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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27. 2019

질문을 멈추지 마라, 깨어있음을 위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눈을 감고 외부의 폭풍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모든 선입견을 판단 중지한 후, 

내면의 가려진 대륙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자.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제로) - 





꽤 공들여 읽었다. 

때론 졸리려 하는 눈을 비벼 가면서, 때론 번뜩이듯 알려 주는 미처 몰랐던 사상들과의 만남에 눈을 말똥말똥 떠가며.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두 권 이후 설마 후속 편이 나올까 싶었는데 (내심 기대했지만) 아뿔싸. '제로'라는 이름으로 '고대' 그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탐험' 수준의 책이 나올 줄이야. 그야말로 '탐험'이었다. 언제나 독서의 시간은 '여행' 같기만 했지만 이번엔 여행 수준이 아니라 감히 온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탐험가의 자세로 미지의 세계로 퐁당 빠져드는 무아지경(이라고 하면 오버이려나)에 이를 법한 정말이지 '탐사' 수준의 것이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채사장, 웨일 북, 2019.12.24.



처음부터 다소 충격적인 문장으로 나는 한 번 더 자극되어 나를 돌이켜 본다. 

내 영혼은 누군가를 파괴하려는 자아가 강한지, 아니면 반대로 파괴당하고 있는 연민을 갈구하는 영혼의 소유자인지를.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 '파잔'의 예를 들었던 구절이 이 기록을 남기는 시간 내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몽둥이를 내려놓아야 하는 '어른' 들 이참 많은 이 시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말이다. 그들이 처음 아기 코끼리를 구타하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가정과 사회는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결국 그는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을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은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연민하곤 한다. 그것이 나를 향한, 최소한과 최대한의 최선 같아서. 파괴당하지 않으려는 예의.. 말이다.



탐험 수준의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서양철학, 기독교로 나뉘어 시간적 구성과 공간적 구성을 기준으로 각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들에 대한 이야기 전반을 관통한다. 책의 전체적인 맥락은 '거대 사상'이란 표현 하에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마치 7개의 대륙을 가로지르듯

1장과 2장은 세계의 실체를 알기 위해 우주를 다루고 있고 (우주의 시작이라든지 지구와 인류의 탄생과 같은) 그 후 인도와 동양 스승들을 다룬 세계관의 앎을 거쳐 (베다, 동아시아의 노자와 공자 등) 서양의 위대한 스승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철학과 기독교)과 만나는 시간을 우리에게 '선물' 한다. 그렇다. 내게 어쩌면 이 책은 올해의 말미에 만난 '선물' 같은 책 같았다. 내가 여태껏 믿고 있던 단편적인 세계관에서 조금은 더 '벗어날' 수 있도록 '질문' 들을 만들어내려는 시야를 확장시켜 주었기에. 아주 조금은. 아주 조금만이라도 넓혀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고 난 이후의 '의미'는 남아 있으리라. 




자신의 세계관이 하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일 수 있음을 의심하는 이와 자신의 세계관이 진리일 것이라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중략) 


자아와 세계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위대한 스승들이 찾아낸 인류의 거대 사상에 닿고자 한다면 판단 중지가 필요하다. 당신은 애지중지하던 당신의 색안경을 잠시 벗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중략)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가보지 않은 산을 오르려는 이는 얼마나 위대한가.




반쪽의 세계만이 유일한 전체라고 믿고 있지 않기를. 

책의 중반부를 힘겹게 넘어가며 (완독에 정말이지 정성을 들여봤기에) 나는 질문을 해 봤다. 내가 믿고 있던 이 세계의 또 다른 너머의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한 엉뚱한 상상, 그러나 그다지 엉뚱하지 않을 법도 싶은 것은 나머지 반쪽의 세계를 이렇게 고전을, 옛 현인들의 사상을 탐험하는 시간을 통해 최소한 곱씹고 따지고 보며 새롭게 해석해서 계속해서 자신 스스로를 깨어있는 자로 살려고 안다면 비로소 '일원론'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이원론'의 세계를 통과해 그 밖으로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 법 싶어서. 그렇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넌지시 고하는 메시지는 '내면의 탐구, 우주와의 합일' 뭐 이런... 조금은 심오하지만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질문일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 한 번쯤은 이런 질문, 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을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지혜를 참고함으로써 오늘 내 안의 혼란을 멈추기 위해. 그들의 지혜를 참고함으로써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났음에도 공통적으로 우리가 다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잊고 있던 빛나는 질문들과 대면하게 했다. 나는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벌거벗은 신체에 던져져서는, 던져진 세계 속에서 때로는 순종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헤매었다. 길은 가려져 있었고,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주저앉히려 했다. 


