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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30. 2020

오늘의 '괜찮음'

너의 '괜찮아'라는 목소리 덕분에.... 

삶이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사실을

어째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까 


-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 





오늘의 괜찮음 들을 상기하는 것 

아무리 절망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힘에 겹다 할 지라도, 오늘의 '괜찮음' 들에 대해서 기억하고 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삶이라는 '고행'이라 불리는 것을 대하는 필수 불가결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뜬금없이 이런 숙연한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던 건 사실 트리거가 있었다. 바로 어제 아침, 아이들의 등원 전후 1시간가량의 상황에서 괴물이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하고 좌절했기 때문에. 그 좌절로 인한 여파와 슬픔은 하루 온종일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아이들을 대함에 나약한 마음 상태의 불완전한 '엄마'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아이들은 죄가 없다. 있다면 인내하지 못하는 '어른'의 문제일 테다. 

평일 새벽, 반복되는 아침의 시작,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낼 '준비'라는 것을 하고 있었던 새벽 6시 반이 지나갈 무렵, 웬일인지 늦잠을 자던 둘째가 '찡' 하면서 일어나더니 먼저 일어나서 조용히 소파에 누워있던 첫째에게 괜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무슨 심보가 나셨는지 첫째와 나의 모든 응대에 '불만족' 스러운 감정을 토로하듯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야말로 '싫어'의 연속이 계속되며 일부러 싸움을 걸듯 첫째 아이에게 화풀이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달라해서 쥐어 주었던, 마시던 식혜도 바닥에 흘리며 장난마저 일삼는 둘째와, 늘 양보함이 일상인 첫째도 어지간히 참다가 속상했는지 두 아이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데시벨이 거실 안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괴물이 되는 건 언제나 순식간이다. 

참지 못했던 그 찰나, 순간 핀이 나가 버렸던 걸까. 둘째를 앉았을 때 아이도 이미 어떤 감지를 느꼈던 걸까. 거칠게 저항하는 아이임에도 나는 아주 잠시 동안 현관문 밖에 '버리고' 말았다. 토사물을 치우는 동안 아이의 울음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1분가량 흘렀을까... 첫째는 냉큼 문으로 달려가 둘째를 꺼내려는 다섯 살 나름의 안간힘을 쓰려했지만 이미 잠겨진 문을 아이가 손쉽게 열 재간은 없었다. 아이의 울음이 계속되었고 나는 급기야 소리를 질러버렸다... 



- 그러게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왜!  



짧은 순간의 분노와 동시에 다가오는 현실 자각, 그제야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문을 열고 다시 둘째를 급히 집으로 들여왔을 때, 이미 눈물범벅으로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아이는 결국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급히 마셨던 식혜를 다 게워내버리고 말았다. 무서웠으리라... 그랬을 테니 요 근래 토하지 않았던 그 체기마저 아침부터 얹혔던 걸 테다. 새벽녘 배우자와 경미한 다툼 끝에 심신이 불안했다는 '탓'을 해 버리고 마는 '엄마'라는 몹쓸 존재가 만들어 버린 두려움, 공포, 분리 불안은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아이가 느꼈을 좌절과 고통스러움은, 비록 짧다고 할지언정 그 '감정' 상태를 만들어 버린 건 결국 '나'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고, 그 이후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고 말았다.  




보듬고 쓰다듬어 주기도 모자란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토사물을 치우고 나서 나는 아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꼭 앉아주었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툭하면 같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을 아이와 동시에 머금은 채로 나는 말을 건넸다. 사실 그 말은 아이가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는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마저도 모두 가슴에 훅 파고들어 나는 미칠듯한 죄책감에 다시금 휩쓸렸다. 



- 그러지 말아 줘, 정음아... 부탁이야. 아침엔 엄마랑 조금 더 파이팅해야 하잖아. 잘 해왔잖아. 

-....

- 미안해... 화 내서. 쫒아 내서. 엄마 정말 요새 왜 이런다니. 

- 괜찮아... 엄마.  



'괜찮아'라는 말이 그처럼 세상 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을 것이라고, 

그 목소리로 인해 나는 있는 힘껏 참고 있었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또한 아마도 당분간 이 영유아기를 지나면서 어른의 참지 못해 일그러진 분노는 아이의 '인내' 나 '배려' 아울러 부모를 대하는 결국 '투명한 사랑'에 절대 따라가지도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그 '괜찮아'라는 목소리 덕분에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필 날도 날인 모양인지 아침 등원을 위한 택시는 계속해서 승차 거부 및 잡히질 않았다. 

운전에 영 미숙해서 배우자의 이직 이후의 평일 등 하원은 택시로 시키곤 하는 나는 요 근래 이른 아침 등원은 택시, 하원은 연속되는 승차 거부 및 잡히지 않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버스로 시키곤 했었는데 하필 택시마저 잡히지 않았던 아침엔 급히 유모차를 꺼내어 어린이집을 향하기 시작했다. 약 20kg에 육박하는 폭풍성장 쌍둥이들 두 명을 태운 유모차에 내 몸을 마치 기대듯 밀어 가는 그 길에서 나도 모르게 탄식처럼 흘러나온 혼잣말을....'아 정말 오늘은 힘들다'는 그 말을, 기꺼이 귀가 밝은 첫째가 들었던 걸까... 



- 엄마, 난 괜찮아. 근데 엄마 힘들어? 



