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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21. 2017

18. 아버지

아빠....

 누군가와 오랜 시간 함께 있음에도, 모르는 것들은 꽤 많다. 

 가령 가족 같은 구성원들. 사실 한 공간에서 붙어살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물리적으로 나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가족으로 맺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게 요즘인 것 같다. 나에게는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다. 소위 딸바보를 자칭하는 요즘의 '육아 빠'와는 전혀 다른 아빠였었다. 그 시대의 아버진 그랬다.


 최소 34년.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밥벌이'라는 걸 시작하셨을 테니, 아버지의 일터는 아마 근 몇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거의 사장 위기에 처한, 그러나 당시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모 브랜드 가구 회사에 다니셨었다. 그 덕분에 엄마는 괜찮은 제품들을 눈여겨보시다가 스크래치 상품 떨이 세일이던가, 시중 판가보다 꽤 저렴한 가격으로 학생용 책상이나 의자를 선물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물어보는 란을 적어 내야 할 때면, 내의식과 사고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항상 고민이었다 


“엄마. 아빠는 가구 회사에 다니시는데 아빠의 직업은 뭐라고 적어야 해?”
“회사원이지. 그냥 회사원으로 적어서 내”


 가구회사였지만 아버지의 업종은 사실 가구와는 1도의 관련이 없는 '자동차 운전' 일을 하셨다. 그것은 아버지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또 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IMF라는 것이 터졌고, 우리 가족에게도 그 여파는 왔으며, 희망 퇴사를 권고받고 얼마 정도의 퇴직금을 정산받고 나온 그였다.


 그렇게 몸담은 ‘회사’라는 곳의 소속감을 잃고 만 아버지는 전혀 예상 밖의 새로운 곳에서의 운전 일을 다시 시작하셨다. 먹고살기 위해 움직여야 했던 그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부두' 그것은 그 이후 약 10년 동안 아버지의 땀과 회한, 눈물과 웃음, 피로와 고단함 등 모든 희로애락과 함께 한 또 다른 업의 현장이었다.


담배가 아빠의 모든 걸 인정해 주는 유일한 '가족'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해한다. 그래서 미안하다..

 

아버지는 부두에서 지게차 운전을 시작하셨다. 

 인천항에는 수출입되는 갖가지 자재들을 실은 선박이 들어온다. 아버지는 들어온 그 선박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물품을 지게차를 통해 항구 밖 육지로 이동해 내리는 작업을 행하셨다.


새로운 10년 

 그의 새로운 삶의 터전은, 생각 외로 거칠었고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아버지는 버티고 또 버텨내셨다. 그렇게 보였다. 최소한 내 눈에는.


 퇴직금을 다 털고도 모자라는 돈을 있는 대로 다 긁어서 구매한 몇 천 만원 수준인 고가의 운반 지게차였다. 퇴직금을 다 털어내어 장만하시고 나니 그 막중함은 오죽했으랴 싶다. 일반 자동차와는 또 다른 관리비용이 많이 드는 탓에, 기름값 포함하여 이것저것 관리용 부대 경비를 제외하고 난 순수 월급은 일반 직장인 수준보다 약간을 넘는 수준이라고 하셨다. 그것도 전제 조건은 소위 '오더'라는 것을 한 달에 더 많이 받아야 하고, 그 '오더'라는 것을 보부상과 같은 중간 업체에게 받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줄'을 서야 했고, 중개인에게 잘 보여야 하는 나름의 피곤한 '사람 영업력'도 갖추어야 하셨다. 운전만 해서는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게다.


 대한민국 4인 가족이 먹고살만한 수준의 괜찮은 수준의 월급을 집에 꼬박꼬박 가져다 주기 위해서, 아버지는 밤낮 가리지 않고 오더를 받아내고 일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직장인은 사표를 쓰지 않는 이상 예견된 '출근'이 내일이라는 시간에도 정해져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더'를 받지 못하면 그 날 하루 일을 할 수 없는 '일용직'의 삶을 살고 계셨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 안의 공간이, 아버지에겐 또 다른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비좁은 곳에서 그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셨을지.. 


