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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16. 2017

30. 내 남자의 사랑법

자세히 보니 알겠다. 덜 밉고 더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이야기가 있다. 

 호기심이 사랑으로, 애정이 애증으로 가는 데에 항상 존재하는 것, 바로 서로만의 특별한 이야기이다.

 주는 쪽과 받는 쪽, 사람과 사람의 만남 어디쯤엔 어느새 한 편의 에피소드가 만들어진다. 서로 연결된다는 건, 인연의 이어짐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 '둘'의 이야기와 함께.

 

 가벼운 흥으로 가득한 예능이든, 세상 시리어스 한 사건 사고의 연속인 다큐멘터리이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로맨스 소설이든. 우리들의 오늘은 예능과 다큐, 소설과 영화를 섞어 놓은 그야말로 실화다. 현실이다. 팩트각이다..!


 그중의 제일은 사랑일지니

 사랑. 그 빌어먹을, 혹은 달콤 쌉싸름한, 형태가 어찌 되었든 좌우지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100이면 100가지 모두 제 각각일 테다. 사랑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의 과정을 치는 우리들에게, 아마 사랑이라는 것은 평생 알 수 없는 풀고 싶으나 풀 수 없는, 그럼에도 계속 우리가 찾고 또 쫒고자 하는 삶의 가치인 듯하다.


열쇠는 스스로 찾아야 해. 누가 대신 사랑해 주지 않으니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완성되지 못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변하고 유지되며 깨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사랑’ 일 테니깐. 우리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가 멋대로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의 마음. 그것은 들려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처럼.. 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초코파이는 아닐 테니깐.


 그래서 더욱 우리 둘 사이의 사랑의 이야기는 그 당사자들과 시기 적절히 공유되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지 모르겠다. 그래야 진심이 변모하지 않고 왜곡된 사랑이 덜 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깐..


 초코파이가 아닌 여자와 사느라 꽤나 고군분투한 그와 드디어 (혹은 아직) 꽉 찬 6년을 보냈다. (이게 겨우? 혹은 그렇게나?!)


 이제는 세 남자에게 길들여지고 말아 버린, 나는, 4년이라는 시간을 한 남자와 쭉 지냈다. 그 후 2년은 뱃속의 두 남자와 더불어 이제는 세 명의 남자와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다. 그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나는, 오늘 한 남자의 사랑법을 잠시 되돌아본다.


내 남자의 사랑법 하나, 귀

 그는 열린 귀를 갖고 눈빛을 마주하는데 익숙한 어른이었다. 반면 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거칠고 돌발적인 행동을 과감히 실행에 옮기는 (물리적으로 나이가 그보다 상당히 어린) 어린이와 어른의 중간인 '어른애'였다.


 생각해 보면 우린 그때 당시 각자 열린 입과 귀를 가진 남자와 여자였었다. 문학과 어학에 능통했으나 수포자 (수학포기자)인 소설 쓰는 문과 출신 여, 과학과 컴퓨터를 좋아했으나 문학엔 1도의 관심도 없는 태생적 공돌 님 엔지니어 남자,  이 둘은 '남'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 서로가 모르는 영역에 순식간에 푹 빠져 들기 시작했다. 우린 서로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탐구하기로 작정한 남자 여자로 변하기 시작했고 결국 '님'이 되어 사랑에 빠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빠져드는 데 필요한 건 단 몇 분만으로도 가능하다. 깊이만 있다면...시간은 중요치 않다.


무언가에 빠져드는 건 한 순간이다.

 다만 우리들은 그 순간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가늠하지 못할 뿐. 호기심이 사랑으로 변하는 건 다름 아닌 관심, 그리고 그 관심 충만한 마음이 증폭되어 어떤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다. 우리 둘 사이에도 나름의 이야기와 사건이 존재했고, 그 사건을 겪어 결혼이라는 1차적 사랑의 시나리오에 접어들었다.

 

내 남자의 사랑법 둘, 떠나지 않는 한결같음

 사랑했고 결혼을 했다. 당시엔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내린 나의 결정임을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새삼 너무 서둘렀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후회는 제법 ‘덜’하고 있는 요즘이어서 꽤 다행이다.


 결혼 후 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의 또 하나는 다름 아닌 ‘한결같음’이었다. 그의 한결같음의 느낌과는 반대로 ‘끊김’에 대한 비극적인 내 마음이 강해졌던, 약한 시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는 ‘지속’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장한 채 나를 대했다. 아마 고슴도치가 가시가 엄청난 제 새끼를 피가 철철 나도 감싸 안고서라도, 함께 살아내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이혼... 할까. 하고 싶어..”
“정말 원해?”
“ (모르겠어)……”
"이러려고 하지 않았어. 결혼... 아직은 그럴 수 없어. 우리.."


 둘 사이의 아픔의 깊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심신이 지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지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무튼 그랬다. 아프지 않은 연인 및 부부, 그런 사람 관계가 어디 있겠냐 만은, 우리 두 사람도 그 영역에서 어긋나지 않은 상처를 앉고 사는 평범한 부류(?) 였을지 모른다.


