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림
감정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삶을 휘두른다.
나는 종종 우리의 존재란 그와 반대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삶이 먼저 있어야, 내가 삶을 따르다 보면 그에 어울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보다 내 삶에 조화를 이루는 감정을 찾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 놓아 버림 -
오늘 사랑하는 사람은 내일도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 사랑하는 자는 삶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그럴 줄 아는 사람.. 내면에서 부정성을 '놓아 버린' 사람. 놓으려 하는 사람은 반대로 삶을 '긍정' 하려 애쓰는 사람이겠다.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사랑스럽다. 바보 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들 곁에는 자석처럼 끌려가는 어떤 사랑스러운 것들이 따라간다.
그들은 꽃, 바람, 별, 바다, 애완동물, 아기, 웃음, 햇살, 음악, 글... 그리고 '마음' ,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생의 소중함으로 인지하고 아낀다. 보살필 줄 안다. 결국 사랑으로 충만한 바로 그 '마음'이 활성화될수록 그 사랑하는 자는 결국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겠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런 '사람' 이기를 이제는 염원한다. 바라마지 않는다. '오늘'과 '내일'의 시간에 나의 '사랑' 이 현존하기를..
놓아버림, 데이비드 호킨스, 판미동, 2013.10.10.
어설펐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며... 나는 또 한 번 변해가는 나를 발견한다.
조금은 덜 울고, 반대로 조금은 더 온화한 심성의 소유자로. 에너지가 증폭하는 곳이 소란스러운 마음의 장소가 아닌, 되도록 '침묵'과 '고요' 한 장소에 안착하기를 선택한다. 그리하여 생활인의 역할과 기능 본분을 유지하는 이 시간들 속에서 스스로 괴롭히게 만드는 어떤 뜨거운 마음조차, 천천히... 느리지만 또 충분히 가라앉힐 수 있는 나의 또 다른 에너지로 만들려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니 발견하는 중이다.
높아버림에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기, 감정이 일어나도록 놓아두기, 감정과 함께 있기, 감정을 바꾸거나 어떻게 하려는 바람 없이 감정 스스로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두기가 포함된다. 즉 감정은 있는 그대로 놓아둔 채 단지 감정 이면의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민감하고 예민하기만 '했던' 나라는 사람의 상태는, 어느덧 조금씩 과거형이 되어 가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라도 - 읽거나, 쓰거나, 조용히 생각하거나, 그마저도 아닌 채 눈을 감고 숨을 쉬고 있거나 등등 - 하면서 여전히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애씀'을 실천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좋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라는 내밀한 어떤 견고함이 느껴졌던 건, 어떤 느낌에 조금 더 선명히 다가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건 마치 그 옛날, '에크하르트 툴레' 나 '네빌 고다드'와 '마이클 싱어'를 만나고 난 이후, 불쏘시개 같았던 마음에 찬물이 '확' 끼얹은 듯한... 저항 없이 감정을 흘려버리고 나서 찾아오는 '고요함' 끝에 찾아오는 어떤... 느낌..이다. 그건 또한 다시 말하자면 내 생각이 만들어 낸 '느낌'이라는 또 다른 결과물일 수도, 반대로 생각 없이 그저 '감정'의 지나감을 내내 기다린 어린아이의 투명함이 만들어낸 '기분 좋은 느낌'과 닮아 있다.
감정을 그저 생생히 느끼기만 하면서 어떻게든 바꿔 보려는 노력을 모두 항복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고 싶은 바람을 놓아 버려라. 저항 때문에 감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지 않으면 감정 이면의 에너지가 사라지면서 감정이 없어진다.
생각이란 감정이 생긴 까닭을 설명하려는 마음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감정이 생기는 진짜 원인은 감정 이면에 쌓여 있는 압력이 감정을 밀어붙여 특정 시점에 올라 오게 하는 데 있다.
