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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4. 2019

13인의 만찬, 죽은 자의 권리

최후의 만찬 

애끓지 마라. 절실하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너무 간절한 것은 절망에 지나지 않음을..


- 최후의 만찬 - 





'보기 드문 수작' 이 나타났다고 했다. 

'혼불문학상'다운' 소설, 근래 이런 무섭고도 묵직한 '필력'을 가지신 소설가의 책은, 아마도 '최후의 만찬' 이 처음이지 싶다. 쉽지 않고 난해했다. 어렵고도 또 어려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사 속 인물들과 그렇지 않은 가상의 인물들, 촘촘한 역사 속 지루한 정세를 굉장히 심오한 철학적 문장과 시적인 은유마저 총망라해서 담긴 이 장편소설을 읽느라 일단 진땀 제대로 빼야 했지만, 힘들게 읽어내렸던 만큼의 완독 후의 기쁨은 두 배, 아니 세 배인 것은 분명했다. 남겨지는 '질문' 들과 압도적인 '문장' 들, 기억하고 싶은 단어들이 꽤 나왔기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감히 생각된다. 



최후의 만찬, 서철원, 다산책방, 2019.09.25. p. 444



문학 속 문장의 힘을 믿는 편이다. 

허구의 문장이나 그것이 팩트 세계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야말로 '펜' 이 가진 '힘' 말이다.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각 시대적인 '배경' 뿐 아니라 그 시대와 역사가 만들 수밖에 없는 흔적과 상처를 따라가면서, 고스란히 자연스레 현대 시대의 정치 또한 과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 탄핵, 국정 농단, 비선 실세, 조국 사태, 기타 등등 등등.. 보통 역사소설이나 대하드라마와 같은 '과거'를 되짚어 보면, 자연스럽게 그 과거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현재의 어떤 길들을 보게 될지도 모를 테니.  




눈먼 자들이 세운 허상을 가까이할 수 없소. 열린 귀로 먼 곳의 복음을 들을 때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소. 


이 세상의 꿈을 이끌고 저세상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마음은 임금도 약용도 같았다. 임금이 가리키는 저세상의 골짜기로부터 이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비선들의 종횡과 실세들의 농단으로 이 세상은 날마다 끓어올랐다. 


세상 위에 그어진 선악을 망각한 자의 눈빛은 시린 겨울에 머물러 있었고, 목소리는 깊은 적의와 살기로 채워져 있었다. 복수. 오라비의 뜻은 은밀하며 확고해 보였다. 오라비는 한 번의 복수에 모든 것을 거는 듯했다. 



책을 찾는 사람들 중 문학을 읽는 이들만 알 수 있는 그 통쾌함이나 진한 여운이나..... 뭐 그런 것들 때문에 끊을 수 없는 걸지도..



은밀하고도 시적인 문장 표현들 덕분에 꽉 찬 느낌마저 불러일으켜 주는 소설

정말 오랜만에...'어려운' 소설을 만났지만 반대로 어려웠기에 배운 것도 많았던 감사한 시간... 이 한 권으로 묶인 장편 소설을 써 내려가는 데 얼마나 많은... 애씀의 에너지, 창작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 빛날 수밖에 없는 이 '작품'에 겸허히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마는 건. 아직 내가 문학을 좋아하기에. 그 문학이 가진 영향력과 힘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문청' 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붓의 완전은 늘 붓을 준 자의 불완전성에서 시작되는 것, 

칼의 완벽은 칼을 쥔 자의 불완전한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 




최후의 만찬에서 느낄 수 있었던 깊고도 심오하고 난해한 문장들과 서사를 따라가면서...

'믿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을 깔고'라는 이 문장에 유난히 꽂혔던 것은, 특히 '믿음'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 같은 '믿음' 일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아서 그랬던 걸까. 내가 믿는 것이 너는 믿기지도, 믿지도 않을 논리일 수도 있고, 반대로 네가 믿는 것을 내가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틀린 건 없고 다르다만 있다고 할지언정, 반대로 '사회적 역할'을 해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지라, 옳고 그름을 늘 따지게 되니... 생각은 이렇게 두서없이 확장되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후의 만찬은 13인의 감성으로부터 믿음의 완전체를 위해 세상을 응시하거나 세상을 외면하고 있사옵니다. 믿음.  말속에 떠오른 감성과 믿음의 실체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임금의 마음으로 건너오기엔 더 많은 날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뒤주에서 죽어간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근성은 믿음보다 외로움을 감추는 감성과 처세가 먼저였다. 그림 속 믿음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무언가의 숙주로부터 이어지는지 알 수 없으나 오직 한 가지 믿음을 깔고 세상을 무겁게 꾸짖고 있었다. 


최후의 만찬. 임금을 경계로 좌우로 갈라선 여섯 신하와 여섯 외인들의 엇갈린 모습은 다빈치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중략) 

임금의 얼굴이 근심에 쌓인 예수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임금과 예수는 거리낌 없이 서로의 앞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열두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로부터 배신당한 예수의 최후가 보였다. 시해와 역심과 반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임금의 앞날은 무엇이 올지 두렵고 막막했다. 




개인과 집단, 그 양쪽 울타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바로 한 생애라면.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역할로 어떤 단체에서 활약을 하는 '나' 이든, 철저히 개인의 주관하에 '나'로 살려 애쓰는 나이 든, 그 두 명의 '나'는 늘 충돌하고 말 테다... 그래서일까. 때로 삶이 초라하고 비루해서 도망치고만 싶을 때, 소설이나 문학작품과 같은 '허구'를 찾는 이유는 그 허구들 속에서 '팩트'를 발견하고 그 팩트를 현실에서 끌어당겨 조금 더 '괜찮은 오늘'을 만들고자 여전히 애쓰는 내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이렇게, 여전히 애쓰고... 있다. 애를 써야 살아지는 팔자 같기만 하다... 



책을 많이 읽은 달엔 '정말 애썼다'는 표현을 스스로 내뱉고 만다... 그만큼의 결핍, 그만큼의 '앎'을 찾고 싶었던 '나' 였기에..



덧) 필력이 가히 '쩌는' 책을 읽고 난 이후의 최대 후폭풍은... 다른 숱한 단행본들이 한방에 '가벼움'으로 분류된다는 치명적인 단점... 그만큼의 필력. 이 분은 '진짜 작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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