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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14. 2019

행복이 허용되는 시간  

'리케' 하다...

후회하지 마, 부끄러워하지도 마. 

쓸쓸한 생은 많은 사람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너는 한때 그것을 가졌어. 그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거잖아.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그토록 우아한 식탁을 맞이한 게 얼마만이었을까. 

물론 처음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그런 상차림, 더한 대접도 받아본 복 받은 인간이 바로 '나'라는 걸 잊고 마는 또 다른 모습의 '나'는, 어제의 우아한 시간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취하게 만든 건 와인 네 잔 덕택이었겠다만. 



보존이 잘 되고 동시에 비싸 '보였던' 와인과 나무 접시에 담긴 큐브 치즈 조각, 초콜릿 쿠키, 커다란 유리 샐러드 볼에 담긴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와 건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적절히 버무려진 샐러드... 그리고 마치 북유럽의 작은 개인 가정 안에 초대받은 듯한 인테리어 속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몇 개의 촛불들.  무엇보다도 한쪽 벽에 읽고 싶은 책들로 가득했던 공간.



선명한 단색이 조화로운 공간이 어쩐지 나에게 낮설면서도 반가웠다. 



그 공간, 시간에 취했던 게 분명했을 테다. 

독서모임이었다. 모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독서모임에 초대받은 나는, 사실 몇 주 전부터 들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솔직한 심정으론 적잖은 긴장과 각오를 품었었다. 못 가게 될 확률이 매우 농후했기에. 그래서 반 포기하고 있었기에. 



신은 때때로 원하던 것들의 배신과, 반대로 예측되지 않은 어떤 행운을 동시에 안겨 주시나 보다. 

그러나 결국 시간은 주어졌다.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품어내며 아이들을 맡기곤 바로 지하철에 몸을 실어냈다. 가방에서 바로 읽다 만 책을 꺼내 들어 거의 완독에 가까운 페이지까지 이르렀으니. 어쩌면 곰돌이 푸가 말한 대로 꿀을 먹고 있는 그 순간이 아니라, 꿀단지를 열기 전, 단지를 찾고 그것을 '기대' 하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 한 건 정말 맞는 말이 아닐까... 싶은. 



뒷 북은 뭐랄까 재치있게 반가운 단어다 '북' 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랑하고 마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기에 '리케' 했다고. 

'리케'라는 주제로 토론 (아닌 사교적인 대화로 마무리가 되었지만)을 마치고 기꺼이 늦은 시간 끝까지 약간의 의리적인 연대가 이루어진 듯한 해당 업종의 관계자 몇 분을 비롯하여 우리 네 여자는 서로의 실명도 거주지도 하는 일도 삶도 전혀 몰랐지만 그저 '리케의 밤' 하나로 시간을, 마음을 간접적으로 주고받았다. '리케'에 대한 책 이야기와 여러 난상토론을 벌이던 중 '행복'에 대한 정의를 한 명씩 해나갈 때였다. 



"저는 행복보다 불행이 좀 더 가까운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고통과 불행에도 의미가 있다면요. 제만의 의미가 있다면. 저는 행복하지 않아도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취기에 어설픈 고백을 하고 말았던 나의 터무니없는 한마디가

내뱉고 나서야 약간의 후회를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 타인들은 모두 얼마간의 짧은 침묵으로 계속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 귀들에 어떤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술과 함께 술술.... 때때로 나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들에게 진실된 삶의 바닥까지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어떤 충동이 일어나는 걸 꾹꾹 눌러 담은 채.



누굴 빤히 쳐다 보는 버릇은 여전하구나라고 새삼 발견했하면 여전히 멋쩍다...(feat. 샐리님. 초상권 죄송...제가 찍은게 아닌...) 



목소리에, 말과 마음을 고르고 또 고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그 시간. 어떤 '기다림' 들 덕분에 '리케' 함과 '고마움'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가 훌쩍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아차'.... 감성이 이기는 시간은 어느새 막을 내리고 다시 이성이 되돌아온다. 



기다리던 시간은 결국 끝이 난다.

우리들은 다음을 기약하는 어설픈 이별을 마치고 각자의 길을 향했다. 그리고 나도... 2호선 홍대입구에서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6번 출구로 뛰어갔다. 더 늦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니 사실 죄스러웠기에. 여전히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혼자 떠돌이가 된 것 마냥, 자유롭고 싶은 나는... 늘 죄를 품고 산다.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 같다. 이제는 그 감정 조차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만. 



밤 11시 25분, 귀갓길 광역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그 기뻤던 '리케' 함이 충만했던 시간을 뒤로했을 때의 어떤 아쉬운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간, 와인 몇 잔에 휘둘린 손가락이 어느새 보내버린 몇 마디의 메시지가 주는 공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우아한 식탁과 공간과 사람들이 있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우아하나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우아하지 못한 요즘의 내가 나에게 미안해서, 그런 못난 생각을 여태 품고 사는 나를 발견해서 슬픔에 휩싸여 그랬던 걸까. 



버스 창문 밖에서 달을 보았다. 밤의 달은 언제 봐도 그리운 존재들이다. 



그 밤이 여태 생각났던 건. 

기약하는 앞으로의 시간과, 기약할 수 없는 또 다른 어떤 시간들의 '기다림' 이 공존하는 밤이었기에. 아직 10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고. '리케의 밤'과 흐른 나의 기억은 이렇게 생존하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의 풍경을 기어코 담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글로 어제의 기억을 채워둔다. 



'한때 그것을 가졌어. 그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거잖아'라는 작가의 말을 기억하며. 

불행해도 괜찮은 삶을 품은 사람일지라도 오늘도 '리케' 하기를... 바란다. 

후회함과 부끄러움 없이. 












속수무책으로 와인에 약하다는 걸 처음....알았다. 이 나이 먹고 이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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