부정적 감정을 놓아 버릴수록 감정의 상태가 척도를 따라 점점 올라가 '용기'에 이르고 용기를 넘어서면 성과를 거두기가 더욱 쉬워져 성공하고 힘을 덜 들여 넉넉해지기도 한다. 주위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을 '고양' 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주위의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 에너지를 내뿜는다. 동물들도 이들에게 끌린다. 기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주치는 모든 이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
마음 상태가 '놓아버림 모드'로 바뀌면, 현재의 상태가 '용기'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한다.
'나'를 옥죄여 오는, 좋지 않은 감정들조차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통과했을 때, 진정 마주하여 다만 지나감을 경험한 자의 내면에는 부정이라는 어둠의 힘이 사라지기 시작하겠다. 일단 마주했으니까. 아픔을 충분히 견디고 애도하고 목도하고 그렇게 '놓아 버림'을 선택했으니까. 그러고 난 사람의 감정은... '용기'. 겠다. 직관할 수 있는, 대면할 수 있는, 그대로 '나'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조금 더 괜찮은 '나'로 만들려는 어떤 '용기'를...
역설적으로 삶의 위기 뒤에는 길든 짧든 평화와 고요가 이어지는 시기가 오는 경우가 많다. 혹은 신비한 경험을 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거친 후 높은 자각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성장하고 확장하고 경험하고 발전할 기회다 어떤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 그 이면에 무의식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데, 경험할 유일한 길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같은 사건이었음을 무의식이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제창한 이론의 일부다.
내 안에 애써 감추고 있는 어떤 '그림자'를 일단 인정하고 나면
그 그림자가 힘을 잃는다니... 과연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 그림자조차 '나'의 생각이 만든 허상에 불과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선택을. 단지 '나'에게 어떤 금지된 충동과 생각... 감정이 살아 있음을 넌지시 알아채, 그렇게 흘리면 된다. 그러고 난 이후에 남는 문장은... 어쩌면 이 정도의 느낌일지 모르겠다. '내 그림자가 뭐, 그래서 뭐'라는 어떤 깊이와 소신 있는 신념으로 변할지 누가 알 텐가.
위기 없는 삶은 없겠다. 즉 누구에게나 위기가 찾아온다는 소리다. 벼랑 끝에 내몰리는 듯한 그런 시간들.
하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믿어야 한다. '나'의 그 위기가, 그림자처럼 지겹게도 따라붙는 그 위기가, 그런 감정들이. 비록 달갑지 않은 손님일지언정, 그 위기 덕분에 나는 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넓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나뿐 아닌 타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의식적으로 계속 자각하고 감정을 인정하고 또 놓아버릴 줄 아는 순간,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삶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증오와 분개, 억울이나 분노의 감정은 살면서 위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겁내고 물러서니 그 감정에 정복당하는 내가 있었다. 그런 감정이 만들어 내는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붕괴될 뿐이었고. 울고 또 울고, 움츠려 들고 자신감도 자존감도 고갈된 그야말로 마를 데로 마른 삶... 그대로 조금씩 가라앉으니 우울에 침잠하게 되는 게 일상이었다. 이유는 뚜렷하게 알지 못하나, 나는 문득 웬일인지 우는 거울 속의 내가 너무 아까웠었나 보다.. 우호적이고 보살피고 여전히 어떤 사막 같은 삭막함 속에 '사랑'을 바랐었던 걸까... 그랬었기에, 지금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잊지 않으려는 내가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내면 속 또 다른 모습인 '나'와 연습을 해야 한다.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고마움을 표하는 연습을. 바보처럼 보이고 멍청이처럼 여겨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려 하는 이들의 위대함은 결국 통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참된' 내면을 맞이할 용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
위대함은 사랑의 수준으로 높이 올라가려는 자발성이다. 위대함은 타인의 인간적 약점을 받아들여 상대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다. 타인을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되어 죄책감이 해소된다. 부정성을 높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때 진정한 보상을 얻는다. 이때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보상을 얻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할수록 고통에 덜 상처 받는다. 자신과 타인의 인간적 약점을 연민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굴욕 당하지 않는다. 참돈 겸손은 위대함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보면, 보다 큰 행복을 주는 근원을 갈구한다. 이것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얻는다.
