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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4. 2019

너의 잘못이 아니다

이제야 언니에게  (feat. 세상의 모든 '제야' 에게) 

찢을 수 없다. 찢으면 안 된다. 찢어버리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은 중요하다. 아름다운 과거보다 중요하다. 더 나은 미래보다 중요하다. 

지금 나는 살아있다. 그러니 다음은 있다. 내게도 다음이 있을 것이다. 


- 이제야 언니에게 - 







만약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그 한 권의 책, 한 권의 삶... 그 인생이라는 것 앞에서 나는 감히 묻고 싶어 진다. 항상 긍정하고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인간'이 행여나 있다면, 사실 나는 그 상대를 별로 신뢰하지도, 신뢰하고 싶지도 않을 테다. 긴 불행 속 짧은 행복을 추구하는 게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고 믿는 편이라 이런 고집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만. 



여기, '무참하고도 조용히 짓밟힌' 단 하루의 시간 때문에 

책 전체가 순식간에 흔들려 모조리 다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살게 된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의 감정은 몹시도 일반적인 문장으로 묘사되지만 반대로 그 안에서 지극히 예리하고 예민해서 뾰족하게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기어코 속속들이 파고 말아 버린다. 은폐된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자책감과 알 수 없는 미안함은 그렇게 밀려오고 만다... 비록 '허구'이지만 또한 '허구'가 아닌 '진실'과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기에. 그게 바로 문학이 가진 위대한 힘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창비, 2019.09.23. p. 249



고통이나 불안의 시간을 경험했던 사람들 중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돌파구' 이자 '생명수' 일지도 모르겠다. 심한 우울증과 그로 인한 신체를 자학하며 파괴했었던 한때의 내가 그랬듯이. 여전히 그 상흔을 갖고 그럼에도 '잘' 살아 보려는 내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 당시의 깊은 상처, 요즘의 경미한 고통 등등 내가 통과하는 그 아픔이나 불안의 시간은 '제야'의 '그것'과 아마 비교가 되지 않는... 아니 비교 영역이 애초에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선명히 공감했던 건, 제야의 '글'을 통해 그녀가 조금씩이나마 '치유'될 수 있다면...

정말 옳은 선택을, 바람직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그러니 제야가 계속 글을 써 주었으면 하고... 우습게도 소설 한 권을 읽고 긴 생각을 했고, 그 소설 속 인물에게 거울을 보고 '말을 걸어버리고 '마는 나를... 발견해 버리고 만다. '글을 계속 써요. 그래서 찢기지 말아요... 계속 써서 그날의 악몽을 토해내요. 그리고, 이겨요. 용서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어쩌면 이긴 걸지도 몰라요....'라고.... (맙소사... 뭐지. 나..)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 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 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 지을 때도 있었다. 


제야도 지우고 싶었다. 지우려는 시도는 그날의 감각을 더욱 세게 끌어왔다. 부풀어 올랐고, 거대해졌고, 악몽에서 만나는 괴물처럼 제야를 압도했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없애버리고 싶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건 엄마도 아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게 모든 걸 떠밀고 나를 없애버리고 있다. 지금의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찢어버리고 싶은 건 내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지고 있다. 



어떤 문장은 쉽게 써지지만 어떤 문장은 꾹꾹 눌러야만 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여성이라는 '몸' 은 그저 남자가 '꼴릴 때 하고 싶은' 성적 소비 대상으로 비칠 수밖에 없나. 정녕 그러한가.

그게 본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돈을 벌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켜내야 할 것은? 정작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와 책무는 교묘히 '주객전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 진짜 괜찮은 삶인가? 



순식간에 몰입해서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 한 편의 중편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이...... 질문이... 감정이 마구 뒤엉키면서 '나'를 찾아오고 만다. 그리하여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감정들을 맞받아쳐 내면서도 '슬픔'을 못내 이겨내지 못했다. 나도 '여자'라서..... 그랬나 싶다... 나도 제야, 너와 같은 '여자'라서... 그리고 또한, 나도 하찮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퍼붓고 마는 '나쁜 어른' 은 아니었을까 싶은 반성마저도. 




