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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28. 2019

#12. 미워할 필요 없이

자기만의 방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 자기만의 방 - 




(#속초, 동아서점 안) 


책이 있는 공간에선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동네 책방 치고는 대형 서점 못지않은 실내 사이즈와 곳곳에 큐레이션 되어 있는 각 장르 별 책 소개 문구를 보고 있자니 다소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아동 경제 경영 자기 계발 철학 미술 과학 여행 그리고 소설과 에세이까지. 갖출 건 다 갖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서점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도 서점 주인의 세심한 배려는 곳곳에 부착되어 있는 책의 문구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이 곳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신기하게도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한 두 명을 빼고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너무 고요한 나머지 심장에서 여전히 나지막이 들리는 쿵쿵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까 잠깐 걱정했던 것처럼. 



먼저 말을 뗀 건 정태민 쪽이었다. 



- 어이쿠. 정대표 님 오셨어요 

- 오랜만이에요 사장님. 잘 지내셨죠 

- 아... 이미 알고..

- 미안해요 혜연 씨. 사실은 저. 이미 이 곳 사장님과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인사드려요. 

- 안녕하세요. 주간님. 전화로 출판사 이지현 대리님과는 이미 말씀 들었습니다. 

- 정혜연입니다. 감사해요. 공간 허락해 주셔서.. 



그 이후론 일사천리, 내가 출판사 사람인지 그가 그러한지 착각할 정도로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처리해 주고 있었다. 도중에 끼어들 틈 없이 그저 대화를 듣고 있어야 했지만 그 모든 게 불편함보다는 편안함과 더불어 약간은 늘어지는 듯한 지루 함마 저도 선사해 주었다. 



- 사장님. 북콘서트 제가 꼭 여기서 하고 싶었다는 거 알고 계시죠 

- 어련하겠어요. 

- 어머니 고향이기도 해서.. 제겐 여러모로 여기가 딱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가 봤어요 거기?

- 아직요..

- 그래요. 바다가 있는 곳은 금방 해가 지면서 어둠이 깔려 들어요. 

- 네.. 가봐야죠. 공간 좀 볼 수 있을까요. 

- 여기 이 공간이 독자들과의 대화를 나누실 곳이에요. 

- 혹시 그 시간 동안만 잠깐 음악, 바꿔 주실 수 있나요 

- 물론이죠. 보통은 잔잔한 클래식을 틀어 놓는 편인데 뭐 정대표 님 원하신다면..

- 감사합니다. 그런데... 서점이 약간 달라진 것 같아요

- 배열하고 테이블 몇 개, 그리고 인테리어 장식 몇 개 바꿨을 뿐인데 뭐. 그럼 천천히 둘러보고 가요 

- 아....



여기까지 온 본분이 잠시 도망갔다가 다시 뇌리로 돌아오는 순간, 나는 카운터 쪽으로 가는 서점 주인을 따라 출판사 일정과 기타 준비 사항에 대해서 한번 더 체크해 두기로 했다. 



- 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무례했네요.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 아닙니다. 이미 정대표 님도 오기 전에 누차 전화로 사항 체크 다 해 주셨는데요 

-... 네? 아... 저희가 작가님보다 더 소홀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 공간 배치 사진에서 보던 거랑 똑같네요. 독자들 오기 전후로 저희가 한번 더 홍보 간판하고 현수막 사전에 보내 드릴 테니 차질 없이 배치만 될 수 있도록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동아 서점 명성은 익히 찾아봐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아요.. 정말.. 부럽습니다. 

- 다들 그런 말씀들 하고 가세요. 

- 책과 함께 일상을 지내시는 게... 그냥 부러워서요. 이런 곳에서 특히. 

- 출판사 분께 그런 소리 들으니 좀 새롭네요. 근데 사실 막상 또 시작하면 자영업이 뭐 하루 이틀 할 게 아니라서 여간 골치일 때 많아요. 책 안 읽는 시대이기도 하고. 

- 그래도... 오래 계셔 주세요. 

- 그래야죠. 우리 정 대표 서운해하지 않으려면. 아니 정 작가라 이제 불러야겠네. 저 친구. 

-.. 원래 알고 지내셨나 봐요. 

- 여기 정 대표님 어머니 묻히신 곳이라, 자주 안부 전화하곤 해요. 특히 기일 전후로. 근데 조금.. 놀라긴 했어요. 누구랑 같이 오는 건 나도 처음 봐서... 

- 아... 



