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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Apr 23. 2020

쾌락 시대에 뒤처질 용기, 절제

절제의 기술 

절제는 계속해서 쾌락 쳇바퀴를 달리는 행위, 

새로운 쾌락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행동을 멈추는 데 쓰여야 한다.


- 절제의 기술 - 





덴마크에 살았다면 이런 생각을 좀 더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작가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타고 자란 국가에 대한 환경 요인이 적잖게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도 반영이 된다는 것을.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는 개인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을 다른 나라보다 잘 보장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개인이 더 많이 벌기 위해 그야말로 쉼 없이 애를 쓰면서 계속적인 쾌락과 번영,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면서 삶을 소비하진 않는다고...



대한민국만 놓고 보면 그게 가능한가? 자기 계발을 해야 속 편한 시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은 소비사회 유혹의 시대, 광고 마케팅이 줄기차게 범람하며 더 많이 가지도록 끊임없이 부추기는 환경에 노출되었기에 어느새 나의 욕망은 남의 욕망인지 구분이 쉽지 않아진 건 아닐까. 모두가 주식을 해야 하고 부동산 지식을 쌓아야 최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번듯하게 잘 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브랜드 아파트에 되도록 살아야 하며 일터에서 성과를 만들어 내고하다 못해 책 한 권을 읽어도 '아웃풋' 독서를 하느니 마느니... 우리는 이미 그러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물며 나조차도... 책 하나를 읽으면서 뭔가 남기지 않으면 강박을 느끼게 되고 마는 아이러니함은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때로 만들고 말기에. 



절제의 기술, 스벤 브링크만, 다산초당, 2020.04.07.



책을 덮고 속이 무척이나 시원해졌던 이유는, 한편으로 나라는 인간은 철저히 자본주의에 세속 된 

경제적 인간의 단면이 꽤 철저하고 하물며 자기 계발력이 강한 인간으로 살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절망'을 쉽게 또한 느껴버리고 말아 금방 번아웃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역설을 경험하기 때문에, '절제의 기술' 이 말하는 5가지의 것들을 지켜야 비로소 원만한, 보다 괜찮은, 개인으로서도 사회적으로서도 불필요한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정수를 말해주기에. 고마웠고 한편으로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 시대 탓을 그럼에도 해버렸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에 대한 갈증을 유발하며 자원을 고갈하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 지속해서 번영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절제와 자기 통제가 꼭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 통제와 절제란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는 자학이나 기본적인 욕구를 부정하는 엄격한 금욕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자학이나 금욕은 안 되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절제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토대로, 어깨에 놓인 책임을 기꺼이 짊어진 채 최선의 삶을 살아내기 위판 필요조건이다. p.17



마시멜로 실험이 강조한 식의 자기 절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자기 절제라든가 유혹에 저항하는 힘이 절제의 기술을 갈고닦는 데 매우 중요하지만, 그 목적이 단지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공허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절제의 기술은 실존적이며 윤리적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가치와 연결되지 않은 절제는 개인의 눈먼 자기 충족 수단으로 축소되기 쉽다. 순전히 기회주의적이거나 도구적인 자기 계발 도구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p.37



개개인을 존중하고 평균은 종말 되었다고는 하나 말이 그렇지 경쟁은 여전하고 개인 성과를 드러내는 건 더 만연한 건 아닐지.




만성적 스트레스와 현대인의 우울증 증가 그로 인한 번아웃 

이런 현상들과 각종 사회 문제들과의 연관성, 어쩌면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만 은 완벽히 이뤄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절제' 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절제라는 것은 단순히 욕망의 '억제'를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절제는 나를 넘은 우리,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경제적 사회적 자본주의적인 시대 상에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어떤 소유와 만족할 줄 모르는 외적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둔다. 결국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 바라는 먼 훗날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단순하게, 선택의 최소화를 시킬 수 있는 축소된 환경 속에서도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절제 미학일지도 모르겠다. 




