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Jan 30. 2019

행복보다 '의미'. 그렇다면 불행해도 괜찮다.  

오늘의 나를 껴안아 보며... 

결혼과 가족생활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훌륭한 장소이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 기혼의 삶에 돌입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라는 독립적인 개인은 어느 정도 죽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걸 종종, 아니 요새는 정말이지 자주 깨닫곤 한다. 



상으로 원치 않은 시간이 침투할 때마다 나는 '자유'라는 가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등원 거부 시위가 한창인 전쟁 같은 요즘의 아침 출근길, 결국 의도하지 않은 오후 반차를 내며 이른 하원 시키고 나서 본능적으로 밀린 집안일을 하다 칼끝에 베어 버린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를 자연스럽게 입술로 빨다가 쓱 닦고는 다시 연거푸 움직였던 나, 밥 안 먹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아이를 달래다 엎어진 밥상을 치우며 나도 모르게 분노의 눈물이 차올랐을 때. 목욕하지 않겠다고 온갖 생떼를 피우다 (그것도 오늘은 두 명 동시 연발 타석에 서 주시며) 저녁에 먹은 끼니를 화장실 바닥에 모두 토하고 말았던, 비위가 늘 약해서 자주 토하는 둘째 둥이를 껴안으며 함께 울었을 때. 빨갛게 부어 오른 토끼눈을 하고 파김치가 되어 있을 무렵, 퇴근을 한 그이가 아이들과 먼저 눈을 마주하다 그제야 따가운 시선을 느꼈던 모양인지 내 어깨 한번 토닥여 주고 말았을 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어떤 분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느낄 때... 




사실 저것들은 모두 오늘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도 결국 지나갔다...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인 장면들 앞에서 나는 부당하다 느껴선 안 된다. 거부하는 것도 곤란하다. 내면의 충돌만 일어날 뿐이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일단 받아들이는 걸 택한다. 그래야 겨우 살아지는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내 안에는 꿈꾸는 거인도 있지만 다른 한편엔 서슬 퍼런 괴물도 있다. 

누군가에게 나의 출산과 양육의 시작은 축복이자 선물이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여전히 내면에선 무서운 '한니발' 이 종종 깨어나곤 해서 잘 다스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니 여전히 긴장하며 사는 중이다. 



'나'라는 사람을 조금은 죽여야 누군가 살아지는 시간...

이제 38개월 차에 돌입한 만 세 살 아들 쌍둥이 육아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견디지 못하는 무게감과 압박,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와 동시에 연민의 극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내가 마주한 선물은 커다란 성장의 장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 '부모'의 시간을 겪는 '지금'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닌 누군가들을 위해 보듬고 살리는 행위를 통과하는 지금 이 시간들만큼... 커다란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서야...알 것도 같습니다.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들을....





사실은 말이다. 나는 이제 행복을 별로 바라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의미'를 갈망한다. 

이번 생에서 내가 가질 있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어떤 의미 말이다. 그래서일까. 행복보다 상처 받는 편하기도 하다. 결국 불행에 빠진다 한들 그만큼 살면서 살아있는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이제 나는 거기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행위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야만적일 있는 가를... 되묻곤 하는 요즘 

사실 정말이지 행복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불행함도 여전히 느낀다. 그러나 괜찮다. 어쩌면 이렇게 자라고 있는 걸지도 모를 테니까. 나라는 사람의 '성장'의 다른 면이 이런 것이라면... 아이 있는 기혼의 삶, '부모'의 길로 들어선 이번 생은 이미 성장판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지 싶다... 그놈이 성장이 뭔지. 성장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결론 짓는다. 성장은 '지금' 이라고. 



뻔뻔하고 가소롭지만. 가끔 기혼 제도의 불합리성과 양육의 과정에서 내면의 분노와 투쟁한다. 

특히나 혈육관계는 때때로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든다는 것.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시간을 미루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 기회를 가짐으로써 고되고 성가신 소위 육 4종 세트 (양육, 보육, 훈육, 교육)를 해내며 이 시간이야말로 삶이라는 링 위에서 얻어터질 각오 하고 그렇게 성장해 나가는 것... 그 어떤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일'은 이 4종 세트의 과업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행복보다 '의미'. 그렇다면 불행해도 괜찮다고 

요즘 나에게 선언한다. 내 시간이 잠시 '저당' 잡혀 있다고 느끼는 슬픔이 다가올지언정. 의심할 여지없는 커다란 의미가 담긴 이번 생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러니 불행해도 괜찮다고. 그만큼 나는 지독하게도 근사한 시간을 아프지만 겪어 내며 결국 또 다른 아름다운 나와 마주할 것이라고..



보고... 싶다. 

좀 더 아름다운... 숙성되어 단단해진 나를 그리워하며. 이제 눈물을 거두며 다가오는 '오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이렇게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며... 



새벽의 찬 이슬 '때문' 이 아니라 '덕분' 일 것이다...산다는 것도. 살아내는 것도.







작가의 이전글 #12. 미워할 필요 없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