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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Dec 26. 2019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면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

살면서 어떻게 행복하기만을 바랄 수 있을까. 

불행이나 불운을 극복해야만 거머쥘 수 있는 행복도 있는 법이다. 

매일 하나씩 꼭 줄어드는 그 카운트다운은 결코 웃어넘길 수 없었다. 


- 당신이 어머니의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 - 





남겨진 시간을 카운팅 할 수 있다면, 아마 오늘을 절대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리라고 

책을 다 덮은 이후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오늘의 내가 못내 어리석어 보였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많이 웃어줄 수 있었던 것을, 호통보다는 잠시간의 침묵 그 이후의 평정심을 되찾아 미소를 한 번 더 건넬 수 있었던 것을, 그이의 이직이 급작스레 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불안보다 반대로 응원을 조금 더 보낼 수 있는 것을. 내 곁의 '사랑' 들을 향한 '나'의 마음가짐을 되돌이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전해준 이 책을 이 시점에 읽은 탓이었을까.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온다.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 우와노 소라, 한스미디어, 2019.12.09.



책의 단편들은  '오늘'이라는 시간의 '유한함'을 선명히 깨닫게 해 준다. 

'어머니와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나 과거 혹은 미래의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횟수', 혹은 '수업에 나갈 수 있는 횟수'라든지, '불행이 찾아올 횟수', '거짓말을 들을 횟수', '놀 수 있는 횟수',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수'와 같은 것들을 소설의 전체 맥락으로 삼고 '카운팅' 하는 시간 속 캐릭터들의 '생각'을 담담히 그려내기에. 




0이 뜻하는 것은? 어머니의 집 밥을 먹을 수 없게 되는 이유는 뭐지? 이윽고 나는 확신에 가까운 하나의 가설에 이르렀다. 이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는, 돌아가신다. 


길어야 3개월입니다.  내 인생도 시한부라는 걸 깨달았다. (중략) 


이것은 앞으로 어머니의 집 밥을 328번 먹으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죽는다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순수하게 '사실' 이 적혀 있을 뿐이다.  나나 어머니가 어떤 처지든 내가 어머니의 집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숫자는 분명 그런 의미일 것이다. 




숫자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생각하지 못 하리라. 

어머니의 집 밥을 그토록 깊이 생각하는 일도. 보통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곁의 존재들에 대하여. 집 밥과 같은 별거 아닌 것은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착각하리라. 주인공에게 어쩌면 카운팅 되는 숫자는 커다란 축복일지 모른다. 어머니도, 집 밥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자 했을 테니까. 비로소 숫자가 눈에 보였기에 그렇게 깨달았을 테니까. 



유한하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산다.... 반대로 기억하고 산다면, 조금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을까.



'가족애'라는 것에 대해 상기해본다. 

히 과거 혹은 미래의 '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횟수의 이야기에서는. 다시 한번 죽은 부모님이 그토록 좋아했던 음식이 뭔지를 비로 소야 알게 되는 주인공의 환경설정을 통해서... 하물며 우리에게 언제나 '죽음'이라는 것은 불현듯 다가올 수 있는 이벤트임을, 우리는 더욱 선명하게 마음에 지니고 오늘을 소중히 해야 할.. 테다. 




책상 구석에는 언제나 웃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다. 당신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온화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 '그날' 이 올 때까지 나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나이를 먹어 열일곱 살에서 서른두 살이 됐지만, 사진 속 두 분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고 대화를 할 수도 없다. 죽음은 이별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더라도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급습한다. 예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인간의 무의식엔 불가능이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불행을 긍정할 수 있는 힘 또한 소위 '마음먹은 대로' 현실로 옮기려 한다면 그 '의지'라든지 '용기'는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고. 문득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생각들이 휙휙 스치고 지나간다. 더욱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들과,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어떤 이유들, 애를 쓴다는 것은 반대로 오늘에 최선을 다하려는 기특한 마음이라는 것, 다만 너무 힘들지 않게, 소중한 것들을 챙기면서 이 자본주의에서 생존해 내야 한다는 어떤 얄팍한 생각들 마저도. 




살면서 어떻게 행복하기만을 바랄 수 있을까. 

불행이나 불운을 극복해야만 거머쥘 수 있는 행복도 있는 법이다. 

매일 하나씩 꼭 줄어드는 그 카운트다운은 결코 웃어넘길 수 없었다. 




손에 잡히지 않은 시간이라, 사랑이라, 마음이라,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대해야 한다는 것. 용기를 내어.




'오늘의 이름이 나였으면 좋겠어'라는 에세이 원고를 써 내려갔던 2년 전의 나를 기억한다. 

참 좋았고 아팠고 슬펐고 이런 '나' 마저도 사랑하려 애썼던 날들의 부족한 이야기들이었다. 제일 마음 깊이 간직했던 키워드가 다름 아닌 '죽음'이었고, 이상한 조합이지만 죽음을 생각하며 쓰다 보니 문장들이 비록 우울하고 어두운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책에게는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애틋한 마음을 앞으로 또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마지막'을 생각하는 마음들의 얄팍한 고백들이었기에. 



마지막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테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을.. 조금 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24시간을 조금 더 사랑하며 지내보려 한다. 

그게 나를 위한, 당신을 위한 최대의 최선 같아서. 




맑게..... 그렇게 흐르고 싶다. 솔직하게 맑게. 스스로에게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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