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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Feb 22. 2020

나의 처음, 너의 전부

퇴사 D-7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다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 Call Me by Your Name  - 





수료증을 받았다. 

며칠 동안의 빡빡한 일정은 공교롭게 퇴사 통보 전후의 일정과 겹쳐 있었다. 일정 상 포기하려 했지만 막상 포기할 수도 없었다.  '공식' 적인 퇴사 날이 가시적인 팩트가 되어버린 이상 더더욱. 나는 그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남'을 위한 일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억눌린 본성이 나를 움직였으리라.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억눌린 욕망은 다시 돌아온다고. '생존' 혹은 '결핍' 아니면 어떤 막연한 '불안' 무슨 마음이 동력이 되었든지 간에 나는 움직여야 했다. 그러고 싶었다. 



이별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던 나였다는 걸 안다. 

'첫사랑' 같은 '첫 회사'와. 퇴사라는 이별준비를 소극적으로 했었다. 적극적인 '이직'이라는 이별이 아닌 일단 첫 회사라는 어떤 묘한 '미련'이라는 걸 없애려, 나는 현업에 문제가 되지 않은 선에서 개인 경쟁력을 쌓으려는 여러 시도를 병행했다. 관심 분야의 공부와 관련 경험을 쌓으려 했다. 출판 인디자인 툴 익히기에서부터, 소셜 마케팅, 디지털 사이언스, O2O 트렌드, 이커머스.... 등등. 이른바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 하에 움직임을 일삼기로 했던 거다. 복직 후 3년, 그렇게 나를 다시 단련시키려 했고, 엉겁결에 다시 책을 출간하는 영광을 두 번이나 얻었고, 계속해서 쌓여나가는 독서는 몇 백 권의 독서량과 서평으로 남겨졌으며, 그로 인한 책이라든지 출판과 관련된 대외 활동을 지속해서 병행했다. 



그랬음에도 나는 '일터'의 책무를 소홀하진 않았다. 

홀을 만들진 않았다. 다만 그것은 조금 '더' 하려는 움직임 또한 하진 않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회사가 좋아하는 인재상인 무엇을 '더' 하려 할수록, 퍼포먼스를 더 내려할수록 상처 받기 일쑤였기에. 도저히 변하지 않는 편협하고 안주하려는듯한 사내 시스템과 기존의 '하던 대로 하는 게 편하다'는 인식들과의 잦은 다툼, 실무에 1도 도움이 되지 않은 더 복잡하게만 만드는 여러 그로테스크한 소통들의 연속, 적잖은 지침들의 반복은 나로 하여금 퍼포먼스를 '더' 내고 싶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쉬이 이 곳을 떠나려 하지도 않았다. 왜..그랬을까...



희미했지만 현재의 길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아직 그 길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좋아했던 걸까... 




아직까지도 마음의 '미련'이라는 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첫사랑' 같아서... 

분명 그랬을 테다.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로 나의 일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을까. 쓴소리를 한다는 건 그만큼의 애정이 있다는 증거였을 테니까... 현업에서 악순환이 보이면 개선을 강구하려는 '트러블메이커' 같은 동료였고 부하직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까탈스럽고 성격 있는 '여직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냉소와 험담의 주인공이 되면서도 묵묵히 일을 하면서도 사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건 어쩌면 지금의 회사를 '첫사랑' 같이 생각했던 어리석은 감정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20대와 30대의 모든 중요한 시절을 함께 통과했던 일터라고 생각했기에. 

스물네 살의 생일날, 일본어 과외를 하고 있던 대학교 4학년 그 시절의 내가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은 바로 '입사 합격 통보 전화'였다. 첫 입사를 시작으로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났고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통과했고, 두 번의 유산이라는 쓴 고통의 시절을 이겨내려 했고, 그 와중에 출간을 병행했고 또 그 이후엔 가임기와 출산을 경험했다. 그리고 복직 후 '워킹맘' 이 시작되었고 나는 즐겁게 이겨내려 분투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분투의 끝에서 못내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던 내가 되려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아버리고 만 것... 



교육 수료증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귀갓길

지하철 안에서 노트북 가방을 꽉 껴안았다. 이상하게 또 눈물이 나려 했다. 참 열심히 살았었는데 다시금 무엇을 위해 이리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뭔가를 하려 하고 움직이려는 '나'인 걸까 싶어서... 왜 되도록 조금 편안해질 무렵에 또 이런 '변화'가 찾아오는 것인지. 괜한 '과거' 생각이 물밀듯이 다가오려 할 즈음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스물다섯, 서른.. 그 시절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물기 어렸던 그 시간이 생각나서... 그랬다. 





그럴 때마다 하는 습관적 행동은 핸드폰을 열어 아이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 

지켜내야 할 최대의 책무이자 역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소명의 본질... 다름 아닌 바로 '엄마' 로서의 '나'를 떠올리기 위해. 괜스레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오려 할 적마다 나는 아이들의 사진을 열어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렇게 이겨내려 하는 나를 다시금 기억해내려고. 




퇴사 D-7일. 내면의 한계에 맞서는 잠재력을 깨닫는 순간은 반대로 무언가에 저항할 때일지도 모른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어' '너는 여기까지야' '너의 기능적 쓸모는 이제 다 소비돼 버렸어' '너는 엄마야' '너는 여자야'라는 식의 내면의 장벽 혹은 냉소적이고 편협한 시선의 타인과 사회의 가부장적 어떤 납득하지 못한 규정에 끝끝내 저항하고자 하는 나를 발견할 때. '나'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제조 중이고, 나의 재능은 아직도 연마 중이라고. 아울러 나의 인연들 또한 늘 새롭게 생성 중이라는 것을 나는 뜨겁게 깨닫는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읽고 쓰며 사유를 기록하고 질문과 분노를 거듭하며 어제의 나와 투쟁의 역사를 반복한다. 이겨내야 성장하듯이... 꺾이고도 다시 일어나듯이. 



바람이 불어도 정면을 보려 했음에... 직시하려는 그 용기가 남아 있기를, 매번 바라며 산다. 




주말을 지내면 마지막 출근이 시작될 테다. 

이별을 목전에 앞둔 어리석고 여린 누군가의 슬픔과 괴로움은 지난 몇십 년의 기쁘고 감사했던 일터의 추억으로 상쇄되기를 바라는 중이다. 아울러 새로운 시작과 변화들에 앞서 오늘의 작은 결과물이 훗날의 커다란 선물, 다시 시작되는 어떤 동력이 되어주기를...



수료증이 담긴 노트북 가방을 앉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이어폰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어떤 영화 속 OST를 듣자, 이 문장들은 이미 깊숙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억해 나의 처음, 너의 전부....' 

나의 첫 직장, 당신과의 첫 만남

모든 것의 '처음' 그리고 그 처음과의 이별... 



우리가 만난 그 공간 그리고 시간..'나의 처음, 당신과의 전부....' 난 그게 못내 아쉬워서, 그것 때문에... 그런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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