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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10. 2019

#8. 완벽하고 예의 바른

세계의 끝 여자 친구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세계의 끝 여자 친구 






(#드림타워, 지하 4층 주차장)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침묵과 함께 지하 4층 주차장에서 멈췄다. 


- 안 내려요?

-....


어서 지우에게 달려가도 시원찮을 판에 이 상황에서 나를 따라온 정태민에게 따지고 들듯 왜 자꾸 신경 쓰이게 따라오기까지 하냐며 볼멘소리를 하진 못할 망정 결국에 참지 못한 눈물이라니.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 버린 자신을 책망하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 상태에서 운전하면 위험합니다. 차 키 주세요. 

- 네?

-  데려다 줄게요. 시간 없을 것 같은데. 

-... 어디 가는 줄 알고 그런 말 함부로 해요? 됐습니다 작가님. 왜 그러세요 정말. 사람 신경 쓰이게...

- 이제 좀 제자리로 돌아온 거 같네요. 그렇게 따박따박 다시 말하는 것 보니.  

-... 아니.... 아무튼 

- 그리고. 신경 쓰이게 한 건 우는 혜연 씨지, 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 그건..

- 자. 어서요. 급한 일 아니었어요?

-.... 아이 어린이집에 가야 해요. 선생님들도 다 여자고 곧 하원 시킬 이웃집 엄마들도 많아요.... 

- 아.. 

- 혼자 갈게요. 그게 편할 것 같아요. 여러모로 

- 왜요. 부담돼요? 이상한 소문날까 봐?

- 부담... 안 될 리 없잖아요. 더군다나 신문 기사에 나고 싶지 않은 지극한 일반인이 나예요. 아시겠어요?

-..... 나도 지극한 일반인인데. 우리가 뭐가 다르죠?

- 다르죠. 아주 많이. 그걸 아는 한 사람과 모르고 들이대는 다른 한 사람이 있을 뿐이죠. 

-... 원래대로 돌아온 거 같아서 좀 다행이네요. 아무튼 차 키 줘요. 그럼 근처까지라도 태워다 주게. 그 상태로 운전은 정말 위험해 보여서 그래요. 

-....

-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얕은 미소를 표정에 머금고 있었으나 평소와는 조금 다른 단호한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는 정태민에게 

어떤 말을 꺼낸다면 그 이후엔 아마 누구도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은 포스를 자극시켰기에 결국 차 키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근처 맨 왼쪽에 세워둔 하얀색 맥스크루즈 한 대가 '삐' 하는 소리와 동시에 헤드라이트가 깜빡였다. 



- 차량 번호가 예술이네요 

-....

- 1004 라니. 어울리네요. 누구와. 

-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 농담이 안 나올 이유도 없죠. 아. 문장은 정확히 합시다. 차량 번호는 차주 얼굴과만 어울리는 걸로. 말은 쌀쌀맞으니. 편집주간님 앞에서 문장 교정해서 죄송하군요. 

- 하여튼... 풉.. 

-... 울다 웃으면 큰일 납니다. 

-.... 재미없어요. 

- 알아요.. 나 원래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재밌는 건 혜연 씨지. 어서 갑시다. 네비 켜요. 

- 네..




(# 혜연의 차 안) 


차에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그는 말없이 운전을 했다. 

어린이집까지 출판사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차 안에서의 숨죽이고 달려온 10분이 마치 1시간 같았다가 1분 같았다가 시간의 개념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지우를 떠올리면 너무나도 길어서 애가 타면서도, 그 짧은 10분이 너무 편안해서 그대로 멈추지 않아도 좋을 만큼 짧게 느껴졌다. 



그와 단 둘이서 밀폐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편해서, 그대로 해 지는 석양이 보이는 바다로 달려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편하고 좋았던 게 탈이었다. 정태민은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스킬을 가진 어른이었다. 그의 예의 바른 배려가 베이스가 되면서도 어떻게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곧잘 이뤄내는지 등은 여러모로 다른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뒤늦게 알아갈 수 있었다. 






- 더 가지 마시고 여기서 세워 주세요. 이젠 제가 운전해서 갈게요 

- 아.. 햇살 어린이집.. 저기군요. 

- 네... 

- 그냥 가죠. 저기까지. 

- 네?

- 뭐 떳떳하지 못한 거 있어요?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나 지금 혜연 씨 운전기사예요. 

-... 또 농담이 나와요?

- 아니 농담이 아니라 이건 진담입니다. 차 안에 있을 테니까 아이 데리고 나와요. 아이 아픈 거 아니었어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 아니 그래도...

- 걱정 마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운전하기 힘든 동료를 도와준 친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면 그만이에요

-... 가볍지 않아서 그래요. 내가....

