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븐 Mar 25. 2020

안녕, 월급, 나의 마약이여  

이전 회사에서 마지막 월급을 받던 날 

나한테도 그런 시절을 되돌려주게.

내가 아직 성숙을 향해 나아가던 시절을. 


- 파우스트, 괴테 - 





25일은 월급날 '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고정월급을 받던 '워킹맘'에서 월급이라는 일터의 달콤한 마약이 단절(?) 된 '경단녀'가 되었다. 애써 10년가량의 쌓아왔던 나름 화려한(?) 각종 사무 문서 관리력을 비롯한 일종의 커리어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집에서 뭐라도 해보려 노력 중이다.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여러 글쓰기를 시도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회사 다닐 때 미처 하지 못했었던, 자격증을 비롯한 경제 공부도 틈틈이 다시.  



재능을 살린다는 얄팍한 핑계를 스스로 대지만 사실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정 내 그림자 노동을 '주로'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감정들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스스로의 최선과 최대의 애씀일지도 모른다. 한가할 수가 없는 환경설정도 한몫 거둔다. 집안일은 끝이 없고 어느새 청소 스킬은 (성격상) 나름 만렙을 찍는 중이며,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에너지 소비를 요하는 무급 노동은 역시 미취학 아동의 돌봄이겠다. 그건 정말이지 끝이 없으니까. 오죽하면 '그림자 노동의 최후'가 탄생했을까... 시간관리 제대로 못 하면 이대로 축 늘어져서 나를 잃을 것만 같은 어떤 서글픔 때문에 여전히 고정월급이 사라진 이 순간이어도 '일'을 하겠다는 어떤 의지가 나를 자꾸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은 돈과 같아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소비되거나 낭비되거나 투자가 된다...시간은....내겐 그랬다...



이런 우스운 경단녀의 의지에 답신을 건네듯

아이들의 등원 준비를 겨우 마치고 나가려는 도중, 핸드폰으로 은행 알림음이 도착했다. 이전 회사의 이름이 보였다. 뭐지 하다가 아- 했다. 25일이라는 날짜와 회사의 이름. 짐작컨대 '월급날'이었다. 며칠간의 미지급된 잔여 근무일 수당과 쓰지 못한 연차 수당의 합이려니 했다. 쩐 단위로 찍힌 그 숫자를 바라보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말 '마지막'을 맞이하는 느낌 때문이었을 거다. 정말 '마지막' 이 오긴 오는구나 라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걸 다시금 절절히 확인하고 만다. 마냥 다닐 줄 알았던, 가끔은 그러고 싶기도 했던, 그러나 다니네 마네 울고불고 지랄하며 다니기도 했었던, 애정과 애증의 일터였으니까...




그 넘치던 충동, 고통스러웠던 행복, 증오의 힘, 사랑의 위력 

내 젊음을 돌려다오 


- 파우스트 - 




아이들을 재우고 가계부 정리를 했다. '월급날' 이면 늘 하는 습관이었기에. 

그리고 읽다만 책을 읽고 필사 노트에 잠시 필사를 하다가, 예전에 적어 둔 것들을 새삼 꺼내 보다 문득 저 문구를 발견하고 잠시 '회사' 생각이 다시 밀려왔다. 문장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넘치던 충동적 성공하고 싶었다는 강한 커리어 열정, 고통스럽지만 월급 모으고 불려 나갔던 그 시절의 소박한 행복들, 관계로 인한 증오의 감정, 일터에서 만난 사람, 내 '사랑'의 위력, 그리고 나의 20대와 30대의 대부분을 바쳐버린 '젊음' 까지도.... 회사에 그 모든 것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내 젊음을 돌려다오'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내 젊음이 거기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 



화분에 물을 주듯 나를 가꿔나갔던 시절은, 사실 일터와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일은...소중하다....어떤 일이든.  




내 젊음이 한 때 거기 있었고, 나는 그 대가였던 '월급'의 마지막 숫자를 보았다. 

마지막은 다른 곳에서의 '시작' 이 다시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수고했다고... 넌 꽤 잘했다고. 넌, 잘 버텼다고.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이자 예의이기에.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된 가계부를 개편함과 동시에  IRP 계좌의 리밸런싱을 시작했다. 

'마법의 연금 굴리기'의 실행플랜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있는 요즘, 그럼에도 틈새를 파고드는 우울함이 나를 여전히 덮치고 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장의 새로운 과업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어 보는 나를 발견하곤 잠시 안도한다. '고정' 월급이 끊긴 이 마당에 앞을 더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태의 느낌이 엄습해오는 순간에도. 나를 돌보고 감싸주는 것,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 여전히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그동안의 '마약'에 인사를 건넸다. 



고마운 이전 회사의 마지막 월급, 그 숫자들에게. 12년 동안 와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찌릿한 서글픔도 조금씩 없어질 거라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고 그 끝에선 더 좋은 시작과 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기에. 이제는 그 믿음을 마약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안녕, 월급. 안녕, 믿음.. (새로운 마약에 반짝이는 불을 키자..) 



#월급  #안녕 

작가의 이전글 [리치해빗 스터디] 슬기로운 경제생활,가계부 모임 오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