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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May 08. 2020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기 위한 조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부디 나에게 노년이란 상실의 의미이기보다 완성의 의미다.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이상하다는 것 

이상하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평범하지만 또한 이상하기도 하다는 것일까?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질문하자면) 정말 궁금해진다. 왜 작가님이 '이상' 하다는 표현을 썼는지 그 저의에 대해서. 아마 제멋대로 추측을 조금 보태 보자면 '사회'라는 기준과 '보편적'인 '통계' 수치에서 비혼인 자신, 자식이 없는 자신, 독거노인이 되겠다는 자신이 조금은 '이상' 해 보일 수 있는 (어디까지나 그녀를 제외한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비혼을 선택했고 독거노인이 되기를 선택했기에 '자유' 로울 수 있는

그런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꽤 당당하게 완성시켜 나가고 계신 것 같아 보였기에..... 반은 공감하고 반은 공감할 수 없었던 이 에세이가, 그럼에도 나의 '부러움'이라는 밝히고 싶지 않은 '질투' 본능을 잠시 건드려 주신다.. (아.. 들켰;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박서영, 어크로스, 2020.05.12.



아이를 키워보지 않으신 분으로 추정되건대,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이런 '위로'를 본의 아니게 의도치 않으셨을 테지만, 양육을 하는 '부모'의 입장인 누군가가 읽었을 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마는 이런 문장들은 조카를 보면서 느끼셨던 것일까.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그 아이의 뒤 그늘에서 아이의 성장을 지키려는 '부모'의 '애씀'과 실로 엄청난 고통이나 좌절 같은 것은... 솔직히 아직 모르실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씁쓸하게도. 




아이의 탄생에 오직 부모의 의지만 개입했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모든 행불행은 부모의 책임이 된다. 그래서 부모의 미숙함과 세상의 불완전함은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에 자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좋은 부모가 아니라서, 내가 부족한 게 많아서, 내 아이가 덜 행복하거나 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 나에게 와준 것이라면 부모는 한결 씩씩해질 수 있다. 함께 힘을 내볼 수 있다. 아이도 용기를 내줬으니까. 



그러나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먹고 뛰고 구르고 다치기도 하면서 몸이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몸이 다 자란 뒤에는 몸이 아닌 것들도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우라리를 수없이 넘나들며 어떤 것은 허물거나 새로 짓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지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중략)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들이다. 용감하게 알을 깨고 나온 모든 아이들의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아이들은 신기하다... 겪을수록 어른의 어른 같고.



문장이 순수하고 맑아서

한편으로 아들 쌍둥이를 키우는 혹독한 과정을 통과한 (여전히 하는) 나로서는 솔직히 이렇게 순수하고 맑기'만' 한 '아이'를 바라보는 문장에 언제나 이상한 '반감' 이 생기고 만다.  '갓 태어난 아기와의 생활'을 겪어보지 못했던 이들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그 신세계에 대해서. 육아라는 것은, 또한 사람이 사람을 낳아서 기르는 그 가임기 이후의 출산, 그리고 출산 이후의 양육 과정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혹독할 수 있기에. (돈을 주고 외주나 기관에 거의 대부분을 맡겨 버리는 식의 '일정 부분 방관 부모'가 아닌 이상.......)  



나는 어쩌면 이미 찌들어 버린 어른이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건, 이미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동경했다던 그 '문밖의 거리' 나 또한 동경했으나 이미 현실 감각이 너무나도 심하게(?) 체득되어 버린 나로서는.... 글쎄, 굳이 힘든 가시밭길이 보인다면 이제는 피하는 현명함을 택하지 그럼에도 도전! 버튼은... 솔직히 주된 생활적 관심사가 아니고서야... 소설 속에서나 꿈꾸게 되어버렸..... 다 (쓰면서 괜히 울적해지고 마는 건 왜지 싶고) 




자라는 동안 내가 들었던 어른들의 말도 언제나 단언하는 말들이었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어른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고 내내 따듯했지만 지루하고 시시했다. 그 시절 내가 궁금한 것들은 언제나 울타리 너머, 빨간 모자가 끝내 들어가 버린 숲이나 싱클레어가 동경했던 문밖의 거리에 있었다. 



언제 이렇게 나이 들어 버린 건지. 여전히 소녀 같은 마음은 조용히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 다 죽어가나 싶고. 그렇다.



흔히 '꼰대'라고들 하지만 시대가 그렇다고 모든 다 나이 든 기성세대가 '꼰대'는 아닐 것이다. 