생각해보면 정태민에 대해서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서점 주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은 내심 그에게 마음을 쏟기에 충분한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해도 달라지는 사실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눈은 서점 공간 곳곳을 둘러보다 이내 책 한 권을 들며 읽고 있는 그를 쫒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잠깐 궁금했지만 그걸 내 입으로 직접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말해줄 것 같은 어떤 기시감은 결국 현실로 되어 버릴 거라는 걸. 말해주기 이전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이내 서점 곳곳에서 책들이 주는 편안함에 묻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드는 순간 어느새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혜연 씨도 그 책 좋아하는군요.

- 아...

- 되게 예전에 출판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 사랑의 기초.. 두 명이 함께 쓴 커플 책으로 출판계에서는 기획 성공작으로 꽤 히트 친 책.. 이죠 

- 알아요. 저도 읽어봤어요 

- 둘이서 같지만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에 끌렸어요. 

- 혜연 씨도 글을 쓰나요 

- 쓰긴 하죠. 혼자서만

- 왜 보여주지 않아요. 나보다 훨씬 더 잘 쓸 사람인데

- 작가님처럼 유명하지 않아서 안 팔릴 거예요

- 의외인걸요. 그런 생각 갖고 있다는 게

- 상업 출판에 편집 일 하다 보면 그런 생각. 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도 사람이니까.. 많이 읽어주면 좋죠. 잘 팔리는 글을 쓰면 그러니 더 좋겠지만... 원하는 글을 쓰는 것과 팔리는 건 차이가 있죠. 

- 흐음.. 사람이니까. 저도 사람이라서 그런 생각 하면서 쓰긴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 작가님 이번 책은... 조금 달라요. 원하는 글 쓰면서도 잘 팔릴 것 같아요.. 그걸 증명해 주셨어요. 

- 네?



그의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은 어느새 술술 입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사실 책을 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새어 나가기 시작한 그를 향한 마음이었는지 도무지 경계를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뭐에 홀린 듯 이미 내 입은 내 것이 아니었다. 



- 사진과 각 에세이 원고 꼭지 별 제목이 잘 어울려요. 내용도 어딘지 모르게 계속 생각하게 만들고. 단순한 문장의 배열이지만 글쎄요.. 어딘지 모르게 생각하며 읽다 보니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나 감정선을 궁금하게 만들기도 하고..

- 뭐가 궁금했나요

-... 살아온 시간들이요. 어떤 마음으로 흘러왔고 또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 새로웠어요. 

- 아...

- 정말 다른 사람 같았어요. 책 읽으면서. 곧 IPO를 앞둔 기업가가 아닌 정태민이라는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그 시간들.. 궁금했고...

- 나도 궁금했어요

- 네?

- 혜연 씨가 나에 대해 언제쯤 궁금하게 생각해줄까도 궁금했고 말이죠 

- 말장난은 여전하네요. 풉..

- 오늘 처음 웃었어요. 알아요?

-... 아.. 내가 그랬었나.

-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죠. 대충 이쪽 일은 다 마친 거 같은데. 

- 시간이 좀 늦어질 거 같은데.. 여기서 먹고 가면. 저는 휴게소 라면에 김밥도 괜찮아요 

- 원래 그렇게 남 신세 안 지려고 해요?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여기까지 왔는데 먹고 가죠. 그리고 저도 잠깐 가볼 데도 있고..

- 어머니....

- 아. 들었어요? 어머니 여기 모셨다는 거. 그건 밥 먹으면서 더 궁금해하시면 말씀드리죠. 뭐가 맛있으려나. 

-.... 순댓국 

- 네?

- 순댓국에 소주 먹어요. 

- 의외네요 혜연 씨. 

- 아직도 하려나... 여기 되게 맛있는 곳이 하나 있어요. 공간은 좀 허름하지만

- 그리로 가죠 

- 괜찮으세요?

- 괜찮지 않을 리 있어요. 나도 좋아해요. 무척이나.. 신기하고. 

- 네?

- 여기 되게 맛있는 곳 하나 있는 그곳이 나도 아는 곳이면 우리 괜찮은 인연으로 해 두죠. 자 갑시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그렇지만 그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과거로 잠깐 돌아가는 듯한, 예전 학교 다니던 시절의 생각에 잠깐 머물렀는지. 대학 졸업 후 기자 생활하기 전에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동해 여행. 그때 먹었던 순댓국과 소주 맛이 그리워졌다. 





(#동해 순댓국집 안) 


- 여기예요.

-... 여기 언제 와 봤어요?