그놈의 오더 

 배가 못 들어와서 오더를 못 준다는 소식을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상하게 시무룩해하시며 소파와 한 몸이 되어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혹은 불시에 들어오는 오더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무실에서 죽치고 앉아서 밤낮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시간은 남들과 달리 거꾸로 가고 있었다. 주야간을 그렇게 full 근무를 뛰고 난 이후면, 부두에서 지내는 날이 부지기수였기에 며칠 후에나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라도 있으면, 그 날은 바로 녹초가 되어 씻고 잠을 자기 바쁜 일상이었다. 


 그와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는 건 어찌 보면 사치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마음적으로
그때의 아버지는 그래야 살아졌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듯싶다. 아버지의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대학교 3학년에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떠난 터에, 내가 없었던 1년, 아버지에겐 꽤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국으로 귀국하고 1년 만에 들어온 집에 갑자기 떡 하니 디지털 TV 가 블링블링 거실을 빛내고 있었다.


"엄마 이게 뭐야. 이거 광고에 나오는 그 LCD인가 뭔가 하는 그거 아냐? 
"응. 아빠가 너 일본 갔을 때, TV 보는 걸 유난히 더 좋아하셨어서.... 하나 큰 맘먹고 샀지.
아휴 현금으로 사서 그나마 싸게 산거다. 급하게 샀어 정말"
"알아보고 사시면 되지. 비싼 건데... 왜 그렇게 급하게 사셨어"
"그럴 이유가 있어 넌 몰라도 돼..."


 당시 LCD TV 가 한창 나오기 시작할 초창기 무렵이었고, 지금은 100만 원 초반이면 떡을 칠 제품을 엄마는 무려 400만 원 수준의 어마 무시한 가격을 현금박치기로 구매해 버리는 쿨함을 발휘해 버렸던 것이다.


 가계부를 쓰고, 부동산 업을 하면서 알뜰살뜰하게 집 살림을 챙기셨던 엄마가, 냉장고도 아닌 생전 관심도 없어하는 TV 에 그 돈을 투자하시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촉에 캐묻고 캐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당시 아빠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힘들어했었다고 하셨다. 병원까지 입원하는 지경에 이르셨었다고. 


"지 혼자 벌어보고 살겠다고 장학금 받고 지 스스로 유학까지 간 애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애들한텐 알리지 마 "


아마 그랬을 거다. 혼자 모든 걸 책임지는 게 당연한 그때의 아빠 마음이었을 테니깐. 그런 사람이었으니깐.

일본에 있어서 차마 딸에게 그런 현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셨다 했단다. 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이해도 됐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는 그 쓸쓸한 고집. 아마 곁에서 바라보며 그 모든 걸 감당해 내야 했던 엄마 속은 꽤나 끓여왔을 건 덤으로 주어진 것이었을 테고.


  아빠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20년 무사고에 타인의 배려심이 넘치면 넘쳤지, 덜하지는 않은 그런 사람. 사실 그게 때론 서운해서 사춘기가 될 무렵엔 몇 번의 말다툼도 있었었다. 


“아빠는 왜 우리 가족인 엄마나 나나 동생보다는 다른 가족이 우선이야”


 이 말을 달고 살았다. 난 바보 같이, 그때는 몰랐다. 평생 자식새끼 딸린 4인 가족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참고 또 참는 삶을 살았었는지를.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고도, 알 수도 없이 그렇게 타인의 오더에 맞춰져서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고된 삶의 대가가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찾아왔을 때의 그 좌절감과 무기력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아마 그건 세상의 어떤 문장으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그래 아빠가 다 잘못했지. 다 아빠 탓이다.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새끼들이라곤 하나같이 다 지 엄마 편이지"


 내성적인 성격에 힘든 일이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회식에 술이라도 먹게 되면 술기운을 빌려서 비로소 가끔 튀어나오는 그 속내를 이제는 알지만 당시엔 몰랐다. 그래서 몇 번의 말다툼, 그리고 급기야 내가 입사라는 것을 하고 나 또한 회사원이 되기 시작한 막 사회 초년생이었던 때. 머리가 제법 굵어지고 돈도 번답시고 나는 정말 '모지란 딸'년이 되었다.