당숙이 성큼 다가왔다. 벨트를 풀면서 한 손으로 제야의 머리를 눌렀다. 목이 꺾일 것만 같았다. 네가 정말 좋다고 당숙은 말했다. 울지 말라고,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너는 정말 특별하다고, 너를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다. 당숙은 제야를 일으키고 교복에 묻은 오물을 털어냈다. 당숙은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넣고 컨테이너 내부를 정리했다. 앞으로도 나는 너를 챙기고 책임질 거라고, 다음에도 우리 여기에서 만나자고, 아니 내가 더 좋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고 말했다. 


이거는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엄마가 말했다. 

누구도 알면 안 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한테 또 그러면 어떡해 

네가 조심하면 된다. 우리가 조심하면 돼.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고. (중략) 


제야가 두려워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질책하는 말.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모든 게, 선명해졌다. 


여자애가 얌전하고 참한 줄 알았는데 보니까 담배도 하고 술도 하고 그랬다면서. 경찰에서 하는 말이 처녀도 아니었다던데 그럼 누가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트렸는지 알게 뭐냐고 말했다. 교장이라는 인간이. 


여자애 혼자서 겁도 없이 그 뒷길로 왜 기어들어가. 애당초 그런 데 가지 않았으면 없었을 것이지. 잘잘못을 따지자면 끝이 없는 거라고 과수원 고모는 말했다. 




여전히 이 세상은 비겁한 말을 하는 '어른' 들로 가득하다. 

나이만 '어른'이지 생각은 '아이' 만도 못한 '어른' 들로 가득하다는 소리다.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른의 나이를 하고서 어른이 아닌 이들에게 그 사정 그 환경 그 마음을 '공감' 하나 없는 상태에서의 '말'을 했던 '나'는 과거에 없었을까 싶은 생각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지극히 당연하게 읽다가 쓰는 '여자'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런 '여성' 치고 페미니스트 아닌 이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물론 같은 젠더임에도 전혀 '공감' 대를 형성할 수 없는 현상과 마주할 때면, 결국 그건 젠더 불문, '생각'과 '사상'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경찰이 제야의 팔과 목과 다리를 눈으로 훑었다. 교복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보라고, 블라우스의 반팔을 어깨까지 올려보라고 했다. 상처 하나 없는 것 같은데. 멍 자국이나 긁힌 자국도 안 보이고. 반항한 흔적이 없잖아. (중략) 


학생이 아직 어려서 뭘 모르네. 반항했다는 건 학생 말뿐인데 그것만 믿고 조사를 하고 그러긴 힘들지. 술에 취해서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약물을 쓴 것도 아니고, 사지를 묶인 것도 아니고, 분명한 의식과 자유로운 신체 상태에서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는 건데, 그걸 누가 강제로 그런다고 생각하겠어? 그 남자도 자기가 강제로 한다는 생각은 못 했을 가능성이 커. 어른들은 그런 것을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다고 해. 학생도 들어봤지?


정말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사실 제야와 제가 좀 특별한 관계이긴 했어요. 제가 제야를 학교까지 태워준 적도 많고 제야가 저를 워낙 편하게 생각했고 저도 제야를 많이 아꼈습니다. 제야가 크면서 남녀처럼 그렇게, 그런 식으로도, 네 잘못인 거 아는데 제가 어른 행세하면서 야단치고 그러면 제야가 엇나갈까 봐, 그 나이 때 비뚤어지면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제야는 부끄러워서 거짓말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명예가 있어요. 저랑 관계된 사람이 온갖 공기관이랑 시장 바닥에 다 퍼져 있는데, 이번 일 때문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저는 명예도 잃고 신뢰도, 저한테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부모님은 합의서를 써야 한다고 제야를 설득했다. 합의를 하면 모두 안전해지고 합의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만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중략) 합의서에는 '이후 이 사건에 대해 법적, 금전적,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들어갔다. 고소는 없던 일이 되었다. 



살다 보면 '주객전도'와 '어불성설'을 겪는다. 물이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것 같은 감정마저도.