-...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운전해 준 거 아니에요. 

-... 기사 터지면 책임지십시오. 정태민 대표님. 

- 사람 참 못 믿는 성격이네요 혜연 씨. 

-.... 믿는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니까... 아이 데리고 올게요. 휴...

-  기다릴게요. 




기다린다는 말이 그토록 설레는 말이었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알게 되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 햇살 어린이집 앞) 


- 어머니 오셨어요 

- 지우 어딨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늦었죠 

- 아녜요. 생각보다 빨리 와 주셔서... 걱정하셨죠 어머니. 전화 끊고 다시 해열제 먹이니까 그대로 잠들어서 지금은 자고 있어요. 열 체크했더니 다행히 37도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고요

- 아.. 네 다행이네요. 바로 하원 하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 네 어머니. 잠시만요 지우 안고 올게요. 

- 네..




어깨에 가방을 짊어지고 지우를 앉아 그대로 차 뒤편에 겨우 앉았을 때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는 정 반대의 따뜻한 공기가 차량 내부에 퍼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느새 비교라는 걸 하게 된 이기적인 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민성 씨였다면 어땠을까를. 아마 먼저 말하기 이전에 열이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같이 가 준다든가, 이렇게 차 안에 곧 들어올 모녀를 위해 히터를 틀어 두며 앉을 좌석의 시트를 데워 두는 등의 행위를 하는 남 자였던가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세심한 배려는 끊이지 않았다. 




- 춥지 않죠? 저번에 기억으론 우리 동네였던 것 같은데. 멋대로 미안해요 네비에 최근 주소지 검색하니 집이 나와서 거기로 방향 이미 맞춰놨어요. 아이는 괜찮은가요?

- 네... 현대아파트...

- 자 출발하죠. 아이가 잠든 거 같으니 조금 천천히 갈게요. 이젠 엄마 만났으니 급할 것도 없겠네요. 

-..... 고마워요 

- 갑니다. 



(# 혜연의 집 앞) 


주차를 마치고 그가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쳐다보는 그의 선한 눈매를 바라보자 갑자기 멈춰 있던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미 심장은 내 것이 아니었다. 곤히 잠든 지우에게 눈을 떼지 못하다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을 때. 순간 어떤 쓸데없는 생각을 일삼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이에게 열이 그대로 있었다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텐데. 열이 내린 지우와 차 안의 따뜻한 공기. 그리고 우리 두 여자를 바라보는 선하고도 또렷한 눈을 가진 잘생기고 예의 바른 남자. 이 세 가지 포인트는 충분히 안도감과 동시에 어떤 알 수 없는 설렘을 주기에 적절한 요소들이었다. 




- 이제 난 가볼게요. 

-.. 고마워요. 신세 졌네요.. 나중에 보답... 하겠습니다. 

- 그 말 꼭 지키시는 겁니다. 어서 들어가요. 







잠든 지우를 침대에 눕히고 곁에서 잠깐 잔다는 것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밤 9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부랴부랴 정신을 차려 거실에 나가보니 TV를 보고 있는 남편이 눈에 띄었다. 



- 일어났어?

- 응... 언제 왔어요? 나 깨우지... 할 일 많은데. 

- 옷 입은 채로 잠들어 있길래. 요새 무슨 일 있어? 

-... 왜? 




갑자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6시간 이전에 뛰던 심장과는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 아니. 많이 피곤해 보여서. 원고가 많아?

- 워킹맘이 그렇지.. 뭐.. 몇 시에 왔어? 

- 좀 일찍. 자고 있길래. 대충 치우고 저녁은 먹었어. 혜연이 네 밥도 해 놨는데. 먹을래?

- 아니 난 됐어. 생각 없어.. 시간도 너무 늦었고 

- 좀 먹어. 그러다 쓰러져. 장모님도 나 보면 너 점점 말라간다고 따가운 눈초리 보내시잖아

-... 쉬어요. 나 씻고. 메일 확인해야 해. 회사에서 오후에 바로 튀어나왔어. 지우 열 나서. 

- 아...

- 보통은 그럴 때 엄마한테 연락하지 아빠한테 연락하는 어린이집은 없잖아. 대한민국 시스템이 그래. 알겠어? 

-.... 혜연아. 왜 또 그래.. 오늘 많이 힘들었어?

-... 미안해.. 나 왜 이러니 요새 정말. 

- 밥 먹어... 다 체력 딸려서 그런 거라니까. 나 좋자고 하는 말이야. 나한테 화살 돌아오잖아

- 응.. 밥... 차려놔 줘서 고마워....

