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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11. 2020

7년 만에 단발머리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 





싹둑. 

경쾌한 가위질 소리에 잠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던 얇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가볍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30분이 채 되지 않아 뭔가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고 '다 됐어요'라는 미용실 사장님의 목소리에 벗어 놓은 안경을 쓰고 나는 정면에 비치는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봤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조금 우스워 보이는 단발머리를 지닌 한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를 보고 뒤에 있는 여자가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 귀신같던 그 머리 다 쳐내고 나니 보는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잘했네. 잘했어. 

- 잘.. 했어?

- 도통 미용실 갈 생각도 안 하던 애가 웬일이야. 미용실을 다 오자 하고. 

- 머리 감고 말리기 편할 거 같아서... 

- 그래 아주 잘했다니까!  아무튼 내 속이 아주 후련하다. 



조금씩 단순화시키는 요즘. 뭐든 덜어내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귀인 했을까 싶고.. 



지난 주말, 친정어머니의 단골 미용실에 찾아갔다. 

먼저 선뜻 머리카락을 자르겠다 '선언' 한 건 내 쪽이었다. 그간 계속해서 '긴 머리'를 고수하고자 나의 생각에 이런 변화가 생긴 건 사실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겠지만 거기에 일침을 가했던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발언 덕분이었다. 



- 엄마 흑진귀 같아. 아니다 모주귀인가 

- 엄마가 그래 보여?

- 흑진귀다! 엄마 흑진귀~ 




아이들이 가끔 보는 신비아파트라는 애니메이션 속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나타나는 '여성 귀신' 은 아무래도 단발머리가 아니라 길게 늘어뜨린 지저분한 머리를 가지고 나타나곤 했는데 아마도 아이들을 돌보고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아이들은 '나'를 자주 관찰하고 표현하곤 한다. 으례껏 머리를 질끈 묶었다가 잠시 풀러 헤친 모습을 보고서 한 말은, 사실 별 거 아닌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건 왜였을까... 



긴 머리와 이별. 



내내 머리를 기르고 싶었던 건 사실 나의 소박하고 우스운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른 살의 단발머리, 그 이후로 정말 '단발'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짧게 자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사실 묶는 머리를 고수하고 싶었을 만큼, 그냥 긴 머리를 갖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바라는 약간의 이상형 정도랄까... 그랬었는데. 이제는 그 이상형조차 별로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던 '요즘'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아이들의 결정적인 발언 덕분에 '뽐뿌'가 와서 그저 자르고 싶었던 건지. 명확한 이유는 알 턱이 없지만 하여튼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단적인 '성과'가 보이는 변화는 다름 아닌 신체 어딘가를 변화시키는 것... 머리카락을 먼저 건드리기로 한 것이었다. 



단발머리를 본 그이의 반응이 꽤 유쾌하고 긍정적이었다. 


- ㅋㅋㅋ 

- 그렇게 이상해? 

- 어서 와 마틸다.

-.... 졌다. 인정..... 아니 왜 근데 단발머리는 죄다 마틸다냐고. 레옹. 

- ㅋㅋ 덕분에 레옹 됐네. 어쨌든 귀여워. 잘 어울리네. 훨씬 어려 보인다. 



.... 당신 서른 때 나 고등학생이었다.... 



정말 어색했던 7년 만의 단발머리는

이틀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꽤 편하게(?) 느껴졌다. 일단 짧아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생활의 속도감(?) 이 더해졌다. 머리 감는 데 드는 시간과 양적 질적 자원들이 모두 절약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뭔가 그럼에도 허전한 건 왜일지 싶다. 



이상을 접어두고 생활을 택하는 '나'와 마주하자니 

처음엔 다소 거부감이 있었으나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적응을 하고 그 변화에 맞춰 다시 생활을 이어 나간다. 그이는 '마틸다'에 적응이 다 된 건지 계속해서 나에 대한 농담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 계속 보니 마틸다 말고..

- 그럼 또 뭐, 푸들이라도 닮았나. 난 사실 푸들 같아서 첫 모습에 충격이었다

- ㅋㅋㅋ 완전 딱이다. 적절한 표현이었어.

- 에라 ㅋㅋ 멍멍, 자 어때. 완벽하지. 

- ㅋㅋㅋ 근데 꼬리가 없잖아. 

- 많은 걸 바라지 마라. 




한편으로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 반갑기도 했던 건 

기승전'아이' 들 관련된 대화를 유지하다 그 초점과 대상이 '나' 나 '너'로 변하는 것 같았기에... 물론 이것도 한순간 이겠지만. 이상하게 단발머리로 인해 생기게 된 부부간의 유머와 잔정이 묻어나는 생활대화와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족'이라는 생각과 함께. 서로의 사사로운 변화와 풍경에 눈을 마주치고 서로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사소로운 것들, 그것은 사실 상대로부터의 관심과 환대와 호의적인 태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나의 갈색 단발머리를, 그래서 나는 당분간 열심히 사랑해보기로 했다.  

당신이 아이들이 아닌 나로 인해 해맑게 웃는, 기쁜 모습을 실로 아주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화는 이미 끝난 지 오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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