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Feb 10. 2020

웃음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외부의 자극 없이도 혼자만의 세계를 가꿀 줄 안다.


-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40kg에 육박하는 유모차를 끌고 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을게다. 유모차에 탄 첫째의 목소리를 듣고 또 한 번 자괴감에 빠져버려 울컥 밀려오는 마음을 꾹 참았으니까. 시큰거려서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인 오른쪽 손목 탓을, 운전면허증을 애써 따 두고도 못내 운전하지 못하는 내 존재를, 잡히지 않는 아침의 택시를 마음속으로 원망하며 나는 대답했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나의 목소리를 아이가 부디 알아채지 않기를, 방백처럼 숨겨진 문장은 다름 아닌 '응... 진짜 힘들어, 너무너무 힘들어, 내 팔자에 너희 둘, 못난 성격, 다 너무 힘들어'라는 식의,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형편없는 문장들을 마음에 품고 지낸다는 것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영원히 들키지 않았으면 싶었다. 



- 엄마 힘들어? 

- 아냐. 거의 다 왔어 어린이집.. 추우면 말해. 

- 응 안 추워 



그 순간, 유치하고도 말도 안 되는 사념들이 쉼 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던 건 아마도 '나' 때문이겠다. 2019년 한국 워킹맘 보고서에 따르면 (KB 경영연구소 발간) 그녀들의 직장 존속의 이유는 ‘가계경제 보탬' 이 44.4%로 가장 크며, 그 외 ‘재산 증축’(16.2%), ‘일 하는 것이 나아서’(8.4%), ‘자아발전’(7.6%) 등의 순이라고 한다던데. 나는 그것들을 모두 아우른 경계에 선 채 다만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지키기 위한다는 어설프고 알량한 이 기준으로 인해 오히려 나를 비롯한 여럿을 헤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쓰고 싶지 않은 가면을 쓰면서 산다는 것는 참 무거운 일이지 싶다. 



워킹맘의 95%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사를 고민한다던 기사의 설문 통계치가 떠오르자

어떤 환멸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학 내내 악착같이 읽고 쓰고 공부했던 나는, 평점 4.5점과 장학금 타내려 갖은 애를 썼던 나는, 무일푼으로 떠난 첫 외국 새활 교환학생 시절 빵집에서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독하게 언어 공부를 하려 했던 나는, 회사라는 첫 조직 생활을 유지하려 4시간 출퇴근 시간을 견뎌내려고 노력했었던 나는.... 그 모든 '나'의 시간들은 결혼과 유산, 출산과 영유아기의 양육의 과정을 통과하며 그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부질없다'는 탄식과 함께 차오르는 '무색함'을 느끼고 말았기에. 



아이가 아프거나 자녀 케어가 어려우면 결국 일을 고민하게 되는 건 '나'라는 걸 안다. 

배우자보다 '더' 벌지 못하는 현실 상 내가 포기해야 하는 파이들이 더 커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인정해야 하는 것들과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스스로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들이 적잖다는 것 또한. 퇴사를 고민하는 시기의 대처방법으로는 대부분의 워킹맘이 ‘부모의 도움’으로 극복했다고 하던데. 한편으로 그 부모 도움 조차 없는 분들은 정말이지 오죽할까 싶었다. 



누군가에 비하면 나의 생엔 엄청나게 감사한 인생이라는 걸 

그제야 정신 차리고 다시 생각하려 할 즈음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이들과 조금은 어색한 인사를 하고 (너무 미안해서 이상하게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느껴 버린 아침의 알 수 없는 분노의 감정들은, 분명 있는 자의 치졸한 변명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유모차가 있고, 끌 수 있는 체력과 손이 있고 (늘 후달리는 저질체력이지만) 눈물 콧물 다 빼며 고용불안에 시달리듯 다닌다 해도 한편으로 객관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 이 있는 현실이며, 아울러 SOS 치면 언제든 달려와 주시는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데, 나는 왜 자꾸 옹색한 마음의 '워킹맘' 이 되고 마는가, 부끄러웠지만 다시금 부족한 나와 대면하고 만다. 



혼자가 아닌대 왜 자꾸만 혼자라고 생각되는지....곁의 존재들과 빛이 있다는 것을 왜 자꾸 잊고 마는지..




시간이 어떤 감정들을 모두 없애주지는 않는다. 다만 작아질 뿐. 

아직도 아이들을 돌보다 괴물이 되기 일쑤이며, 유모차를 끌며 어린이집을 밥 먹듯 왕복하는 사계절이 가끔 진절머리나서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개인의 시대라 '나'가 소중하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는 가운데, 소중한 '나'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또 죽이기도 하면서 '남'을 키우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키우는 과정을 반복하는 '부모'라는 이들의 드러나지 않는 고통과 좌절을 고작 '숭고한 희생' 따위로 포장하면 그들의 쓰라림과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잠시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힘이 나기에....

한때 일을 하며 우리 남매를 키웠던 친정엄마의 울음이, 그 절망과 고통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한편으로 그녀의 눈물이 나의 근원적인 슬픔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한편으로 되도록 아이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시간이 결국 조금 더 '나은' 오늘로 인도하게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언젠가 조직생활을 놓쳐버리고 말 지언정

그건 내가 아쉬워서 떠나는 것이지 그 누구의 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사실 모른 척하고 싶은 걸지 모른다. 아쉬움을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은 '나 때문' 만은 아닐 것이라고. 이렇게 내면이 고통스러운 것이 나'만' 도 아닐 것이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오늘따라 좀처럼 삭막한 표정의 여자가 버스 창문 밖으로 비쳐서 나를 바라본다. 

애써 웃으려 했지만 나는 도저히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켰다. 아이들의 사진이 보인다. 그제야 웃는 나를 발견했다. 힘은 없어도 웃음은 웃음이기에 나는 내 눈에 들어온 사진 속 쌍둥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두 사람들을 지키며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지키려 하다 보니 이내 현실에서 힘이 빠져 버릴 데로 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뭐 하나 포기할 줄 모르겠다. 아직도 모르겠다. 웃음을 잃어버렸을 때 조차도. 



그래도 보면 기분 좋은 것들을 떠올린다. 가령 어둠 속에 용감히 피어 있는 꽃들, 꽃 같은 너희 둘.. 꽃 같이 지켜져야 하는 나의 아이들... 


작가의 이전글 하나의 목소리, 두 사람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