째 메일이 들어왔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정태민입니다. 핸드폰 문자를 확인 못하셨나 봅니다. (내용 없음)]


눈을 의심하자마자 핸드폰을 열어보니 정말 문자 두 통이 와 있었다. 


- 정태민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지금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은 해외 출장이라..

- 지금 집 앞 카페에 잠깐 와 있습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말씀드리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외투를 걸쳐 입고 현관문으로 가려하고 있었다. 

어젯밤 읽은, 밤에 떠나는 건 멋진 일이라는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의 문장이 우습게도 생각났다는 온갖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 가며 주저하는 건 3초면 충분했다. 낯선 자신이 어디선가 훅 하고 현실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근거리의 야간비행은 없을 것이라며. 한때의 남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스치면서 어느새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있었다. 



떠나는 게 멋진 일이라는 걸 모르고 산 사람에게는 그저 무서울 뿐이다. 그 무서움도 한순간이라는 걸 알지 못해서.






그는 약혼을 부인하지 않았다. 

또한 약혼녀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가의 막내딸이라는 사실과 다만 그가 원하지 않은 약혼을 상대방 쪽에서 먼저 프레스 릴리즈 했던 탓에 스캔들이 터졌다는 걸 연신 강조하며 본인과 약혼녀와의 관계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걸 되풀이하듯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뭇 다른 사람 같이 느껴졌다. 이어서 남 밑에서 일해 본 적이 자신도 있다는 말과 함께 직장, 출신 학교, 옛 거주지와 부모님의 거주지까지 모조리 공개하는 순진한 모습까지도 보여 주었다. 


기혼인 나로서는 결혼한 햇수와 지우의 개월 수 같은 당혹스러울 만큼 사적인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가 며칠에 걸쳐해야 할 꽤 많은 개인 정보와 심지어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한 별 거 아닌 소소한 하루들을 연신 쏟아 놓는 동안, 나는 우리가 공교롭게도 한 동네에 살았었던 이웃이라는 옛 사실 외에는 어떤 신상정보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 아이의 이름도 그의 신축 사무실 설계를 맞아서 할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라는 사실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다만 우리들의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듯한 그의 천진난만하게 상기되어 있는 표정을 보며 시큰둥하게 말을 걸었다. 



- 연예인 급 일반인이시잖아요. 신상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거예요?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 괜찮습니다. 혜연 씨에겐.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고 제가 그러고 싶었어요. 

- 어지간히 순수하시네요. 

- 제가요?

- 저보다 나이 든 사람 치고는 너무 동안이라.. 비슷한 또래겠거니 했는데 말투 보니 영락없이 거짓말해도 손색없으세요. 정태민 대표님. 마흔 넘어서 그렇게 사기캐여도 되는 건가요.  

- 마흔이 뭐 어때서요. 

-... 하긴 다 가지셨으니 그런 사람들한테 나이도 스펙이겠죠? 

- 하하.. 하여튼 재밌는 분이십니다. 

-... 재밌어서 그렇게 놀랄 정도로 가공되지 않은 표현을 쓰시나요?

-?

- 또 보게 될 거라는 둥, 가보지 않은 세계에 먼저 가 있다는 둥. 뭡니까. 뭐였습니까. 그런 대사들.. 불쾌했어요. 

-.... 아. 그건 

- 됐고요. 이제 기사 따위 중요하지 않고, 정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도 대충 알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실까요 

-.... 전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 네?

- 그러는 혜연 씨는 이 시간에 안 보면 그만일 사람, 왜 굳이 나오셨습니까. 

-.... 일 이니까요. 제 작가님이시니까요. 

- 그게 답니까. 

- 네. 그게 답니다. 그게 다예요. 더 이상 뭘 바라십니까. 

- 그 다나까체는 원래 그런 말투... 쓰셨습니까. 

-.... 사회부 기자였어요. 그 바닥, 세상살이. 신물 나고 역겨워서.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퇴사했어요. 결혼하고 애 낳고 애 보는 게 더 힘들어서 일 찾다가 선배가 출판사 차려서 러브콜이 왔어요. 그리고 삼 년. 미친 듯이 아이 키우면서 일만 했어요. 됐어요? 이제 지금의 저예요. 

- 아.... 

- 모르실 겁니다. 알 리가 있겠어요 

- 모릅니다. 그래서 알아보고 싶어요. 

- 뭐라고요?

- 정혜연 씨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당신 그 말투, 그 눈매, 첫인사... 모르겠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게 무슨 감정인지. 그렇지만 내일 출장 가기 전에,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스캔들 기사는... 

-.... 그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뻔했습니다. 저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 혜연 씨. 

-.... 저 기자였습니다. 눈치 빤해요. 아시겠어요? 다가오지 마시라는 경고예요...

-.... 

-... 신경 쓰이니까 거기서 선 넘어오지 마시죠.

-.... 신경은 쓰이십니까. 제가. 

- 안 쓰이는 여자 없을 겁니다. 순진한 대표님. 당신 매력 있어요. 

-.... 순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혜연 씨도 충분히 매력 있어요. 

-.... 제가 못돼 처먹어서 이런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요.

-.... 정혜연 씨.

-... 네?

- 초고는 일주일 후에 드리겠습니다. 메일 보내드리죠. 저는 이 주 후에 한국에 다시 들어옵니다. 

-....

- 돌아오면 제 제안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마음을 얼마나 빼앗겨야, 생활이 얼마나 흐트러져야 이 망상 어린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은 그래도 제어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믿고 있었다. 기혼인 내게 누군가의 호감이나 다가옴이 비현실적이라고 믿고 살고 있었는데. 균열이 일어나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며 급기야 스스로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애써 감정의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이 다가올수록 단호하게 이런 연결과 공적으로 편치 않은 사적인 만남을 그만 둘 생각이었음에도. 도무지 정말로 순식간에 휘몰아친 감정의 한계를 벗어난다면 정말 편할까 싶은 마음에 스스로 자제력이 강한 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자부했던 소신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살면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결국 그 몹쓸 그의 제안에 답하는 것을 유예한 채. 그렇게 이 주가 흐르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지우와 남편에게 더 집중하며 상냥하게 대하면서 나 자신을 다잡아 가는 시간을 알아차리게 된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마음은 이미 한계를 벗어난 건지도 모를 거라며, 다시 그를 떠올리는 시간과 기울어져 가는 마음을 다잡아 갔지만 그의 존재가 일상에 불안정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건 부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주일이 흘렀고 올 것이 왔다. 

완벽해서 넋이 나갈 정도의 초고와, 더 넋을 빼놓을 수밖에 없는 그의 제안이.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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