다시금 들린 그 '괜찮다'는 말이 다시금 심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애써 부인하며 아이를 안심시키고 그렇게 등원은 '무사히' 성공했으나 다시 출근을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시작한, 비로소 '혼자'가 되어 버리는 순간부터, 결국 나는 끝내 눈물을 터뜨려 보이고 만다. '나' 때문에... 불완전한 '나' 때문에. 



너희들을 작은 손과 발, 모든 것들이 나를 살리곤 하는데.... 난 왜 그걸 잊고 마는지. 



부모라는 권력으로 힘없고 잘못 없는 아이에게 자비 없는 공격을 가해서는 된다는 알면서도.

아이는 원래 말을 잘 '안 듣고' 사실 들을 필요가 없는 그 '시기'에 따라 행동할 뿐인 것을, 그 한순간과 상황을 참지 못한 채 결국 힘 혹은 어떤 권력을 방패 삼아 휘두르고 마는 '어른' 이 나쁘다는 것을. 나는 알면서도 끝끝내 괴물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다. 죄의식과 죄책감에 둘러 쌓인 채로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 무사히 안착했음에도, 노트북을 열어 메일 사서함 확인을 위해 아웃룩을 열고 오늘의 '할 일' 들을 메모해보지만 이성과 냉정으로 무장해봐도 쉬이 집중은 되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오려 했고 아이들의 '괜찮아'라는 목소리가 귀에 맴맴 울렸기에. 



하원 시간이 다가오려 하는 오후, 이미 발은 어린이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죄책감에 고통스러웠던 나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기에 마음은 아이들이 있는 그곳에 이미 한참 전에 가 있었기에. 그들을 향한 어떤 미안함, 죄 죄스러움, 아울러 마치 원죄에 대한 속죄를 구하는 것 무차비한 오전의 누군가의 행태가 계속적으로 떠올려지면서 깊은 용서를 구해야 그나마 앞으로의 내가 살 것만 같아서, 그런 마음 등등은 나를 하루 종일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하는 엄마 만나서 너희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서. 



다행히 아이들은 밝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역시 '아이들인가' 싶었다. 나를 그 어떤 미움 없이 투명하게 사랑하고 환대로 맞이해주는 존재가, 세상에 이 아이들 말고 또 있었던가 싶었을 만큼. 다시금 뭉클해졌지만 울지 않기로 다짐한 나는 눈시울을 붉힌 채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 미안해. 엄마가 오전에 정말 미안해. 잘 지냈어? 

- 괜찮아. 엄마. 

- 아..

- 우리 가다가 아이스크림 사 먹는 거 어떨까 엄마. 



다섯 살이 되면 곧잘 대화가 통한다. 가끔 아이들의 상상력과 문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로. 

특히 '엄마' 라는 단어를 또렷히 말할 때. 그래서 가끔 마음이 더 애달프곤 한다. 어른과도 쉬이 되지 않는 '대화'라는 것을 아이들과 섞고 내가 느끼는 안도, 위로, 희열, 배려, 배움, 그리고 말미에는 사랑..... 나는 하원 유모차를 끌며 목소리임에도 아이들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의 일상을, 너희들의 괜찮음을 그렇게 확인이라고 하고 싶었다는 듯이. 



우리들의 '오늘' 이 무사하기를, 그렇게 서로 사랑함을 잊지 않기로....



의무에 대한 충실성은 때때로 삶의 균열과 틈새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내가 지닌 이 '책무'에 대한 짐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일순간의 좌절, 그로 인한 죄책감, 그 후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여러 오만가지 감정들. 그 안에서도 결국 남는 건 '사랑'이지 싶다. 그렇게 서로의 사랑을 깨닫고 나는 이처럼,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그것들을 글로 엮어 보고 있는 중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와 너희들의 존재가, 이 삶을 후회 없이 살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내는 요 근래의 나는 삶에 대한 최선을 생각하곤 한다. 



오늘의 괜찮음 들을 확인하면서. 

가진 게 많은 복 많은 자라는 것을 다시금 반성하듯 성찰한 채로. 아이들의 건강, 오늘의 끼니, 추위에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의 존재, 현업의 유지, 읽고 쓰는 시간의 붙잡음, 놓지 않고자 애쓰는 '행복'이라는 필사적인 끈... 그러하기에 나는 살면서 일어날 몇 가지의 고통스러움도 잠시의 분노와 슬픔이 있을지언정 (그래선 되도록 안 되겠지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이 모든 시간들은 값진 보물과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이제는 이 모든 것들 마저도 다 괜찮게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은 다가오고 다시 주위는 밝아질거야. 




너희들의 '괜찮아'라는 목소리 덕분에 불완전한 나는 이렇게 '엄마'가 되어 간다는 믿음과 함께. 

시간은 흐르고 다시 이 글을 쓰는 새벽을 지나, 곧 너희들을 맞이할 '오늘' 이 시작될 테다. 오늘은 조금 더 평온하게 하루를 맞이하기를. 그렇게 사랑하겠노라고 나는 한번 더 다짐 섞인 목소리를 스스로 건네본다.



- 너희들이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엄마도 괜찮아. 다 괜찮아...  







이랬던 게 너희들이...그 예쁨을 모르고 그저 키우기 바빴던 그때의 내가...


조금씩 자란다는 걸, 날 살리는 존재라는 걸 이제서야 알고서 사는 중이지 싶다..사랑한다. (feat. 사람 되어감...) 



#미안해 용서해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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