- 대학 졸업 후에 기자 생활하기 전에 혼자 동해로 여행 왔었어요. 그때 우연히 들어간 곳인데 맛있어서 기억에 두고두고 남겼죠. 아직도 있었네 여기... 

- 아...

- 여기 알아요?

- 우리..

- 네?

- 아닙니다. 들어가죠. 사장님 여기 순댓국밥 2 그릇하고 소주 1병이요 

- 작가님. 소주는 농담이었어요. 그냥 밥만 드시죠. 둘 다 먹음 운전은 누가..

- 세상엔 택시라는 아주 좋은 수단도 있단 걸 모르는군요 혜연 주간님. 그리고 

-... 

- 여기 후배 놈이 최근에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는데 놀러 오라 했어요

- 네?

- 호텔 숙박뿐 아니라 공간 대관과 각종 이벤트 강연장으로도 손색없는 핫플레이스 캠프죠. 이미 거기 방 2개를 예약해 줘서 빼도 밖도 못합니다. 

- 정태민 대표님 그건 좀 실례되는 소리 아닌가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오기 전에는. 

- 지현 대리님도 1박 하는 건 말해 두셨다고 해서 여기서 하루 정돈 지내고 가는 거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  아.... (아차. 메일. ) 

- 의외로 당황하네요? 하하. 아무튼 재밌네요 혜연 씨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한 듯한 제스처도 그렇고. 

-... 놀리지 마세요.

- 놀리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멋대로 숙박지 잡은 건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상한 곳은 아니니 걱정 마시고. 오히려 미술관 느낌 나는 곳이니까 혜연 씨랑 아주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거기서 혜연 씨가 좋아하는 책 실컷 읽다가 올라가시죠. 책 만드시느라 수고하신 기념으로, 제가 드리는 시간 선물이라 생각해 주세요. 

-.... 아...



시간 선물... 그 이상하게 들려오는 단어 덕분인지

어딘지 모르게 허기져 오는 뱃속에 순댓국 한 입을 집어넣는 순간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한퀴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내 소주 1병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소주잔을 채워 넣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한 건 정태민 쪽이었다. 그가 한 말 때문이었을까. 듣고 있는 내내 목이 타서 나도 모르게 물인지 술인지 모를 정도로 한두 잔 손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타올랐던 건 어쩌면 이내 답답한 목이 아니라 마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어머니 고향이 여기예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고, 그래서 세상 물정 모른다고 아버지는 내내 구박하시듯 쥐어짠 듯 사람을 못살게 굴었죠. 할머니도 그러셨고. 아무튼 많이 힘드셨어요.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삶이 순하게 흘러가는 건 아닌 걸로 보였었죠. 

- 아.... 순하게... 순하게 흘러간다는 건 뭐예요. 

- 그냥 순하게. 모르겠어요.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사랑받고 살면 순한 거 아닌가 

-... 사랑받지 못하셨다고 생각해요?

- 그랬죠. 싸우진 않으셨지만 나와 눈이 마주하면 언제나 웃어주는 어머니였어요. 그런데 그 얼굴이 슬퍼 보였던 거예요. 아버지는 회사 일로 늘 바쁘셨고 어머니는 그 커다란 집에서 나를 보살피면서도 할머니의 갖은 구박을... 지금 시대로 따지면 뭐라고들 하죠 여자들 그 단어 있잖아요. 뭐였더라. 

- 시월드?

- 하하.. 네. 남자인 나는 별로 그 단어가 주는 억압감이나 강압이 어느 정도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일 테지만 여하튼 어머니가 아버지의 엄마인 할머니를 대할 때는 언제나 작아 보였어요. 

- 우습죠.. 다 부질없는 짓인데.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데 말이죠. 왜 그렇게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자기 하나 사는 것도 벅찬 게 사람인데.. 

- 혜연 씨...

- 내가 처음에 그랬어요.... 그게 좀 힘들었는데 뭐 또 사연 얘기하자면 길고. 시간 지나면 익숙해져요. 그래서 안 불편해질 때가 와요. 마음 닫고 살다 보면 그렇게 돼요. 

- 아....

- 소주 맛있네요. 이모님 여기 한병 더 추가요 

- 술을 잘 마시는군요?

- 많이는 아니지만... 못 마시진 않아요. 상대 가려가며 마실 뿐이지. 

- 의외의 매력이 또 나오는군요 

- 기자 생활하다 보면 술배 차 오를 때가 많아요. 마시지 않음 못 견디는 것들을 원체 많이 봐서..

