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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08. 2017

24. 저녁 시간

오늘 몰입한 '일'을 마친, 나만의 '저녁' 시간 지켜내기

분주한 하루 시작   

  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오늘은 다른 날 보다 조금 더 분주하고 정신 없는 날을 보냈다. 생각해 보니 평소엔 회사 일 하고 저녁이 되면 쌍둥이를 돌보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밀린 집안 일의 거사를 해냈기 때문이었다.


 키친 수납장 속 그릇들과 냉장고 정리, 그리고 아기들의 이유식 반찬과 멸치와 소고기 육수 국물 등 우리 집 남자 셋을 위한 종류별 음식장만으로 오전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반드시 ‘요리’에 꽂혀야 했고 (주말이면 전업주부놀이를 하는 나의 숙명이렷다) 그러고도 싶었기에 나는 기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꽂히면 집중한다.   

 성격 상 내가 꽂히는 것에 집중을 꽤 잘 하는 편이다. 가령 스스로 꽂힌 글쓰기, 혹은 꽂힌 사람, 꽂힌 꿈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꽂힘의 대상을 향한 나의 움직임은 좋게 비유하자면 나이에 비한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솔직함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쓸모 없는 집중과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헛짓거리일 수 있다. 대상을 향한 거침 없이 도발적이고 돌직구인 무대뽀 용기가 어디서 훅 하고 나타나 어느새 나를 움직이기에.


한번 뿜어져 나온 물은 수도꼭지를 잠그기 전까지 계속 흘러 내린다. 내게 꽂힌 건 일단 마음을 닫지 않으면 쉽게 멈추지 않는 것 처럼...!
다행히도 살아온 삶을 잠시 되돌아 보았을 때
실패도 성공도 모두 이런 ‘꽂힘’을 향한
마음의 직진 본능 덕분에,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오늘의 “꽂힘’은 오전부터 시작된 가족들을 향한 반찬만들기와 집안 청소였다.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   

 오늘이라는 하루 24시간 중 1/4을 차지하는 나의 오전 시간 스타트는 감자 조림과 메추리알 장조림으로 시작했다. 엄지 손톱 정도의 크기가 되는 작은 메추리알의 달걀 노른자가 행여라도 껍질과 함께 까지지 않을까 나름 초긴장 상태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까고 있자니 어딘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아기용 짜지 않은 애간장과 조청으로 맛을 낸 나만의 비법 양념장을 넣고, 새벽 댓바람부터 정성스레 끓여둔 멸치 육수 국물과 함께 보글보글 끓여지고 있는 메추리알을 휘휘 저으며 나도 모르게 어느새 블루투스로 틀어놓은 볼빨간 사춘기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인기 많고 잘생긴 넌, 내게만 쌀쌀하게 굴더라


 새삼스러운 나의 모습이 재발견 되니.(풉) 평소같음 괜시리 피곤한 새벽 기상에 퉁퉁 부은 볼로 아기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노래 부를 세도 없었을 텐데. 뭔가 신기했다.     


열일 해 주신 키친께도 감사를...(싹 정리하고 난 이후의 이 뿌듯함이란 하아. 전업주부 만세)


 내 ‘일’에 몰입했기 때문일 지 모르겠다. 

 가족들을 위한 요리도 어찌 보면 내가 가진 또 하나의 '본업’이다. 그리고 그 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몰입해서 움직이는 순간, 몸이 피곤하거나 힘든 감정을 느끼기 보단 오히려 희열이나 기쁨과 같은 것이 뒤따라 온다    

 
그럼에도 사실 오늘 오전은 다른 날보다 더 초집중을 한 탓일까. 오후엔 금세 피로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역마살과 1일 1외출을 하지 않으면 22개월 남자 쌍둥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도저히 감당해 낼 자신이 집에선 없기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아기들을 데리고 도시락을 싸서 공원으로 소풍을 나갔다. (사실 연휴 내내 그랬다는 건 안 비밀. 흑!)     


 잔디밭에서 신나게 놀고 치다꺼리 하고 먹고 그렇게 돌아와서 씻기고 놀리고 재우고. 드디어 아기들이 잠에 드는 순간, 나의 진짜 저녁이 찾아왔다.    


 오늘 같은 일상의 저녁은 파김치가 되어 바로 아기들과 잠들기 마련이었을 텐데, 왜인지 모르게 잠에 쉽게 들 수 없는 밤이 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가즈오 이시구로’ 때문이었다. 

 올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 중에 나오는 문구를 오늘 발견하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려서라는 어이 없는 핑계를 잠시 대 본다.     



