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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13. 2019

맨발로 걷다

걷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도...

선함도 재능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함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요.

재능은 갈고닦아야 빛나는 것이니, 선함 역시 녹슬지 않기 위해서는 갈고닦아야 한다고요.


- 너는 너로 살고 있니 -




이제 쉽게 주어지지 않은 선물 같은 것은

예를 들자면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귀갓길이 그것이다. 그러니 걸을 수 있을 때 마음껏 걸어보자는 심보였을까. 이번 주 내내, 아이들의 하원을 봐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되도록 걷기로 작정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면 음악이 흐른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잠시의 기분에 빠진다. 늘 지나가던 육교를 지나 메타세쿼이아 나뭇길이 있는 지점에 도착한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하루라는 시간 속 작은 힐링이.



그런데 맙소사. 올해 처음으로 꺼내 신고 갔던 샌들 굽이 말썽을 부렸다.

걷다가 툭. 질질 끌고 가는 게 더 불편할 정도로 결국 생을 마친 샌들을 나는 멀뚱하니 바라보았다. 30초간 정지. 망설임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대로 신고 있던 나머지 샌들마저도 벗어버리기까지의 시간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따갑고 뜨거웠지만, 시원하고도 좋았다.. 정말 좋았다. 맨발로 걷는 시간이, 자유로웠으니까.



이 나이에 맨발의 청춘이라니.

드라마라도 찍어볼 요량이었던 걸까. 설마... 물론 랩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니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살짝 보이는 맨다리는 히치하이킹이라도 시도하려는 이십 대에겐 매력 발산하기에 충분한 룩이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젠 부질없는 그런 상상들은 그저 문학에서나 찾아보기로 한다. 다만... 어떤 생각이 스치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아직, '나' 라는 색깔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타인 시선 하나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잘도 음악을 들으며 씩씩하게 맨발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싶었다... 모자란 듯 우습지만, 스스로 이런 마음을 감싸고도 다독인다. 굽과 끈 떨어진 샌들에 '왜 하필' 이 아니라 '그렇다면 맨발로'라는 생각의 주파수를 그렇게 맞춰버린 나는 사랑스럽고 또 기특하다고도.



맨발로 걷고 또 걷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평소와는 달리 길바닥에 집착(?)을 은연중에 하다 보니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일단 개미.... (개미는 어디 가나 있는 불멸의 존재 같다. 나의 육아 메이트이기도 하신 고마운 생명체) 그리고 그 개미들이 모여 있는 과자 부스러기나 먹다 만 사탕 조각들, 작은 돌멩이 조각들, 말라비틀어진 죽은 지렁이, 나무에서 떨어진 녹색 나뭇잎, 포장도로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생명력 질긴 잡풀들.



미처 알지 못했던 생명들을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좁은 시야로 살았던가 싶다.



사실 계속 걷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신발을 다시 신어야 함을 원치 않았지만 의식이 감지해냈다. 질질 끌고 갈지언정, 유리 조각이 좀 더 많아 보이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그대로 걷다간 발이 다 나가버리고 말 것이 짐작되었기에. 혼자로 살았다면 그대로 걸었을지도 모르는 영혼의 소유자(?) 지만... 나는 안다. 죽음 조차 이제 내겐 쉽게 허락되지 않고 (그럴 생각 없긴 하다만) 내가 돌보아야 할 내 삶의 이유들 덕분에 나는 내 몸과 건강을 반드시 지켜야 하기에. 함부로 아파서도 안된다. 그러니 다시 신발을 신었다. 양말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교훈과 함께. 그렇게 다시 걸었다.



익숙함으로의 결별은 반대로 새로운 세계를 선물해준다.

맨발로 걷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던 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떤 존재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 평생 보지 않아도 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로 나를 새로이 인도한다는 것. 그로 인해 생기는 '존재'의 소중함과 부재중에 오는 어떤 불편함이 반대로 무언의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한번 더 자화자찬 모드로 빠지고 만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현재를 흐르고 있는 나는.




고마운 것들은 기억해야 한다.



꽤 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어떤 죄책감에 쌓이면 '못돼 쳐 먹은 년'이라고 욕 한 바가지를 해버릴 때가 다분한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사실 나는 아직은 투명하고 순수하고 선하며, 다만 어떤 마음들은 뻔뻔하게 감추지 못한 채 그냥 되는 대로 살아 보는 아직은 '나'의 자유를 포기하지 못한, 선하고 귀한 존재라고 말이다. '선함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 고 했던 소설가의 문장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맨발로 걸으며 조금은 자랑하고 싶었다.



난, 맨발로 걸으려 하는, 선한 여자라고.

그러하니 여전히 나로 살고 있다고. 때론 그렇게 살 줄도 안다고...



석양이 지려 할 때 또 걸을 수 있기를.. 맨발로든 신발을 신든. 어떤 방법으로든.


#물론_결국_또라이라는_반증일지도_모를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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