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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r 19. 2020

상처로 얼룩진 삶일지라도

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책을 통해 말하는 것뿐이다. 


- 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 - 





아주 오래전, 작가님의 전작인 '그녀가 말했다'라는 책을 읽었었다. 

큰 위로와 공감을 받았던 그 시절, 나는 청춘이었고 미혼이었고 혼자에서 둘이 되어 가는 과정을 통과해야 했었고, 그때의 나는 꽤나 슬펐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책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꽤 기억이 나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적잖은 아픔을 통과하는 중인 나였어서. 




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 김성원, 김영사, 2020.03.06.



에세이를 읽은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의 글을 계속해서 읽으며 자신의 시간을 돌이켜 볼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스스로 돌봄을 연속해서 해내려는 것.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라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아주 반갑게 그의 신간을 접했을 때 참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그의 숙성된 문장들 속에서 나의 '글'을 반성하게 되니... 조금은 따끔하고 뜨끔하게 읽어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남을 사랑하려면 자신을 먼저 보호해야 한다. 나를 보호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 당신을 괴롭게 만든 상대가 당신에게 불이익을 주지 못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찾아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쌓여 가는 의무, 지키지 못한 계획, 깨어진 약속, 암담한 미래,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불쑥 떠나고 싶어 진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끝없이 달리거나 비행기를 타고 만 킬로미터를 날아도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여행 갈 때 다른 건 다 버리고 갈 수 있어도 이메일 알람과 핸드폰 전원을 끌 수 있어도, 자신은 데리고 가야 한다. 


p.22, 28 




더 깊어진 문장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고백하자면 아직도 사람을 대함에 서툰 나로서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래야 되겠는가 싶어서 좌절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질투'는 가시지 않고 여전히 잔잔하게 내면에 담겨 있고, 누군가가 미워서 눈물지은 밤을 역시나 끊어내지 못하는 삶을 지내는 중이다. 겉으로는 '척'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척'을 지우고 민낯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싶은 순간, 나의 우는 민낯이 때로 가장 소중한 누군가의 불편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애써 웃는다. 그것이 내 사랑의 현재 같아서.  그래서 자꾸만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누군가 들을 찾아 헤매듯. 




질투는 그 사람을 통해 나의 좌절된 꿈을 보기 때문에 생긴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자신을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 질투가 생기면 자신을 더 보살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깨닫게 된다. 다른 누군가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말해, 화가 났을 때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란 상대의 분노를 감싸 안아 온유한 말로 바꿔주는 것이다. 분노는 본래 사랑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품게 되는 감정이다. 그러니 분노에는 분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다. 


p. 33, 44




작가님의 책이 좋은 이유는 어쩌면 잔인하나 단순한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 또한 고통스러워했고 그 시간을 지냈다는 것. 막상 이처럼 잔혹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늘 공감을 하고 위로를 받는 순간은 역설적이나 타인의 고통과 시련과 그 시기를 '같이' 겪으며 살아낸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니겠는가. 문학과 에세이, 철학과 영성과 인문을 탐독하는 이들이라면 아마 공감해 주시지 않을까 싶다. 나의 이런 얄궂은 마음을...




아버지는 피했고 어머니는 울었다. 그해 겨울에는 난방이 안 되는 방에서 추위와 싸우며 지냈다. 아무리 이불을 여러 개 깔고 덮어도 뼛속으로 한기가 스며들어 영혼의 온기까지 빼앗아갔다. 내 마음은 그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려 몇 달 동안 누워만 지냈다. 나에게 구워 먹으라고 만두만 주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이십 대 중반까지 군만두를 먹을 수 없었다. 군만두를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았다. 


프리랜서에게 적금은 사치다.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불안으로 인한 만성 통증과 위장병에 시달렸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평생 공부하는 학생처럼 살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내면을 향한 탐색과 그 도구로서의 공부였다. 가능한 한 평생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만성 불안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작가이지만, 공부하는 사람이 되면 우주의 신비에 접근할 수도 있고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할 수도 있고 세계의 미래를 걱정할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공부하는 삶을 택할 것이다. 


p. 146, 162



어디로 갈지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얄궂지만 또 우리를 강하게 만드니까.



그의 책과 글을 향한 생각도 마음에 든다. 

아니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기에... 한편으로는 글을 쓰는 과제가 내 삶에서도 나를 부추기고 다독이는 과업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겨보기도 한다. 그처럼 아직 '성과' 적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이진 않았지만, 그저 '나의 글' 한 편으로 얼음왕국에 갇힌 누군가에게 가닿아 아주 잠시라도 녹아내렸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삶이 아니겠는가 싶어서... 




직업인으로서 라디오 원고를 쓰고 몇 권의 에세이집을 내면서 살아왔지만 심리적으로 막다른 길에 이르러 심리치료 공부를 하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글을 쓰는 것이 내 인생의 과제라는 것을. 


인생은 시련 없이 진행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존재의 조건 자체가 시련이다. 많은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심리학 공부를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 


글쓰기는 나에게 구원이다. 이 책을 쓰는 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앞으로는 책을 더 행복한 마음으로 쓰게 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그리고 당신도. 당신이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누군가는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글을 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 


p.142, 166, 258 




좀처럼 잘 써지지 않는 샘플 원고들 앞에서 

깜빡이는 커서만을 눈에 담은 채 계속 백스페이스를 누르고 마는 요즘이지만, 어쩐지 이 책을 다 읽은 오늘의 나는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그 감정과 기억과 생각을 고스란히 원고에 잘 정제해서 문장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사뭇 샘솟는다. 그가 말했던 '기적'을 생각하노라면,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삶은 늘 작은 기적들로 채워져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로.. 

오늘의 시간이 내일의 나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느리게 오늘도 읽고 써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문장도 좀 좋아졌음.... 싶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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