있는 힘 없는 힘 쥐어 짜내서라도 '사랑'을 주고팠던 그였다는 걸 왜 나는 몰랐을까.... 아버지와 딸이란....


그에게 모질고 세찬 말을 퍼부어 댔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뺨이 얼얼하게 되어 버린 그 밤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타인보다는 같이 마주하며 사는 가족이 우선이 아니겠느냐고 아버지에게 못내 서운함을 분노로 드러내고 만 나의 어리석음. 누구보다도 그 우선인 가족을 위해 살았던 남자에게 나는 감히, 그의 분노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결혼을 한 지금 그때의 아버지를 문득 떠오르면 난 마음이 참 아프다. 

 당시 아빠가 느껴야 했을 삶의 무게. 아빠의 시대는 희생과 돈이 강요되는 철저한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졌기에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그러나 상처는 가득 앉은 '그 시대의 남자' 였던 것임을.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가 돼서야 좀 더 깊이 이해가 된다. 최소한 다른 남자와 살을 맞대고 살면서, '남자'라는 동물이 느껴야 하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고충들. 왠지 이해가 된다.

 

 더욱 직장이라는 곳을 다녀보면서, 남의 밑에서 밥 벌어먹으며 사는 현실의 의무와, 그 안에서 찾아야 하는 역할들의 권리. 왠지 모를 공감과 더불어 이상하리 만치 뱃속이 더부룩하니 체한 듯한 씁쓸함이 밀려온다.


 유산을 할 때마다 입원해 있는 딸에게 먼저 달려온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우는 나를, 곁에서 같이 울먹거리는 그 큰 두 눈으로 또렷이 나를 바라보다가 못내 자리를 뜨고야 말았던 그를 기억한다.


"아빠가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내가 미안해요. 내가... 이 모양이라"
".... 네가 행복하면 돼. 아이 따윈 아빠는 필요 없어. 내 새끼가 살면 됐어"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목의 간지러움을 타고
나는 하염없이 울어야 했다.

그도 행복을 찾고 있었던 나약한 한 인간이었음을.
왜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을까.


 병원에 누워있는 자식새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 착잡했을 까 싶다. 아버지는 그 또래의 그 시대를 그저 묵묵히 견디고 있었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보수적인 먹고살기 바쁜 집안의 장손이었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그래서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이 많았다. 그랬으니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를 좀 더 빨리 이해했다면 과거가 좀 더 행복했을 텐데.


 가족. 

그건 아버지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이유였지만 반면에 떨쳐내버리고 싶은 무거운 존재였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면
그것들의 처음과 끝, 그 곁엔 '가족'이 존재한다.


그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말이다.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왔음이 미리 예견이라도 되는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진심들을 고백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비록 아픈 존재이고 떨쳐내고 싶은 순간이 올 지언정.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말이다.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을 때만큼 처절한 슬픔은 없을 테니깐...
그러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위로가 되는 존재들.
가족이란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한다.
그래야 덜 불행하고 더 행복할 테니깐.


 요즘은 쌍둥이 손주들 보는 재미에 사시는 아버지에게 나는 큰 효도를 한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하고 행복하다. 편안한 느낌의 행복이다. 


오늘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부두에 나가신다고 했다. 나는 안부 문자를 보냈다. 그의 안녕과 뒤늦은 행복을 위한 수줍은 고백을 하고 싶어서.  


차마 보내지 못한 말들은 항상 반복된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아빠, 밥 먹고 운전 항상 조심해요.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건강해. 사랑해...)  


세상의 모든 아버지, 그들도 한 사람임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기원합니다. 오늘의 안녕을. 

아빠 안녕. 오늘도 좋은 하루.
사랑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둥이들의 '아버지'도 안녕한 오늘을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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