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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07. 2020

부분이자 전부였던 것

일과 사랑은... 닮았다. 어떤 면에서는.

무엇을 잃어버리는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겠지요.

기억 위로 세월이 덮이면 때로는 그것이 추억이 될 테니까요.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

그이에게는 '일' 이 그랬고 여전히 일정 부분 그래 보인다. 이상형을 딱히 정해둔 건 아니었지만 첫 끌림이 없는 상대에게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차단시켜버리는 나름 냉정한 편이기도 한지라, 첫인상의 그는 나이가 나보다 상당수 많았고 그래서 당연히 결혼을 한 아저씨인 줄 알았고 생김새도 사실 딱히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피부가 유난히 하애서 파우더를 바르고 다니나 싶었고 스킨 향기가 풍기지 않은 옷도 대충 입고 다니는 미용에 별로 관심은 없는 아저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호기심 어리게 바라봤던 결정적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그의 일을 대하는 태도에 끌렸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섹시했다.... 긴 와이셔츠를 팔뚝 위로 걷어 올린 건 아니었다. (요새 누가 그런 모습에 끌릴까 싶다만) 그냥... 다만 뭐랄까, 회의실에서 아주 우연히 처음 마주한 그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산으로 갈 법한 회의를 부드럽게 타협을 유도하며 절충안을 만들어 내려했다. 회의가 끝났어도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사람들이 다 나간 다음에서야 의자를 정리하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빠진 주된 이유는... 바로 그의 태도였다.



사실 앞모습 보다 당신 일하는 뒷모습이 더 좋았다는건 비밀



처음 보는 타인, 그 어른 남성의 바른 태도

사실 그렇게 '바른' 어른 남자를 생전 처음 봤다. 어쩌면 사회생활이 처음이었던 나에게 그는 본받고 싶은 직장 선배로서 최적의 이상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후 별로였던 그의 생김새가 온통 좋게 느껴졌었다. 안경이 잘 어울리고 목소리와 화법의 톤 앤 매너는 최고였던 남자... 당돌했던 나는 호기심에 무턱대고 모르는 기술 용어를 다름 아닌 그에게 질문했었다. 어쩌면 그게 시작이었던 걸까. (내가... 미쳤지;)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던, 그러나 끝없는 호기심과 관심으로 시작된 어떤 마음...

그는 내게 호의적이었다. 물론 남초 회사의 홍일점 신입 여사원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은 사실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나는 회사에 소문이 날 만큼 강력한 '여전사'를 선배 사수로 두었기에 일정 부분 '연민'을 사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여하튼 그 또한 그런 나를 걱정에서 시작한 걸 지도 모른다. 서로가 처음부터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다만 그저 서로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던 그 시절...



그 시절은 지났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이제는 간혹 너무 없어서 탈이 될 것 같은, 10년 차 현실 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이후 종종 그에게 묻는다. 도대체 나랑 결혼을 했느냐고. 그럴 때마다 그는 반문한다. 나한테 왜 말 걸었냐고. 우리는 웃는다. 그렇게 웃고 지나친다. 애틋한 과거, 다시 돌아오지 않은 그 마음을 서로 각자의 추억과 의미로 조용히 마음에 묻어둔 채...



- 자기, 그때 왜 나한테 잘해줬어?

- 그냥... 그래 주고 싶었어.

- 어리고 예쁘게 보이는 여자애가 말을 거니 마다할 남자가 어딨냐 싶었던 그냥 그런 본성이었을까.

-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그럼 혜원인 왜 나한테 말 걸어줬어?

-.... 당신이 일을 잘했어. 내 보기에 그랬다. 일 하는 그 모습이 좋았나 봐.. 목소리도 좋았고.

- 거봐. 먼저 좋아했네.

- 어린 여자애가 말을 먼저 걸면 다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남자의 근자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지?

- 난 그런 면이 좋았어.

- 뭐?

- 당돌하고 야무지고, 여리게 보이던 신입사원 치고는 할 말 하려고 기 쓰는 모습이..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었고 그냥 그랬어.

-... 그랬군... 지금은?

- 지금은.... 다른 종류의 지랄이 느셨지.

- 괜히 물어봤다. 인정...



변하는 게 사람이고 사랑이라지만...




젊은 시절 회사에 거의 심신을 갈아 넣을 정도로 일만 했었던 그이라고 했었다.

그 세계에서 부분이자 전부였던 그 '일'의 틈새를 비집고 나라는 존재가 끼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고. 젊은 시절 미 주재원 생활을 했던 그는 뭐랄까 약간 생각하는 사고관이 '아메리칸' 스럽기도 했다. 뭐라 표현이 쉽지 않은, 하여튼 한국적인 정서와는 조금은 다른. 그래서 그는 가부장적이 아닐 것이라고 '착각' 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가 꽤 오픈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나를 잘 이해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랬으니 선뜻 결혼도 순식간에 결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이란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환상'과 '착각' 이'현실'에서도 내내 연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쉽게 결정하는 것이리라.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한 때 우리는 서로에게 부분이자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그 부분이자 전부의 대상은 바뀌었다. '서로' 였던 두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낸 '아이들' 이 되어 버렸다. 때로 아쉬울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기준은 달라졌다. 어떤 대화를 나누어도, 기승전'아이들'로 마무리짓는다. 우리 둘만 살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모으고 아끼고 불리는 작업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우리 둘만 살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듯 자신의 마음을 숨기면서 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그이도 동의를 하고 함께 고군분투함을 안다... 일터의 노동을 유지하는 이유, 가사 노동에 되도록 큰 불평(?) 없이 만전을 다하려는 이유, 서로에게 가급적 솔직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이유.... 우리가 반지를 어느순간 끼지 않고 '생활' 을 하는 이유도...




'생활' 함에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나 반지는 끼지 않게 된 시간이 이제는 더 익숙해졌다.



역설적이지만, 사랑을 잃은 대신  '일' 로서 엮인 건실한 또 다른 관계로 발전하는 것만 같다.  

부분이자 전부였던 '일'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이들과 댁 내 화평이라는 하나의 KPI를 달성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MBO를 충분히 list up 하고 그걸 수행하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단체 생활'을 유지하고 좀 더 나은 단체와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메인 구성원(?)인 어른 2인이 서로 최선의 협력을 도모하는 관계....



찐득하고 간지러운 사랑을 논하기에 이 관계는 어딘지 이제는 '일' 이 되어 버린 것만 같지만.

그이의 새벽 출근길의 조용한 분주함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사랑' 남아 있으리라고....

어딘가에는... 분명히...



한 곳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인가... 그럴까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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