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아닌 완전한 내 삶을 살기
남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분해낼 줄 아는 힘
첫 번째 책 '하루 10분 거꾸로 가계부'를 써 내려갈 때 강조하고자 했던 숨겨진 메시지는 바로 '타인과 나의 욕망 구분하기'였다. 필력이 부족해서 어필이 많이 안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름의 철학적 삶과 돈에 대한 메시지를 살려 내려고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안간힘을 써 내려갔었던 참 치열하게 살았던 그때가 갑자기 생각난다. 당시 나는 '내 삶을 완전히 살려고' 애쓰며 몸부림쳤던 시간이었으니깐.
돈을 소비함에 있어서는 특히나 우리 개개인이 '남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분해낼 줄 아는 힘을 길러주는 아주 기본적인 연습의 장이 될 수 있다. 가령 난 점심에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지만 누구나가 우르르 몰려가는 점심시간이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배가 고파지고, 아니 그래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밥을 먹는다.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한 것이 뭔가 체한 듯 한 거부감이 느껴진다.
배가 고프지 않았음에도 끼니 때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게 되는 습관 혹은 식사하러 몰려 나가는 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렇다. 그럴 때 과감히 '전 오늘 먹지 않겠습니다' 라거나 '먹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아서 그렇다.
남의 욕망인 '배고픔'에 대한 욕구가
나에게 얼결에 붙어 버린 경우,
결과는 체하는 것뿐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뱃속으로 집어넣어진 밥심 빵심 디저트심 커피심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붙는 살은 기본일 테고)
용기를 낸다는 것
배고픔과 욕망에 대한 비유가 좀 어설프게 짜 맞춰진 표현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삶을 산다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배고프지 않은 데 배고픈 양 살고, 사랑하지 않는 데 사랑하는 것처럼 쇼윈도로 사는 삶. 뭐 이러한 건 예시일 수 있으나, 사실은 주위에 꽤 속속들이 숨겨져 있는 우리들의 적나라한 현실의 또 다른 단편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을 구분해낼 줄 알면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도 점차 뚜렷해짐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스스로 한 걸음 step up 해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 자신의 욕망에 대놓고 '용기'를 낸다는 사실이겠다. 즉 스스로에게 솔직한 용기를 내 보는 것이다.
마음에서만 생각했던 내 욕망을 바깥으로 표출해낼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물론 전제 조건은 있다. 스스로 가치 있게, 그 가치가 되도록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스스로 납득할 수 이는 양심과 도덕의 경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붕괴된 채 내가 원하는 행동을 향한 용기를 낸다는 건 사실 참 무서운 에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나 사이코 패스 심리 사건들이 이제는 사회 이곳저곳에서 작고 큰 사건들로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행동은 좋으나 그게 무조건적으로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저지르고 보는 심리 중 하나일 수 있다. 이는 내 안에 일그러진 삐뚤어진 욕망이 낳은 무시무시한 결과일 수 있다.
불행해지는 이유
불행의 원인을 사실은 우리 스스로는 내면 깊숙이 그 정답을 알고 있다. 모른 척할 뿐이지.
내 기분과 감정, 느낌을 소외시킨 채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키려는 삶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불행해지는 걸 테니깐. 즉 쉽게 말해서 남의 삶을 나의 삶인 양 살려고 하기 때문이니깐 말이다.
가족도 어찌 보면 핏줄로 연결된 인연일 수 있으나, 물리적으로 볼 떈 철저히 나와 개벌되는 각자의 삶을 가진 개개인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족 핑계를 댄다. 불행을 내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혹은 소위 부모가 원하는 삶이 마치 내 삶인 양, 아니 최소한 나보다 더 오래 살았던 그들의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성공의 기준에 달성하려는 욕심이 마치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순간 때문에, 그렇게 불행은 시작한다.