.- 아... 너무 내 애기만 했군요

- 듣는 거. 재밌어요.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 어머니를 모신 곳에 왜 나랑 같이 오고 싶었는지.

- 어머니가 책을 자주 읽으셨던 기억이 나요. 커다란 집에서 학교 다녀오면 도우미 아주머니랑 같이 책 이야기하기도 하셨고. 할머니가 나타나면 어느새 책을 감추기 일쑤 시긴 했지만

- 방에 들어가서 보시면 되지 왜 그러셨대요 

- 어머니 서재가 따로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같이 살면서 어머니만의 공간은 그 집에서 없었던 셈이죠. 

- 바보... 이래서 안된다니까요.. 여자들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모른다니까..

-... 어머니는 자기만의 방이 없었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버지니아 울프.. 

- 버지니아 울프 





누가 뭐라 할 새 없이 둘은 동시에 입을 떼었다. 

책 한 권으로 통하는 사이가 이렇게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다는 건, 아마 같은 책을 읽은 나 이외의 또 다른 누군가와 마주하는 신기한 동지애와 더불어 호감과 함께 호기심을 자극시킬 만한 적합한 도구임엔 분명했다. 



버지니아 울프를 아는 기업가. 사내 독서 모임을 리딩 하는 대표. 나이를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젊은 외모 그러나 그것을 압도해 버릴 만한 매력적인 목소리와 근사하고 세심한 어른스러운 배려심, 그래서 그 나이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저항할 수 없게 시선을 끄는 사람. 이미 정태민의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적개심 가득했던 마이너스 이미지가 아니라 온통 플러스로 가득 차올라 있다는 것쯤은 부인하지 못했다. 



- 역시... 이상하지만. 이유가 따로 없지만. 혜연 씨를 보면 어머니가 오버랩돼요. 

-.... 왜요 

- 글쎄요. 아마 책을 조마조마하게 읽고 있던 출판사에서 처음 멀리서 바라본 당신 옆모습 때문에 그런 걸지도..

-....

- 아니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눈물 글썽이던 당신의 모습에서. 

-... 모성이 그리운 거예요?

- 그럴지도 모르죠 

- 좀 아쉬운데요

- 네?

- 여자로는 안 보였나 보네..

- 그럴 리가 있겠어요. 




소주 2병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쓴 소주가 별로 쓰게 느껴지진 않았고 다만 목이 계속 마르던 차에 소주를 시킬지 아니면 옆에 있던 물을 마실 지를 잠깐 고민했다. 



- 한 병 더는 무리인 것 같군요. 가죠. 

- 아뇨. 마실 수 있어요. 이모님 여기 소주 1병 추가요 

-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 무리 좀 하면 어때요. 한 번이라면서

- 네?

- 한 번쯤은 되는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기 오기 전에 그랬던 것 같은데 

- 아..

- 생각지도 못하게 온 속초. 그리고 서점. 그리고 순댓국. 그리고 누구 이야기. 다 나한테 이미 예상하지 못하게 흘러 들어온 것들이에요. 하물며 소주 몇 잔 더 마신다 한들 뭐 달라지겠어요. 얘기나 계속해봐요.

- 혜연 씨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 뭐가 궁금한데요

- 그냥.... 살아온 것들. 뭘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 거 참 되게 재미없는 걸 궁금해하시네.

- 그러게요. 나 원래 재미없어요. 

- 뭘 생각하며 살아요. 그냥 사는 거지... 

-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얘기하네요 혜연 씨 나보다 젊으면서. 아직까지 그렇게.. 예쁘면서. 

- 안 예쁜 사람이 반대로 하나 묻죠. 

- 얼마든지.

- 이수연 씨랑 왜 결혼 안 해요. 보통 결혼 전 약혼. 이젠 잘 안 하지 않나.. 촌스럽게. 

- 하하.. 그렇죠? 나도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왜 물어요. 신경.. 쓰여요?

- 네. 신경 쓰여요. 원래 안 쓰여야 하는 게 정상인데 쓰이네요. 그 신경이라는 거. 제가. 그래서... 좀 답답하네요. 목마른 것처럼. 갈증이 풀리지 않아요. 

- 왜 신경이 쓰일까. 우리 둘 사이가

- 자꾸 눈에 밟히니까.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 

- 결혼해요. 한번 해봐요 이수연 씨랑. 그럼 내 마음 이해할지도 모르겠네. 나만 억울할 순 없으니까. 

- 혜연 씨..