책을 읽다 보니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만다. '놓아 버림' 은 '의식 혁명'으로
그렇게 마음을 움직여낸다. 생각해보면 뭘 해도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의 발현점과 같은 '마음' 이 적지 않게 삶을 살며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다. 마음에 품은 대로 실현되기 쉬운 것처럼. 한결같이 어떤 미움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에너지도 고갈되기 쉽듯이, 공포는 두려운 생각을 낳고 두려운 생각을 마음에 품을수록 두려운 일이 일어나기 쉬운 일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공포 대신 사랑을 택하도록.... 하자. 그랬으면 좋겠다.
되도록 환희와 기쁨의 '사랑' 이 더 많은 삶이, 결국 '죽음' 앞에서 덜 후회하는 삶일 테니까.
이왕이면 천진난만하게. 그러다 보면 한결 덜 상처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린아이의 삶은 그래서 어른들이 따라잡기 힘든 '즐거움'과 '기쁨' 이 있지 않던가. 이 맥락에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아마도 내일의 나는 나의 네 살이라는 시절을 통과하는 나의 쌍둥이 아들 두 명에게... 배우고 또 배운다. 이토록 커다란 스승이 따로 있지 않다. 바로 내 곁에 있었구나...
오늘, 조금 더 나는 용기를 내 보려 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춤 없이 흐른다는 어떤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꽃 피어오르려 할 때, 그 조차 놓아 버리는 어떤 용기를. 흐르는 시간에 아쉬움 없이 살려는 용기와 의지를. 그렇게 '나'의 감정과 의식을 다스리겠다고 스스로 확언하고 단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용기'의 수준으로 보다 도약하려는 '기특한 나'를 느낀다. 이토록 감정을 잘 살펴보고 다스리려는 스스로의 자발성만 있어도 우리의 자존감은 어제보다 높아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설레고 또 기대되는 것처럼...
아울러 '사랑' 하려는 용기마저도. '
결국 '놓아버림'의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사랑'이라는 가치는,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 있을 정도의 치유력이 있다는 것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전 시리즈에 물밑처럼 깔려 있는 메시지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상태에 있게 되면 결코 다시는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다. 또한 사랑의 에너지 장 속에서만 할 수 있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는 해 주지 않을 일을 내게는 해 준다. 굳이 '기적'이라는 이름 붙이지 않아도 사랑으로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해진다. 사랑에는 변모시키는 효과가 있다.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노라고...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 그대로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언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바랐다. 내가 그럴 수 있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 이 기를. 지금 곁의 사랑하는 그가, 그녀가, 나의 사람들이 부디 오늘의 마음 상태가 편하기를 바라다보면, 결국 그 바람이 나로 되돌아오는 어떤 마법 같은 주문을 외워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는, 조금씩 화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앳되게 여렸던 묵은 마음과 이 감정과 함께.
결국 삶을 긍정하려 애쓰는 '오늘의 나'가 만들어 낸 감정들은, 아마 예전의 그것과는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달라져 있음이 분명할지 모르겠다. 어둠이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견디며 이겨내고 나서야 도래하는 삶의 친구 같은 나의 마음에게 감사함을 표하면서... 보다 좋은 삶, 오늘이라는 24시간을 이렇게 마음과 화해하고 나를 있는 힘껏 껴안아주며 그렇게 만들어 나가 본다. 사랑스럽게. 사랑으로...
덧) 너무 좋은 책은.... 서평조차 남기지 못할 만큼의 어떤 깊이를 선물해 준다.
그냥 두고두고 생각날 때 읽어봐야 할 이야기...
덕분에 8월이 가득 풍요로운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아서... 고맙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