가령 중 2였던 한창 사춘기에 물 올랐던 내가, 난생처음 수학 100점 받았다고 기분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수학에 관심 1도도 없던 내가 단지 선생님과 부모님의 칭찬 한번 듣기 위해서 밤낮 기를 쓰고 그다지 재미없는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고 공식을 달달 외우던 그 과정들을 그럼에도 실천한 이유는 100점이라는 결과 덕분에 한번 맛보게 될 달콤한 시간을 상상하며 '한번 해 볼까'라는 의지가 좀 더 강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사실 그 과정조차 별로 반갑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시험과 그 의지가 과연 어디까지 통할까 라고 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스스로 시도해 본 하나의 과정이었고, 나는 사실 결과보다 그 고통의 수학 공부를 해 냈다는 그 과정이 뭔가 더 흐뭇했다 (그래서 크림빵 하나 단팥빵 두 개 그렇게 스스로 선물했을 뿐이고...ㅎ)
사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원하지 않은 사회/역할 기준에 달성하려는 욕심 때문에 불우하고 불행하다는 걸 우리는 모르지 않을 거다. 다만 환경이 그래서,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내가 원치 않았어도 원하는 것만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깐 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단 하나의 삶이다. 내 삶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안타깝게도 주어진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래서 주어진 삶 또한 단 하나에 불과한 게 바로 인간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우리는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또 그만한 권리를 부여받고 태어나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힘든 데 괜찮은 척한다고 사람들이 모를까? 남들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결국엔 속이지 못한다. 나라는 사람이 진심으로 내 만족에 의해 생생하게 웃고 떠달고 행복하고 세상이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고 팍팍해도 그럼에도 꽤 살만한 곳이라는 걸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평생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비극을 경험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 비극이 되풀이되기 전에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실현시켜야 한다. 누가? 바로 내가 말이다.
타인이 아닌 완전한 내 삶을 산다는 건
바로 그 비극을 스스로 끊어내는 용기를
행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끊임없이 나의 삶에 대해 의심하는 중이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일개 부모님이라는 울타리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대학이라는 곳을 들어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게 모나지 않은 삶을 살다 보니 4년제 꽤 괜찮은 대학 게 가서 꽤 우수한 성적으로 꽤 괜찮은 월급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결혼을 했고 꽤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 안에는 여태껏 알게 모를 갈증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자꾸 그 편안한 현실에 반항하고 싶은 미친놈 기운이 잠들어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될 무렵엔 그냥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좀 더 여러 세상을? 경험해 보자는 참 복 받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생계가 아닌 경험을 위해 처음으로 '일'이라는 걸 합법적인 나이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생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소중하게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회의 더럽고 치사한 면을 겪다 보면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소중함이, 생명의 존엄성이 역설적으로 다가오니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도 해 봤고, 누군가와 지독한 사랑에 빠져 보기도 했다. 그렇게 이리 깨지고 저리 구르는 20대의 처음부터 30대의 초반에 이를 무렵은 오히려 마음은 수없이 다쳤을지언정 내 삶은 조금씩 그렇게 단단해져 가고 다양한 시선의 스펙트럼을 갖고 세상을 볼 줄 아는 나름의 혜안도 길들여졌다고 감히 돌이켜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삶에 온전한 주인이 되고자 했어서일지 모른다. 남이 내 인생 대신 살아 주는 거 아니니깐. 엄마가 아빠가 내 동생이 내 직장 상사가, 내 오래된 소중한 친구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나 대신 밥 먹어주는 거 아니고 사랑 대신해 주는 것도 하물며 돈 대신 벌어다 주는 건 더더욱 아니니깐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해서 사회가 정해놓은 그래야 한다는 규칙을 먼저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착한 고양이가 주인 말을 잘 따르는'식은 나랑은 그다지 맞지 않은 것들이라는 걸 꽤 조숙한 나이에 깨달았던 나였기에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제법 행복하기도 하다. 여전히 이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젊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꽤 스스로 잘 선택하고 판단할 줄 아는 성격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건 절대 아니다. 삶의 방향을 잃어서 이도 저도 갈 데조차 없었던 때가 나라고 뭐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깐.
그럼에도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도 나로 살 이유를 끊임없이 스스로 화두를 던져 가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흘러 가보고 있는 중이다. 내 완전한 삶을 향한, 아니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내가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을 끊임없이 스스로 의심해 보면서 말이다.
명상도 그 의심의 끝에서 시작된 아주 고마운 습관이기도 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불완전함에도 그 불안함 조차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는 최소한 생겼으니 오늘 흘러가는 이 시간이 편안하고 꽤 고맙다.
오늘도 '나의 삶'을 살기 위해 몇 자 적어봤다. 다 적고 내려가니 오늘따라 글은 역시나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들 어떻고 저러한 들 어떠할까. 내가 좋아서 내 선택에 의해서 내 움직임이 낳은 결과인 것을...!
엉뚱한 이 결과 조차 긍정하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된 오늘에 감사하며..
타인이 아닌 완전한 당신의 삶을 살아요
그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고 그저 당신이 지금 하고 싶은 거
10개면 1개를 해 보는 겁니다.
행운을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