기억이 '고통'으로 다가오면 '감정'을 어찌할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이겠다. 

자신을 범하고 헤쳐버린 '상대'로 하여금, 악감정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절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지만, 그런 면에서 '제야'는 나보다 훨씬 더 어른 일지 모른다. 아니면... 절대 이해되지 않은 그 상황에서 탈피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반대로 어떻게 해서든 '이해'를 구하려는 그녀일지도 모르겠다만. 




기억을 기억으로만 두고 감정을 제거할 수 있을까.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겠지. 나는 그를 이해하고 싶다. 괴로우니까. 내게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 고통스러우니까. 그러지 않을 수 있었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 이해란 뭘까. 알게 된다는 뜻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 그렇다면, 내가 이해하게 된다면, 그다음에도 나란 인간이 남아 있을까. 그를 이해해버린 나를 견딜 수 있을까. 


제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당숙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던 그 순간 눈앞에 제야가 있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했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야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올수록 제야는 또렷해졌다. 있었던 일과 들었던 말과 그 의미까지, 곱씹을수록,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의 여동생인 제니를 지키고도 싶어 했던 그녀. 

소설 속 인물이지만, 그녀가 강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강해지기 위한 첫 번째 행동 강령과 같은 의식으로는 아마도 그녀가 처한 그 삶에서 그녀의 처지를 그럼에도 '긍정' 할 수 있는 용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살아가려면, 살아내려면 우리는 그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헤쳐나가서 한 걸음, 그렇게 나아가려는 용기를... 부디 자기 자신을 자책과 슬픔으로 인해 망가뜨리지도 파괴하지도 않을... 결심을 하는 것. 그것부터가 새로운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늘 그러하듯 '말' 은 '행동' 보다 쉽지만. 




제야는 오랫동안 몰랐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죽거나 죽이는 상상을 많이 했지만 정말 원한 건 아니었다. 폭력도 싫었다. 2008년 7월 14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른들의 망했다는 말에 치를 떨면서도 제야 역시 자기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었다. 더 망가트리려고도 했었다. 망가트리려고 기를 쓸 때마다 느꼈다. 자기는 아직 망하지 않았음을.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내일의 떠오르는 '아침' 도 맞이할 수 있는 걸지 모른다.



그녀는 애를 쓸 것이라고... 했다. 

'다시 애쓸 것'이라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 이 되어서 '그와 같은 사람' 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언한 그녀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고 말았다. 제야를 헤치 고도 버젓이 아기를 앉고 주위 이웃들과 웃으며 지내는 그 평범 보다 조금 더 우세한 세계에서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잘 지내는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 어찌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과 분노, 화가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쩌면 제야로선 당연한 감정. 그러나... 애를 쓸 거라 확언한 그녀라면 분명 제야는 스스로의 바람대로 '강해지고 싶다'라는 그 문장 하나만큼은 지켜낼 테다. 아울러 세상의 모든 '제야'가 어딘가에서 웅크려 지내고 있다면... 



힘껏 말하고 싶다. '너의 잘못이 아니고 네 탓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그 젠더를 타고난 것도, 그 나이의 '사건'을 '당하고'만 것도. 반대로 그녀를 둘러싼 평범을 가장한 채 지극히 악마 같은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고 마는 사람들이야말로 '잘못'이라고. '당숙'이라 했던 '가해자 남자'가 잘못이고, 너의 외침을 무시하고 오히려 네게 '잘못'이라 했던 그 '어른' 들 '때문'이라고. 그러니 너는 잘못이 없다고. 웃을 권리는, 잘 지낼 권리는, 아울러 '쉬운 인생'을 지낼 권리는 그들이 아니라 제야, 당신들이 되어야 마땅하다고도.... 그리고 아울러.



애를 쓰는 사람들은 결국 그 애쓴 만큼.... 행복해져야 마땅하다고. 

그것이 비록 절망적인 애씀일지언정. 당신도 나도, 애를 쓰고 있는 삶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소중한 인생이라고.. 




피어나야 한다. 어둠 속에서라도. 소중한 건 소중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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