우리가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려 할 때 가정과 학교와 사회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내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했다. 





삶을 예측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미래의 불안과 과거의 상처들에 아파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나아갈 용기라는 것을 지니고 색안경을 벗어던져내야 한다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자로서 '깨어나려는' 본능을 지키는 자의 태도라고 책이 내게 말을 건네주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어떤 어설픈 다짐을 잠시나마 강하게 다잡아 본다.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진 않지만 반대로 그 사회와 이미 존재하는 기존 세계가 부여한 '도움되지 않으니 쓸데없는 질문은 내면에서 멈춰라'라는 것에도 거부할 줄 아는 시선을 죽이지 말자고. 때론 거스를 줄 알고 반대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같은 것들..이랄까. 왜인지 아이를 기르는 양육자는 더더욱, 그런 용기가 있어야 될 것만 같다. 그래야 조금 더 사고의 범위가 넓어서 인도하는 양육자로서의 도리인 것도 싶어서... 




윤회와 업의 실제 의미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사회 제도 안에서의 착한 행동, 나쁜 행동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 안에서의 행위와 거스름이 삶과 죽음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타인의 시선이 내 행위의 평가 기준이 되는 반면 후자는 자기의 내면 안에서 우주적 서와 자연스러움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아름다워 보이고 말을 잘하고 이것저것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직스럽고 선하고 깊게 아는 사람이 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적인 사람을 성인이라 부른다. 성인은 자기만의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재산이든 지식이든 권한이든, 그는 그것을 내려놓고 다른 이에게 내어놓는다. 노자는 이러한 행위가 역설적이게도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쌓게 되는 행위라 말한다. 



그것은 마치 '자연'과 같다고 생각했다. 내어주는 마음, 공유하는 마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마음, 위대한 변화까지도...




마지막에 이르러 책은 내게 또 다른 질문을 건넨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그리곤 현인들의 사상을 넘은 그 이후에, '우리'들에게 팩 폭음 날려 주신다. 시답잖은 SNS를 끊고 고전에 눈길을 돌리라고. 책을 읽고 질문을 하고 당연한 것들을 당연시하지 않는 태도와 자세를 겸비하라고. 이것들은 마치 내면의 수양을 쌓고 그로 인해 진정한 '내 안의 우주'와의 합일점을 이르게끔 만드는... 해답 같기만 하다. 정답이 없는 것이 삶이겠지만, 반대로 이런 자세들만큼은 완벽한 정답인 것 같다. 오늘의 나에게는. 요즘의 나에게는...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계획을 세워야 한다.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계가 나의 마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를. 

당신이 언젠가 당신의 내면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2020년의 다이어리를 이미 쓰고 있는 나는 

일기장에 이 문장을 필사하면서 잠시 동안 침묵을 행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불안을 잠시 종료하고 다만 입 밖으로 이 말을 따라 읽어 보았다. 두려움이 엄습하는 만큼 반대로 그 두려움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어떤 의지의 발현과도 같이. 



아르주나여, 그대는 두려움 없이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행위에 대한 보상과 영광과 성공에 대한 그 어떤 바람 없이 행동해야 한다. 올바른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기대, 어떠한 성공을 위한 바람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크리슈나가 말하는, 인간이 신으로 향하는 길이다. 


겸허히 의무를 행하고,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오늘의 책무와 의무를 다 하되

기대하는 마음의 범람에서 잠시 침묵을 할 것을,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밝은 미소로 내 앞의 사람에게 사랑으로 친절할 것을, 다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와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나의 지식 그 이후의 '실천'인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도 내면의 빛을 발현하는 이는 그로서 충분히 밝은 세계 안에서 살 것이다. 내면이 어두운 이들보다는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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