'젊 꼰'을 누차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봤기에.... (젊은 꼰대가 더 무상식 가관일 뿐이었고) 한편으로 작가님이 혹시 자신의 비혼의 삶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선 혹은 편견으로 참견하려는 듯한 '꼰대'를 발견하셨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인성'과 '기존 습관'과 '본성'으로 인함인 것이니 혹여라도 모든 '기혼' 들이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를 잠시 혼자서 제멋대로 바라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유자녀 기혼 제도에 들어간 이들은 더군다나 함부로 말을 일삼 지도 않아야 한다는 걸, 넌지시 스스로 자기반성해 보기도 한다. 왜? 결국 '아이' 들을 기르는 부모가 우선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어야 그들을 보고 1차적인 교육이 형성되는 '가정'에서 괜찮은 사람이 탄생될 수 있기에..... 




나는 스스로 고독하게 살기를 선택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조금 외롭게 보내고 있다. 외롭기 때문에 자유롭고 고요하며 느슨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지키고 채워준다. 그러나 동시의 나는 세상과 연결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 속에서 내가 무엇이 되고 어떤 것을 해낼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 읽고 쓴다. 크고 넓은 보폭으로 걸을 힘을 잃지 않으려고 매일 조금씩 꾸준히 집 앞 공원을 걷는다. 



가까운 사람들, 나를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질문은 종종 무례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술자리에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하는 기혼자들의 훈계였다. 타인의 삶을 예단하고 충고하는 일이란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가. 나도 그들과 같은 시대를 통과했다. 기혼자들의 세상에서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들 속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아는 어른 중에는 비혼으로 사는 어른이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는 잘 사는 방법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방법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이 선택에 대해 나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인생은 혼자로 와서  혼자 가는 거다. 그게 삶 아닌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의 조건을 

솔직히 일정 부분 갖추어 보이시는 이 작가님의 내일을 조용히 응원해보고 싶어 졌다. 반대로 유자녀 기혼에 들어가 시간이 흘러 손주 손녀를 보게 된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라면 한편으로는 절대 이상할 수도, 자유로울 수도 없으실지도 모를 일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것들의 반 정도는 일정 부분 포기하고 사는 삶에 익숙한 '어른'으로 살아왔고, 그래서 게으르지 못하고 방만해지지도 못하고 때로는 가족을 위해 필요하다면 누차 세상과 타협하고 산다.... 결국 누군가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래서 말미엔 언제나 이 생각이 남는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모른다'라는 생각, 그래서 겸허한 자세는 평생 죽을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게으른 프리랜서인 나는 늘 의지와 씨름한다. 규칙성은 찾아보기 힘들고, 자주 방만해지며, 쉽게 타협한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습관이 그 사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나중에 독거노인이 될 것이다. 이건 다짐이나 각오가 아니라 사실과 확률에 근거한 추측이다. 독거노인이라는 말이 가진 초라한 비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내 노년의 삶에 대해 사실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다. (중략)  예순이나 일흔쯤 되었을 때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유연한 몸을 가지고 더 부지런히 집안을 돌보고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채소, 그러니까 토마토나 가지, 오이와 당근 따위를 직접 키워 먹고 집 안팎의 아름다운 존재들을 돌보고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나면 돌아와 짤막한 글을 한 편씩 쓰고 지금보다 많은 질문과 답을 알고 그러나 겸혼히 더 많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래서 내 삶에 속한 이들이 함께 나눌 작은 기쁨이 많기를 바란다. 




독신이 많아지기를 바라기도 하셨던 이 분의 문장 속에서 잠시 의문과 반감을 조금은 품어 보았지만

솔직히 한편으로는, 나 또한 육아나 양육에 지쳐서 다 '그만두고 '싶어 지는 순간 '독신'을 꿈꿔 보기도 했었다. 정말 부끄럽지만... 결국 그것은 생각에 불과할 뿐, 한편으로 나는 아이들을 기름으로 인한 찰나의 '기쁨'을 이미 맛보았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앞으로도 긴 고통과 좌절을 겸허히 인내하고 수용할 각오를 그저 지녀볼 뿐이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는 나로서는 이번 생에 그저 마음속에서 상상만 할 뿐....   다만 모진 풍파와 생존과 생계를 '4인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겪어본 읽고 쓰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 같을 뿐... (그럤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된 나의 그 시간에도) 



다 늙었어도 여전히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나' 였으면 좋겠다. 그게 나에겐 '자유로운' 할머니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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