 신혼여행을 제외한 결혼 4년 동안 1년에 한두 번씩 큰 사건 사고들을 치러야 했다. 2번의 유산, 가치관의 충돌, 과다한 업무, 그래야만 했던 일터, 열심히 일한 우리 둘, 대화의 부재, 사그라드는 심신의 여유, 건조해지기 시작한 사랑의 마음 등... 우리 둘을 둘어싼 노출된 환경이 그랬다. 역시 환경은 무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또 다른 숙제다.

그에게 난, 나에게 그는 흑백처리 되었었다. 그땐 그랬다. 혼자 엉켜 있는 나뭇가지를 헤쳐 나가는 부러진 날개의 새 같았다.


 성급히 나도 모르게 쥐도 새도 모르게 치러버린 내 삶의 큰 이벤트에 대한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 쓰고 몹시 무거웠다. 온 심신은 이미 감정싸움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나를 대할 때, 그리고 내가 그를 대할 때, 우리 둘의 한결같음의 깊이는 꽤 달랐던 것 같다. 닫힌 마음의 내 사랑엔 일관성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깐. 오로지 생존, 숨이 턱 막혀서 사랑 따윈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 때문에, 오로지 그저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려 했었던 나였었다.


반면 그는 그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소신껏 그의 기준 하에 사랑에 대한 일관성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았음과 가까이 있지 않다는 것엔 온도 차가 있다.
힘들 때 곁에 없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는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물리적으로, 심적으로 좀 떨어져 있었을 뿐..


 물리적인 떨어짐이 오해를 불렀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가 결정한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멀리서 지켜주되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게 억지로 다가가서 상처를 건드려 주지 않는 것. 혼자 있고 싶다 하니 혼자 있게 만들어 주려 애썼던 그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복잡한 수학 문제에 공식 하나 없이 풀려니 좀처럼 헤매고 풀 수 없는 문제적 여자가 바로 나였으니, 그의 묵묵함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픔의 속내, 그리고 어른스러운 기다림을 그땐 몰랐었다.


 아이를 낳고 이젠 새로운 두 남자와 함께 생을 흘러가 보고 있는 나는, 내 남자의 사랑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 지려 한다. 물질이 아닌 심적인 것, 그것에 이미 길들여져 버리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싱그러운 장미가 소중한 책갈피 속에 빛바래져 갈 지언정, 결국 없어지진 않는다. 버리지만 않으면..


내 남자의 사랑법 셋,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자연스러움

 의식하지 않으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사랑들. 그건 주고받는 이들의 진심이 통할 때 비로소 보이기 마련이다.


 나는 이제 그의 일상 속 작은 행동들을 ‘사랑’이라고 믿게 되었다. 예전에는 몰랐다. 사랑을 상처로 믿었으니깐. 그러나 이제는 제법 알 것도 같다. 삶의 작은 소중함을 볼 수 있게 된 잠들어 있는 혜안이 깨어난 걸까.


상처로 인한 대가는 때론 아픔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시간이 오래 지나니, 이젠 알 것 같다. 아니 알게 되었다.


 

일상 속 사랑을 느낀다.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온전한 오전 2시간 여의 자유시간, 외출 후 아이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약간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서 보여준 석양 지는 선홍빛 하늘색, 우연하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와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 어느새 같이 따라 불렀던 우리 두 사람이 있었다. 지난주 일요일, 결혼 6주년의 평소와 같은 일상은 사실 사랑으로 넘쳐 있었음을, 여전히 어렵지만, 조금씩 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일상의 드러나지 않은 사랑을 이미 우리는 수없이 주고받으며 산다.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삶을 흐르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흐름엔 각자의 사랑법이 존재하겠고 말이다
형태가 어떻든, 주고받음의 관계 속에서 부디 잘 흘러갔으면 좋겠다.

 되도록 그 누구도 덜 다치고 말이다.


우리 스스로 자석이 돼 보는 건 어떨까.

 그의, 그녀가, 우리에게 부리는 그 마법 같은 사랑법으로 어느새 끌어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누군가가 내게 주는 사랑을 받기 이전에, 그 사랑을 얻으려는 마음보다 차라리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사랑의 자석으로 가득 채워 보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랑이 내게 끌려오게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될지도 모를 테니깐..


끌어당기고 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그러니, 내 남자의 사랑법에 맞춰 길들여 지고 있는 나는 아직 '사랑하고 있다'

 

 나도 그러고 싶어 진다. 힘껏 사랑하기로, 오늘을 살기로 결심한 내 마음속 사랑의 자석에, 그가 그녀가, 그리고 지금 바라는 내 인생의 장면들이 곧 끌려 오기를….


 자석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끌려 온다. 점점 더 깊게, 진실되게..

그러다 어느새 이미 끌려 왔음을 믿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남자의 사랑법에 감사함을 느낀다.

여전히 아직도 건재할 그의 마음을,
사랑하는 오늘 나의 마음을, 믿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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