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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12. 2019

슬플 때 사랑한다

당신은 알고 있어요. 

내가 1천 마일이라도 걸을 수 있다는 걸.


- A Thousand Mile -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누군가 녹음을 해서 나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지 않았으니 알 리라 만무했다. 순간의 감정에 매몰될 때 그것이 좋은 '몰입' 이 아니라 '매몰' 임을 뒤늦게 자각해도, 때는 늦었다. 시간은 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다. 



'불' 같다고 했다.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고. 

내가 그 정도로 뜨겁게 분노했던가.. 나를 다시 돌이켜 보게 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불이 그렇게 뜨거웠을까 싶은 물음표는 어느새 느낌표와 더불어 마침표가 가득한 점들로만 가득 머릿속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장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그치고 마음엔 단 한마디만 남았다.

그리곤 '여전한' 나는 한마디를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그리곤 보냈다. 한 문장으로 



그래. 미안해. 내가.



그도 나도 '일' 에 매몰되는 시간이 피크 치는 요즘..이다. 

특히 나는 요 근래, 현업 일터에선 소위 '갑' 질에 의한 감정 노동의 최고 피크를 찍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숨을 쉬며 전화를 하는 게 일상의 상식으로 자리한 소위 '갑님'들은 사람을 '쪼으듯'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그런 '닝겐' 들과 일을 주고 받는 중이다. 대단한 훈련 터다.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다. 그 훈련에 마치 조련당하듯 이 성격(?) 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되도록 화를 내지 않고 합리적(?)으로 '닝겐' 도 '사람' 대하듯 대하려 한다. 엉뚱하지만 그래서 입에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지내보는 요즘이다. 사람에겐 '인정' 욕구가 있으니까 그 심리마저 이해하려는 듯, 내 최선은 언제나 마음을 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여담이나 미안할 줄 알거나 고마워할 줄 아는 이가 진짜 '사람' 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아는 것도 아니더라)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 할 뿐.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고, 또 못했다. 



바다가 고요하다고 조용한 게 아니다. 그 밑에는 혼돈과 물결이 있다는 것. 고요함만 '보인다'는 것 뿐이다. 갑들도, 그리고 때로우리들도 그 이치를 잊을 때가 잦다.. 





속상하고 슬퍼서 울었다.

철저히 혼자 남겨졌을 땐 뭐가 그리도 서글픈지. 다행히 주어진 휴가 기간 내에 집엔 아무도 없다. 그것도 이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딱 '오늘' 까지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바로 돌려놓아야 한다. 있는 힘껏 그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렇게 글을 토해내듯 써 보는 걸지도 모를 테고. 



아무도 곁에. 없어서

다행인 순간은 바로 이럴 때다. 울기 좋은 방이 생겨버렸다. 집안 곳곳. 다행히 아기들이 없어서 그 어떤 공간에서도 울기에는 충분했다. 울음을 그치고 생각했다. 나의 사랑은 때론 여전히 폭력적이라는 것을. 비폭력대화를 주장하는, 인권의 사무치는 설움과 그로 인한 소중함을 깨달으려 안간힘을 쓰는 내가!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싶다. 가장 가까운, 가장 좋아하는, 가장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에서부터 상처를 입혀 버리고 말다니...



얼마나 아팠을까.

철저한 개인의 이기심이 사랑이라는 포장과 만나면 얼마나 큰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살면서 관계라는 걸 맺어 가며 (자식, 연인, 동료, 친구 그 무엇이든) 알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앎의 과정은 내 삶에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주는 크고 작은 표현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었음을, 이렇게 상대방의 뼈 아픈 팩폭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나 알게 된다. 미련 맞게도. 



불... 같았구나. 내가 도대체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런 단어를. 

힘들었을지도. 내 거침없는 표현들이, 그에게선 부담이고 복잡하기만 한 것이었을지도.

그렇다고 입 다물고 살 순 없지 않은가. 그게 좋은 관계인가. 마냥 침묵하는 게. 그러나...

그래도... 팩트는 '불' 같다고 느꼈으니. 결국. 그건 



상처다. 상처였다. 상처였겠다. 

마구 흘러넘치는 마음을 그저 표현하려는 여전히 감출 줄 모르는 나는 드러내는 사람이라, 솔직함이라는 표현을 인정하기엔 턱없이 모자람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미 '어른'의 몸을 갖췄으니 정신도 '어른' 이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편하게' 생각할 테니까. (한데 편하다는 건 뭘까, 마냥 편한 게 진정 좋은 삶일까. 여전히 이런 물음표를 달고 산다) 살면서 때론 그 흔한 상식적인 것들을, 내가 아닌 남을 편안하게 해 줄 줄 아는 마음도 (배려라는 단어로) 잘 조화 이뤄야 혼돈과 질서가 적절히 매칭 되며 '잘 산다'는 삶이 이뤄지는 것이겠지.. 그렇겠지. 



밤이 찾아온다고 꽃이 아닌 건 아닐것이다. 꽃은 그래도 꽃인 거다..나는 결국 나인 거다. 감춘다고 내가 아닌 게 아니다...



하나가 되려 하는 사람들에겐 둘의 차이를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가치가 붙으면 더 어렵다. 어쩌면 뜨거움의 차이일지 모른다. 온도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일상생활을 해석하는 다름의 차이라기보다, '사랑' 하는 관계 안에서는 시간과 경험이 주는 서로 간의 온도 차이. 그로 인한 현상의 '해석' 차이가 더 클지 모른다. 그건 마치 내가 맥주를 좋아한다고 그가 맥주를 좋아할 리 만무한대 나는 맥주를 너무 권해서 너무 취해서 그래서 이젠 그만 취하고 싶어서 'No way'를 외치는 꼴이나 다를 바 없겠다. 



늦게 깨달아서 

이렇게 언제나 한 발자국이 늦어서. 그로 인한 애석함과 슬픔, 서글픔의 모든 감정들은 결국 의미가 없다. 다만... 다만 말이다. 나는 어제 한참을 울다가, 잠시의 침묵 속에 딱 하나의 문장만 불현듯 남겨지더라. 



슬플 때 사랑한다



순정하지 못한 슬픔은 마음에 남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어제보다 좋다. 더 화창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찾아온 '오늘'이라는 새로운 시간에 마치 있는 힘껏 부응하려는 듯, 이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얼추 끝마쳐지는 실용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면서 혼자 중얼거려본다. 귓가에 흘러오는 이 노래 가사를. 



내가 1천 마일이라도 걸을 수 있다는 걸. 

이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리고 이런 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거란 걸 아는 나는.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상처를 주는 내가 밉지만, 그것도 '나'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다만 이렇게.

이렇게 늦게 '미안하다' 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아직. 남아 있는 나라고. 그리하여



슬플 때 사랑 한다. 

우리는 슬플 때도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삶은 하나이고, 짧고, 또 예측 불허하기에. 



밤이 가시고 새벽이 오고 다시 아침이 흘러 '오늘' 이 지나간다. 그러니 만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꽃은 결국 피어난다... 



#점심_단상_아무 말_다시_심기일전  

#감정노동이_여기저기서_피크다_피곤하구나_삶이란_그래도_살아야_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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