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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an 30. 2020

남의 맥락을 모른다면 차라리 침묵을

판단하지 않는 힘 

개인과 맥락은 둘 다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결과를 설명할 때는 

맥락의 힘을 인식하면 설명이 훨씬 더 정확해질 것이다. 


- 판단하지 않는 힘 - 





한때 회사에서 '도둑년' 이 되어 버린 해프닝 같은 사건이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하면 길고 또 생각하고 싶진 않은 상처로 잔존하나, 어쨌든 상황 상 나를 '가해자'로 몰아넣었던 그 동료는 감정적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나를 다른 사업부로 '이전' 시키도록 나름의 내부 추종자들 및 아는 인맥 인맥을 거쳐 나름의 음모(?)를 꾸몄을 테고 그로 인해 그녀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나는 강요된 사업부 이동을 행했다.  당시의 무고(?) 하고 억울한 심정을 인사 담당자를 통해 몇 번을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훔치지 않았지만 훔쳤다는 주장은 팩트가 되었고 '나'라는 사람의 '맥락' 은 통하지 않았으며 그저 '보이는 팩트'만 남겨졌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퇴사했고 나는 남았다. 나는 떳떳했으니까... 나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떠난 자는 말이 없고 남겨진 자 또한 과거에 지나지 않는 그 상처를 가진 채 다만 소중한 '일터의 교훈' 하나를 품은 채로 지내는 중이다. 일터라는 곳이 일만 하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를 작정하고 헤칠 수 있으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짓밟을 수 있는 곳임을. 



책을 덮고 그 일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여전히 잠시간의 씁쓸함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바로 누군가들의 일순간의 '판단' 이 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로 남는지를. 그 시절, 나는 그 동료를 적잖이 미워했었다. 오죽하면 그 이후의 스트레스들로 인해 두 번째 유산이 '겹치는' 현상과 동시에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내 사정'을 아는 이는 주위에 배우자뿐이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타인은 그렇게 타인의 사정 따위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남을 해치거나 공격하고자 하면 그렇게 또 은근한 관심을 쏟고 마는 건 아닐지. 



판단하지 않는 힘, 대니얼 스탤더, 동녘, 2019.12.30.



 '기본 귀인 오류'라는 관점에서 여러 과학적 학술적 심리적 설문 통계적 근거를 기반으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판단 오류'를 말한다. 이상하게 읽는 내내 속이 시원했던 건 어쩌면 어떤 이상한 '위로'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나를 상처 입혔던 그 사건은 사실은 '판단 오류'로 인한 하나의 해프닝이었다고. 당신들의 판단에 어떤 근거와 맥락이 있는지 한 번 더 나를 설득해 달라고. 그랬을 때 당신의 판단이 완벽히 맞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를. 그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이 말들을 책이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기본 귀인 오류의 핵심은 성격적 특징이나 의도를 추론할 때 맥락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 특히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을 설명할 때는 기본 귀인 오류와 정반대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맥락과 구체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기본 귀인 오류는 분노와 연결되고, 무시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인식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대부분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형태의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이 오류가 연관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 또는 국가가 부정적 결과를 미치거나 부당한 대우라는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그런 행동에 관여한 사람(들) 이 분명 부정적 성격적 특징이나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불변하는 대자연 앞에서 변하는 인간의 판단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 수 있을까.




귀인이라 함은 어떤 행동이나 결과가 '왜' 일어났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원인'에 대해, '나'라는 사람이 아닌 '타인'에 대한 그 원인, 맥락, 사정, 환경 등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시간적, 물리적인 에너지를 '투자' 하면서 그것을 '안다'라고 판단하고 어떤 결정적 판단마저 행할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판단 오류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들이 간혹 생기는 수면 위에 '오르는' 사회 사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에 속하는 우리는 과연 '판단'이라는 걸 제대로 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  




똑같은 행동이라도 우리 자신이 한 행동일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비틀거렸다면 그건 덤벙댔기 때문일까? 누가 밀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례하게 말했다면 그건 우리가 못된 사람이기 때문일까? 상대방이 그런 말을 들을 짓을 했을 수도 있고, 그냥 일진이 사나웠을 수도 있다.


자신의 행동, 즉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을 설명할 때는 기본 귀인 오류와 정반대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맥락과 구체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동일한 행동을 두고 자신과 타인을 이렇듯 다르게 판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여럿 있다. 




사람은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동물이다. 

즉 '이중 잣대, 한 입으로 두말하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기,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위선'이라는 말' 이 적당한 표현으로 책에서 거론되듯이 어떤 행동을 한 행위자 대비 관찰자는 각자의 '편향'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마치 소비의 시대에 광고니 마케팅이니 브랜딩이니 전문 가니 하는 것들의 아무렇지 않게 사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며 교묘히 정치적 경제적 광고와 환경 속에서 우리를 교묘히 '좌지우지' 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 일지도 모를 일이다. 기본 귀인 오류를 범할 때 따르는 결과는 결국 거짓 정보를 믿게 되는 것일 테니까.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여러모로 편향되어 있다. 성공은 자기 공으로 돌리지만, 실패는 다른 사람이나 외적 요인을 탓한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생길 가능성은 과소평가하고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과대평가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의견에 동의할 확률도 과대평가한다. 또한 자신이 잘 다루는 기술들이 그렇지 못한 기술들보다 살아가는 데 더 중요하다고 생가각한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실제보다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세계는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 정의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과 역할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 스스로 느끼는 의무감이나 사회규범으로부터 받는 압력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역할에 맡는 행동뿐이며, 그 행동이 역할에 맞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역할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편향되게 만들거나 심하게 단순화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는 기본 귀인 오류를 범한다. 역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성격적 특징이나 의도가 역할과 일치하는 정도를 과대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잣대를 들이밀 '자격' 이 있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책에서는 기본 귀인 오류를 범하여 잘못된 판단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그 판단의 실질적 갭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의 방법들을 거론한다. 



상황 요인을 알아보기 

판단 속도 줄이기 

인지 부하 줄이기 

자신의 판단에 책임 추적성 부여하기 

논리적 통계적 과학적 추론 훈련하기 

슬픈 상태, 즉 감정 상태가 중립적 상태에 가까워질 때까지 타인의 행동에 대한 중요한 판단은 미뤄두기

행복하기 자기 긍정하기 무거운 감정 덜어내기 

자기가 했던 비슷한 행동 떠올리기 

마음 챙김, 불확실한 것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결국 타인에게는 혹독하고 나에게 관대한 '동물'인 듯도 싶다. 

편견을 줄이면 갈등도 줄이게 된다지만 그 '편견'을 줄이는 게 어디 쉽더냐. 폴리아모리라고, 장애를 가진 이들이라고, 소외계층이라고, 이혼 남녀라고, 돌싱이라고, 범죄 경력이 있다고, 부자라고, 돈이 많다고, 전문 경력이 있다고, 자격증이 많다고,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등등 등등. 그런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을 '판단'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질문만이 계속해서 쇄도하게 된다. 아울러 어떤 반성마저도 느끼고 만다. 나는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 적이 없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내 사적인 감정이입으로 인해 상처를 입혔던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는지를. 



마음에 더 선명히 지녀본다.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 언제나 '나 자신을 알라'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명심할 것, 아울러 리스크(?)가 다가왔을 때의 대책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는 개인적 '무기'를 길러야 함을. '나'라는 개인도 소중하지만 '남'이라는 타인도 소중한 삶이고 존귀한 인간임을 기억하기를. 이런 생각의 소유자들이 조금 더 많을수록 후세대가 좀 더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일단 나부터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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