- 기혼과 미혼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당신? 그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알아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말을 하는지 말이 나를 이끄는지 모를 정도로 입에서는 어느새 그동안 쌓아온 말들이 조금씩 새어 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러나 말을 할수록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나를 바라보는 것에 지치지도 않았다. 



- 뭔데요. 기혼과 미혼의 차이가. 

- 결혼한 이후 장기적 관계에 돌입하게 되면 자유가 없어지죠.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타협을 한다는 뜻이에요. 타협은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이지만 둘의 합의 하에 선택이라는 걸 한다는 의미죠. 타협은 훌륭한 우산이지만 형편없는 지붕이에요. 당신이 그걸 알기나 해요

- 미안해요 몰라줘서.. 

- 결혼이라는 안정된 관계의 두 번째 단점은 선택권이 없다는 거예요. 아직 법적으로 혼자인 당신이나 이수연 씨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파트너를 찾을 수 있다 해도 결혼한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러니 그걸 이용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정태민 대표님! 당신은 지금 그런 내 취약함을 가지고 장난하는 걸로 밖에 안 보여.. 도대체 여기에 왜 데리고 왔어요. 어머니 얘긴 왜 해줬어요. 그래서 왜 자꾸 나 흔들어요.  

- 아..

- 비논리적이야. 정말. 

- 네?

- 사랑이. 그래서 비논리적이라고. 가시죠. 다 먹었어요. 





지우를 낳고 나서 늘 맥주만 먹었지 소주를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잠깐 휘청했지만 정신은 아직 말짱함에 스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나 오히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듣지 않았던 건 말이 새어 나간 입술이었다. 순댓국집에서 나와서 택시를 부르고 정태민의 후배가 경영한다던 호텔까지는 몇십 분이 걸렸을 까 금세 도착해 있었다. 



- 잠깐 로비에서 기다려요. 체크인하고 올게요. 

-... 네. 저는 화장실 좀

- 저쪽이에요. 혼자 갈.. 수 있죠?

- 저 안 취했어요. 

- 네. 아니 넘어지지 말라고.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다는 것이 거기서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는 걸 알았을 때 먹었던 술이 다 깬 것 마냥 화들짝 놀라서 급하게 로비로 달려 나갔다. 소파에서 책을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긴 다리를 엇비슷하게 꼬고 앉아 있는 여유로운 자세의 정태민이 멀리서 보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건 왜였을까. 금세라도 말을 걸어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중인 나는 못내 혼란스러운 감정을 겨우 감추고 있었다. 



- 아... 속 괜찮아요?

- 그냥 먼저 들어가시지 그랬어요.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 이 건 전해주고 가야죠. 그리고... 

- 프런트에 맡겨도 됐잖아요. 

- 그냥요.. 보고 싶은 친구 그냥 두고 가는 친구는 진짜 친구 아니니까. 

-...

-  엘리베이터 저쪽이에요. 가시죠. 21층 이에요. 

- 거긴..

- 부담 마세요. 팬트 하우스 층이라고 해서 그렇게 비싼 건 아니니까. 

- 그래도..

- 뭐 설령 조금 비싸도, 책 읽기에 그 정도는 돼야 선물이지 않겠어요. 가죠. 



2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리는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애꿎은 핸드폰을 계속 매만지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잠깐 멈춰 섰다. 루프탑 라운지 바가 어디냐는 낯선 커플의 물음에 정태민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버튼을 눌러주며 그들의 자리를 비켜내듯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는 틈에 잠깐 손이 스쳤던 탓에 못내 가방 안으로 손을 짚어넣다가 나도 모르게 들어있던 시집 한편을 만지작 거리며 시종일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띵동. 어느새 21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낯선 커플과 눈이 마주했을 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성급히 바깥으로 나왔다. 그런 나와는 달리 언제나 여유로운 자세의 정태민이 사뭇 얄궂게 느껴지던 찰나였다. 그가 내게 다가오며 나지막이 말했다.



- 혜연 씨. 

- 네?

- 이 상황에서 키스하고 싶다 하면 미친놈이죠.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 울지도 몰라요. 

- 울어도 괜찮아요. 



어느새 그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럴수록 그의 스킨 냄새가 진하게 풍겨 왔다. 

불가항력적인 끌림이라는 건 어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떤 열정에 마비되어 찾아오는 일시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둑이 터진 것처럼 감정은 쏟아져 나왔다. 

누구도 미워할 필요 없이. 아무 방해도 받을 필요 없이. 


부는 바람을 향한 기울어지는 속도는 그걸 감내하는 풀만이 알 수 있는 것처럼.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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