 나의 가장 좋은 시간, 저녁   

 쌍둥이를 출산하고 워킹맘이 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나의 삶에서 요즘 가장 좋고 기다려 지는 시간은 단언컨데 바로 ‘저녁’이다. 남아있는 나날의 저 문구가 상당히 공감 갔던 이유는 바로 내 이야기 같아서였다. 공감은 그런 거니깐. 내 말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은 감정이 드는 순간이니깐 말이다.     


 아기를 재우고 온전히 혼자 집중해서 무언가에 꽂힌 것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몇 시간이 바로 내겐 저녁 혹은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보통은 새벽이다. 그 시간의 글쓰기는 최고의 집중이며 그 시간의 폰질은 단연코 꿀맛이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나 또한 가장 기다려지고 설레고 가장 좋은 때는 역시 저녁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고맙지만 숙연해진다.   

 저녁이 가장 좋은 때라는 이 표현에 공감하는 나의 현실이 요즘 들어선 더욱 고맙고도 이상하게 고개 숙여지는 게 사실이다.     


 왜냐면, 누군가에게 저녁은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시작이다. 가령 우리 아버지는 주 야간을 뛰실 때가 많은 일용근로자시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저녁이 고단할 때가 많다. 또한 누군가에게 저녁은 그냥 오전과 오후 같은 무의미한 시간일 수 있다. 가령 취업 준비생이나 수험생, 빚이 있는 사업자, 사랑의 실연으로 잠 못 드는 연인들,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집안의 가장들, 돈 벌어야 먹고 사는 사람들, 학대 받고 고통 받는 이들 등등…. (생각이 잠시 너무 멀리 나가려다 다시 돌아온다)     


 마음의 불안과 고민 때문에 잠 못 드는 저녁은 불편하다.
내일에 대한 부푼 마음이 들지 않은 무미건조한 저녁이면
새로운 무엇을 기다린다는 생각은 쉽지 않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 잿빛 같은 느낌에 하루의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만 같고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여유는 남아 있지 않다. 저녁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말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상황에 처해졌건 최소한, 잠 저녁 시간의 단 몇 분만이라도 오늘의 어떤 ‘일’을 끝냈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하고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괜찮은 세상이라고 생각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만이라도 한 걸음 그렇게..)

 진부한 말이만, 위대한 진리도 되는 사은 바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사랑할 수도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을 수 없다’는 것일 테니깐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의 저녁들  

 내게 저녁은 설레고 두근거리고 기대되는 시간이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면 난 그, 그녀에게 감히 이렇게 말해 드리고 싶다.     


해가 저물고 있는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눈물 날 때가 있다 (지나가는 게 아쉬워서...)
하루의 ‘일’이 어쨌든 끝난 저녁 이예요.
어제와 똑같았거나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비슷한 쳇바퀴에, 설레지 않고 무미 건조해도 말입니다.
일단 우리의 저녁은 ‘쉼’ 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쉼표를 찍어야 다시 새로운 음표를 그려낼 용기도, 믿음도, 새로운 마음도 생길테니깐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우리들의 '저녁'을 지켜내는 겁니다...!     


요즘의 내겐, ‘쉼’이 있는 저녁은 설레는 기다림이다.   

 다른 워킹맘, 워킹 파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가까스로 만들어 낸 귀중한 저녁 개인 시간에 만나는 인연들과의 기억하고 싶은 추억들을 만드는 저녁은 그 자체로 선물이다. 일상을 지내다 갑자기 팟-하고 떠오른 글감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엉덩이를 붙이고 써 내려가는 저녁이나 새벽의 글쓰기도 여간 설레면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저녁. 그런 저녁 시간의 소중한 기억들은
우리들 현재 삶의 원동력이자, 엔진이 되어 줄 수 있다.     


오늘 저녁, 당신께서 지금 한껏 즐기고 또 푹 쉬고 있는 시간이시기를 바라며.. :)


갖은 종류의 육수와 아기 반찬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밀린 집안 대 청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그림같이 정리해놓은 탓에 오늘 저녁은 더욱 뜻깊습니다.

다른 날 보단 더욱 '쉼'이 필요하나, 그럼에도 설레는 이유는, 이제 연휴 1일만 지나면 회사에 가서 '쉴 수'있다는.....(앗 애미의 몹쓸 심보) 것 보단, 내일 한글날 기념 아기들과의 파티 생각 때문일지도요. (풉. 기승전육아 또르르)

9월 말 어떤 저녁 시간 덕분에 저의 10월 저녁도 몹시 기대됩니다. (일단 바라는 장면을 끌어당겨버릴....!)
좋은 기억이 가득한 여러분의 저녁이시기를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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