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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04. 2019

용기, 어디로 숨었습니까...

읽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무례한 것이겠지요. 이미 다 들켰으면서 말입니다

하루는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그 어느 날.

그 문장을 나는 어디서 읽었을까요...


- 너는 너로 살고 있니 -





출근길에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버스정류장에 서자마자 시작되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도 우스운 생각이 스쳤다. 아이라이너를 생전 해보지 않은 채 살아왔음에 감사하다고. 아마 눈 화장을 잘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두 눈은 빨간 토끼 눈동자를 가짐과 동시에 검은 물이 줄줄 흐르는 판다눈이 되기에 적당한 양의 눈물이었기에. 그래도 다행이지 싶었다. 고된 감정이 가령 10 정도의 레벨로 밀려와서 어쩔 수 없이 신체와 감각이 반응했지만 그 와중에도 1 정도의 레벨로 '긍정'이라는 '감사'를 찾고자 하는 인간이 되었기에. 이 정도면 아직 살 만한 걸까.  



그럼에도 애써 감출 수 없는 잔상이... 여전히 떠올라 잠시 '글'로 도망쳐본다.

어제... 라기에 하루가 다르게 비일비재하여 '요즘'이라는 시간을 일컫는 간접 명사로 대체해본다. 요즘, 비극으로 빠져드는 건 정말이지 한 순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팔자소관'을 탓하고 마는 요즘에 적잖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으니까. '무슨 팔자에 아들 둥이...'라는 어리석은 등신 짓을. 또... 기어코 하고 말았다. 누구 '탓'을 하는 이 돼먹지 못한 버릇은 도대체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걸까...



일상에서 온 심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소위 갈아 넣어야만 겨우 버티는 수준으로 치닫는 그 '요즘'

가장 최측근 가족 구성원과의 양육 분담이 '전혀' 되고 있지 않는 상황을 라마틱하게 바꿀 순 없는 현실과 (그가 원치 않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지만 나는 그의 '탓' 도 종종 하다 이젠 포기 상태)  그놈의 '돈'으로 일정 부분 외주(?)를 맡기자니 그 또한 괜찮은 믿을 사람 구하는 것이나 하물며 터무니없는 가격 (아들이라고, 그것도 둥이라고... 나 원 참. 성별과 숫자에 가격이 매겨지는 현실이라니)에 분노와 질림의 연속으로, 일찌감치 반포기 상태였다. (신생아 초기 고용되신 도우미의 극악무도한 행동 상황에 맞닥뜨려 바로 아웃시킨 그 이후 "도우미"를 믿지 못하게 된 것도 영향..)



시들어 간다 생각하면 정말 시들 것 같아서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겉은 역시 드러나기 마련인가보다.



양가 부모님 도움을 간간히 (아니 자주) 받는 현실을 가만 살펴보면 이 또한 가관이다. 

시댁은 원래 나이가 많으시고 다소 먼 거리에.. 결국 풀어야 하는 시모님이 쥐어주신 미션 (소위 내게는 경미한 시월드적 숙제랄까) 덕분에, 언제나 마음은 무겁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데 이미 익숙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분노와 더불어 에너지는 닳고 닳는다. 반대로 친정이라고 마냥 편한 건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 오늘의 눈물의 주 요인은 이번에도 '친애하는 나의 친모' 덕분이었다. 

공모전 마감 날짜와 이번 달부터 시작되는 오프 독서 모임 및 기타 이번 달의 목표가 적힌 달력을 들켜 버린 게 화근이었으리라.... 이번 생엔 친정복 하나는 제대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면서 정말이지 '감사' 함을 '표현' 하려고 여러모로 물리적인 돈이라든가, 따뜻한 한마디라든가 하여튼 지간에 내가 있는 최선의 드러냄을 다한다고 생각했었다만. 모든 부질없었던 걸까.. 싶었다. 어제는 모두 표현을 그만두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으니.'뒈지다'는 동사를 듣자 결국 나의 나사는 기어코 풀려 버렸다.



- 정음아, 네 엄마 어딨니

- 엄마 나 여깄어요 화장실

- 안 처먹으니 그렇지. 그러다 뒈진다. 못난 년  

-..... 엄마. 애들 앞에서 단어 좀 제발.

- 뭐?

- 엄마 보기에 내가 못 마땅한 건 너무나도 잘 알겠는데 애들이 이제 다 듣고 따라 해..

- 보라는 애들 안 보고 허구한 날 딴 데 정신 쏟고 다니는 널 누가 좋아하겠어. 내가 시엄마라도 너 같은 여자애. 며느리복 없다 하지

-.... 엄마... 내가 정말 엄마 말대로 '뒈져버리면' 누가 더 힘들까...

- 뭐?! 이 계집애가.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애 키워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 절을 못할 망정! 이 죄받을 년아



어떤 "꿈"을 쫒는 행위들은 나를 제외한 누군가에겐 일체 죄악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어떤 '꿈'이라는 것이 또 생각해보자면 진지하게 임하면서도 소박한 일상의 어떤 시간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한대, 나의 경우 그중 읽고 쓰는 삶의 유지라 치자면... 친정맘이 오시면 칼퇴근 후 집에선 정말이지 일체 그 '꿈'도 못 꾸는 요즘의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애들 재우고 원고 교정을 하거나 하다 못해 레퍼런스 책을 훑어보거나 노트북을 켰다가는 대판 욕한 바가지 먹었던 몇 개의 기억들은 내게 커다란 상처로 자리 잡았기에. 그 이후엔 눈치(?) 보느라... 모든 꿈(?)과 관련된 것들은 집 밖에서 평일 틈새 시간을 공략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이런 한가한 장면은 아니지만..보통 점심시간 혹은 퇴근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그러하니 다시 말하자면 나를 비롯한 측근의 '가족'으로 관계된 이들에게는 그것은 '죄' 다.