- 웬일이야. 고맙다는 말을 다 하고 

-... 내가 그랬나. 고맙다는 말에 인색했나

- 나한텐 인색했지. 지우한텐 뻔질나게 해 주면서. 아무튼 어서 가서 씻어. 많이 피곤해 보인다. 

- 응...  




순간 어떤 불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게 바로 외도의 시작인 걸까. 그것도 꽤 완벽에 가까울. 

어떤 완벽한 가까운 일종의 범죄 같지 않은 경미한 범죄를 일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스스로 냉소를 퍼부을 정도로 이상하게 가소로웠다. 세상에 CCTV 가 있어서 이 모든 하루 일과를 지켜보았다면 누군가가 보기엔 완벽한 외도임에 틀림없었다. 외도라고 생각하지 않은 두 사람만 빼놓곤. 



흔히 말하는 불륜의 뻔한 전개와 같은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은 그대로 타인의 믿음이 되고 말 테니까. 생각을 하면 결국 그게 답이었다. 진실도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거짓이 되며, 거짓도 팩트라고 믿는다면 진실이 되는 것처럼. 







완벽한 외도라는 게 세상에 있을까. 

남편이 그녀를 만났을 때도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를 어느새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뻔뻔한 생각이었다. 남편도 처음에는 이렇게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오늘과 같은 상황을 생각하자면 어쩐지 이해가 되려고도 했지만 막상 이해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 둘은 같이 있는 장면이 내게 발각되었으니까. 완벽하진 않았으니까. 



철저한 계획과 실행 그리고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이 외도의 관건인, 그것이 흔히 말하는 바람피우는 사람들의 성공 요소라면, 정태민과 나는 오늘 한 가지만 빼놓고는 완벽했다. 철저한 계획. 예측되지 않은 시간을 대비하려 하는 건 계획이 아니기에. 



남편과 정태민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대로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하는 걸까. 만약 평생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과 전제가 주어진다면 흔히 말하는 짜릿한 외도를 마다할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외도를 일삼은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기 이전에 스스로 솔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사이엔 과정과 사연이 있어도 결국 사람들은 그 생략된 사연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줄까. 남편이 3년이라는 꽤 긴 기간 동안 그녀와 만나다가 결국 나에게 발각되어 볼품없는 최후를 맞게 된 것에 내가 그토록 묻지 않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건 그저 그 생략된 사연이 가벼운 분노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인 걸까. 



그의 잘못일까 아니면 그녀의 잘못일까 아니면 나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우리 부부의 평범하다 못해 서로 너무 익숙해서 시들어가곤 했던 차가운 시간들의 결과물인 걸까. 들키지 않는다면 외도로 인한 피해자는 결국 없지 않을까 라는 뻔뻔한 생각만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나에겐 완벽하고 예의 바른 외도란 먼 훗날 상대방의 부재를 애도할 수 있는가 아닌가 가 확실하면 되는 문제였다. 

이를테면 죽음 혹은 이별과 같은. 정태민으로 인해 언젠가 찾아올 슬픔에 맞닥뜨렸을 때, 내가 스스로 떳떳하게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슬퍼할 수 있다면 그것도 어쩌면 내게 부여되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매일의 삶이 벅차서, 또는 애써 태연해 보이기 위해서, 마음껏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정태민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했던 정태민과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한없이 빠져드는 순간이 찾아오다가 결국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는 순간까지 맞이한다면,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특권을 부여할 수 있을까.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스스로 주며 담담히 생을 흘러갈 수 있는 특권을...



생각이 끊임없이 흘러가도 결국 오늘 나와 정태민의 행위를 정당화할 방법은 결국 찾지 못했다. 

만약 주변에 우리 둘을 목격한 이웃집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폴리아모리라든가 양성애자나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향해 여전히 겉으로는 쿨하고 아닌 척, 속으로는 온갖 음해와 저주와 냉소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까. 



답은 불 보듯 뻔했다. 

팩트만 나열해봐도 그랬다. 나에겐 민성 씨와 지우가 있었고, 정태민에겐 약혼녀 이수연이 있다. 나와 그의 정답은 우리가 속한 사회와 두 사람 이외의 사람들, 즉 타인이라는 철저히 그럴싸한 명분과 기준이 타고 나 주어지는 디폴트세팅이기에 도덕과 양심이라는 잣대 하에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노트북 옆에 어젯밤 읽다 끝에 접힌 모서리를 열자 책장 한편에 문장이 보였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가 말한 대로 정말이지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 맞았다. 

물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수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돌고래 무리들 속 어떤 바보 같은 돌고래 한 마리가 꼭 나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돌고래는 나뿐만은 아닌 같았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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