소비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는 끝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발판 삼아 굴러간다. 이런 ㅏ회에서 만족은 이제 덕이 아니라 악이다. 사람들은 자기 지위에 일상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불안은 너무나도 친숙한 감정이다. p.149




그러나 여전히 시대는 가진 것에 만족하다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에 처한 현재인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성과주의와 과도한 자기 계발력을 강조하고 때로는 강요하는 듯한 사회의 모순들을 속속들이 겪고 마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심히 강조하고 (물론 교육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 교육 이후의 무언가의 '스코어'를 요구하기도 하지 않는가. 



한편으로 어른들의 사회에서도 어른은 어른에게 성과와 자기 계발력과 끊임없는 평생 교육을 주장하기도 하지 않는가.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고, 최적의 성과를 내야 한다고, 그래야 경제적으로 '효율' 적이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더. 더. 더.... 그것은 '전문' 성을 요하고 '성장' 과도 연관이 된다고 말하는 '환경'에서는, 도통 '절제'를 하고 싶어도 그 절제를 하려는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기도.... 하다. 사실 나조차도 죽을 때까지 공부는, 배움은, 더 잘 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아마도 그 생각이 쉬이 변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더 많이, 더 빨리, 더 효과적으로. 이것이 요즘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경험하고, 소유하며, 성취 해내는 삶이 모두가 꿈꾸는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정말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오늘을 즐긴다. p.12



우리 모두의 결승선은 같다. 바로 죽음이다. 살면서 모든 것을 다 해봐야 한다는 유혹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문화의 본질적 요소이기도하다. 이런 생각에 '저스트 두 잇'이라고 말하는 철학과 죽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라는 명령까지 더해지면 거의 종교처럼 된다. p.93



살면서도 '죽음'을 언제나 마음이 담고 사는 이유는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최후의 발악질이다.




선택지를 줄이고, 진짜 원하는 것 하나만을 바라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단순하게 살라고. 

무엇보다 기쁜 마음으로 뒤처질 줄 알아야 진정 일상을 살아가는 용기는 그렇게 다섯 개의 '절제'를 실천해야 비로소 행복에 가까워지고 보다 단순한 정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섯 개의 것들에 모두 동의한다. 뭐 하나 틀린 말이 없고 한편으로 정말 지켜내 보고도 싶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나는 정말이지 경제적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 걸까. 더 갖고 싶다는 욕심에 소비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반면에 지나친 어떤 면에서의 극한의 절제를 행하면서도 그 절제의 목적은 다른 면에서 '가지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도 살기에 

자꾸만 애를 쓰며 책에서 언급하듯 '쾌락의 쳇바퀴' 속에서 쉬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나이기도 할 테고. 개인의 특성과 의지를 탓하기보다 이는 어쩌면 사회에 만연적으로 침투한 '성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역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회 탓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정말 제대로 '변화' 하고 싶다면. 





경제적 인간관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더 많은 것을 원하며 자신이게 이득이 될 일만 하는 존재다. 이런 인간상과 달리 카너먼의 실험 결과는 우리가 윤리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며, 절제와 관대함이 여전히 윤리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p.107



바다가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단순한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품어버릴 것 같은 '넓음' 때문이다.




일상은 그리 순탄한 시간이 아니다. 일상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은 고해라고 언제나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한편으로 그렇기에 마음을 쓰는 '일상'을 유지함에 '절제'라는 것은 우리가 집단 내 개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진정한 도리와 책무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지켜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집단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 일상이라는 건 책임의 연속 아니겠는가.

그 책임을 다하려면 때로는 욕망의 절제는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그 욕망의 절제가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향한 슬픔이나 고통을 겪을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마음과 에너지를 한껏 쏟아내는 일 - 가령 가족이나 가정을 지켜내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 등 -... 그것은 절대 욕망과 성과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선'을 행하려는 '절제'가 그래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절제란, 내가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더 줄 수 있으려는 용기... 니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이 모토는 상당히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선의 절제를 행하려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소수의 그 '절제'를 아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특권을 행할 수 있는 선의 사람일까를..... 오늘 반성하듯 다시 돌이켜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뭔가를 더 많이 얻으려고, 가지려고

잘 살려고 애쓰는 삶은 한편으로 건강하고 좋은 삶과는 분명 거리가 있을 테니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만 알면 알수록 깨닫게 된다. 무지의 앎이 진정 앎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반성 자각 인지 실천... 그리고 반복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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