양육 이외의 모든 행동들은 '죄받을 년'으로 비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아는 걸 직접적으로 들키고 말 때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침잠돼 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감정의 고리는 성대결절 판정을 받은 이후, 약을 끊고 몇 주를 지내다가 다시 목이 갈라지고 아파오는 요즘의 바닥 체력이 우울함에 한몫 거드는 아이템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현실과 내면의 바람 사이의 괴리가 일찌감치 큰 것을 다시금 느끼자니 서러움과 슬픔이 한껏 밀려온 거다.

아니면... 어제 남긴 서평 때문일까. 칙스 형제의 "순간의 힘"을 덕분에 "어떤 순간은 힘이 세다"며 평범한 일상 속 순간을 결정적 순간으로 바꾸는 데에는 영감, 고양, 긍지, 교감이 필요하다는 것에 통감했으나... 왜 그토록 바라던 그 네 가지 것들을 나는 내 가족으로 관계된 이들과는 거의 대다수 연결 짓지 못하는 건가.



이는 전적으로 욕심(?) 많은 내 탓으로 결론짓지만, 사실상 아이를 키우는 것에"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어떤 틀 안의 의식과 인식을 바꾸지 못함을... 여전히 인정하고 살기에 나는 분노하는 여자이고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삭막...해지고 싶지 않아서 어떤 '물기' 들을 그럼에도 만들려 한다. 조금은 어두운 곳에서도..




결국 말미에 남는 감정은 이런 것들이다.

나는 요즘 다시 꽤 경미한 우울과 슬픔에 잠식되는 시간들이 잦음을 느끼며 불안이라는 감정을 통과하는 중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써 웃으며 일상의 역할극을 큰 문제없이 해내고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내가 괜찮게 살고 있다는 하나의 연극무대의 연기 같은 것. 일종의 "척"을 하며 살고 있는 것 같은 것.



현업을 포기하고. 읽고 쓰는 것 또한 그들 말대로 아이 다 키우고 나서 하고, 소위 집에서 아이 잘 키우는 데 '집중'하며 충실하게 지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러면 한 사람 이외 모든 이들은 기쁘고 편해질 테지만..(정말 그럴까.. 나는 정말 모르겠다. 정말 그러면 다 편해질까. )



오직 한 사람.
"나"는 죽은 듯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그들은 정말 그 죽은 듯이 사는 삶을 원하는 걸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최측근 가족들의 언사와 일련의 행위는 실로 아이러니함에... 속수무책으로 나는 결국 어제처럼 어떤 대화의 끝에서 결국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저 내 감정을 감춘 채 미안하다는 한 마디로 그들의 감정을 편안히 보살핀다... 그리고 철저한 혼자가 되는 순간이면 나는 나를 보살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하면서도 그것이 일종의 자위 같은 형상 마냥 나를 향한 보살핌이라면.



이러려고 결혼한 것
이러려고 출산한 것도
이러려고 태어난 것도
아무것도 나는 미리 예측하지 못했지만

다만. 태어났고 쥐어졌고 캐릭터 형성이 얼추 된 이 마당에.

일단 이대로 살아. 일단 살아보라고.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반대로 들고 싶기도 해. 아직 놓치지 않고..



그러면서도 점점 자신은 없어진다. 

한계를 느끼지만 팔자소관을 운운하다 그래도 이 악순환적 현실과 아울러 질식될 듯한 감정 끝에 책에서 읽은 어떤 분의 명언들이 짜깁기되어 떠오를 뿐이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던데, 일단 행복이든 불행이든 둘째치고 태어났으니 살아보지만, '옘병. 내 편'들을 가족 안에서 찾기엔 당초 글러먹었으나 '오메, 인생 70까지 살아보길 참 잘했다야'... 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일'이고 나는 다둥이, 너희 둘을 사랑하니 말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하루의 시작, 새벽 네 시, 이런 생각의 끝을 마치고 오늘의 기상은 어제보다 한 시간 이르게 시작한 마당에. 오늘 다시 본가로 귀가하는 친정맘의 여전히 성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내가 다 미안해... 이렇게 생겨 먹어서. 아프지 마. 엄마가 지금 많이 아프니까 말이 그렇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

- 다시는 너희 집 안 온다.

-.....



나는 그녀가 나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아침에. 속이 무척 상해서... 그래서 눈물은 흐른 것이라고. 또한 나는... 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또다시 시작된 회색빛 감정에 잠시 동안 침몰되어, 그래서 그런 것이라고. 흐르는 삶은 예측 불허하기에 나쁜 일이 10가지 다가오면 좋은 일 1가지 정도는 같이 따라온다는 걸, 더 높은 삶을 결국 보답한다는 것을 굳게 믿지만, 나 또한 그 문장을 어디서 읽었는지...



'그 누가 살아 보지 못한 하루'

그 하루라는 삶의 단계가 있다면, 나는 계단 앞에서 그 삶을 오르기 전에 내게 묻는다.


용기, 어디 숨었습니까.라고...


May the Joy be with you...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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