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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4. 2017

33. 공들인다는 것

정성껏 인내하는 시간의 마법  

공들이는 시간들

 좋아하는 동사 중 '공들이다'라는 말을 마음에 품고 사는 요즘이다. 어떤 일을 이루는 데 정성과 노력을 많이 들인다는 말, 어감도 뜻도 이유 없이 그냥 좋다. 따뜻한 감정이 싹튼다.


 차갑고 삭막하고 팍팍한 현실 속 사건 사고들은 여전히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조차 즐비하게 우리를 기다린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감정 싸움들도 여전히 사람이 있는 커뮤니티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래서일까. 그런 우리들의 오늘일지언정 각자의 '공들임' 이 있다면 꽤 견딜 수 있다.


공들인다는 건 정성껏 열망하는 무언가를 향한
기다림으로 무장한 인고의 시간일 테니깐.


공들이는 세 가지

 여전히 남아 있는 생이 많다고 생각 되도, 사실 오늘 밖엔 없다는 절실함으로 살게 된 서른 넷의 나다. 그런 내가 요즘 부쩍 더 공들이는 세 가지는 단순하고 뚜렷하다. 바로 아이, 글, 그리고 마음챙김이다.


아이, 나의 공들임이 객체가 되었을 때

 아이를 하원 시키다 오늘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여전히 마음을 단디 먹지 못하는 초보워킹맘이라는 핑계를 댄다  혹은 꽤 쌀쌀해 지는 오후 6시 15분의, 늘상 유모차를 끄는 그 길을 혼자 땀 뻘뻘 흘리며 걸어 오다가 쳐다본 하늘 위로 그리운 비행기 때문이라며. 아니 이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저무는 하늘 속 누군가의 속눈썹 같은 초승달이,  마치 내가 절대 가지지 못하는 엽서 같아서 라는 핑계를 대 본다. (소녀소녀한 이 여린 감성은 불쑥 참 잘도 찾아와서 견딜 수 없는 요즘이다 하아)


너희 둘을 탄 유모차를 끌고 오다가 엄마는 초승달을 봤어. 어찌나 왈칵 하던지..일하고 또 쓰는 엄마라 미안한 오늘이었다...


 그러나 사실 눈물의 원인은 따로 있었다. 아이를 꽤 일찍 하원 시키러 달려간 어린이집의  퇴근대기 통합반 아가들이 모여있는 곳을 몰래 지켜본 나는, 다소 놀라고 말았으니깐.

 

 아이들은 물론 잘 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을 똥그랗게 만든건, 그 놀고 있는 아이들을 그저 무방비 상태로 놓아둔 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다소 젊어보이는 20대 초반의 선생님 두 분 때문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질 해 댔고 별에 별 상상의 장면이 나를 엄습해 왔다. 그럼에도 꾹 참았다. 아이들을 늦게 데리러 간 일 하는 엄마인 나의 탓을 해 본다. 워킹맘의 24시간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일상의 경험들을 축적하며 체득한 감각 때문일 지 모르겠다.


 여튼 공들이고 애지중지하는 나의 아이 둘이 그나마 학대 받지 않고 무시(?) 당하지 않고 꽤 잘 놀고 있는 그 순간의 장면 만을 마음에 담은 , 쌍둥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귀갓길 내내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정성껏 공들임을 받고 있다고 믿었던 마음이 깨지는 것도 어쩌면 한 순간인걸까. 나의 정성과 그녀 둘의 정성은 다르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아프다.


공들임은 주체와 객체가 중요하다.
정성의 대상은 그래서 항상 나의 것이어야 한다.
간절한 공들임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는 건 '나'일 테니깐...



글, 정성껏 인내하는 나만의 시간

 아이들을 재우고 으례껏 나는 잠시 엄마를 벗고,  쓰는 여자가 된다. 온전히 내가 하염없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쓰는 시간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퇴근 후 하원 길이 눈물 바다였기에, 글을 쓰는 시간이 꽤 고되다. 감정은 여전히 가라 앉지 않고, 차분함 보다는 그저 들쭉날쭉한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지금이라 그런가보다.


시간이 지나면 늙고 낡아지는 이야기지만, 그것들도 전부 '나의 이야기'다. 차곡차곡 이렇게...다시 써 내려가보고 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정성'을 쏟고 싶기 때문이다.
절실하게 그리우면 나의 '정성들임'은 진해질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다 보니, 새로운 세계가 열림을 맛보는 요즘이다. 말이 거창하나 나름의 글쓰기 덕분에 지난 시간들을 다시 돌이키고, 또 퇴고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내게 또 다른 인연이 찾아들어옴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두번째 책 이야기를 곧 할 수 있게 될 것만 같은 설렘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쓰기를 반복한다. 고맙고 소중한, 다시 새롭게 써 나갈 수 있는 내 삶의 '쉼' 같은 공들임.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공들이고 싶은 나만의 연인이다.


마음챙김, 눈을 감고 바라보는 제 3의 세계

 긴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했던 내가 선택했고, 나를 또 찾아와 준 기적같은 책과 이론은 다름아닌 '명상' 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어내렸고, 또 여러 형태로 실천을 해 보기도 했지만, 읽기와 쓰기 만큼 내게 잘 맞는 일상 명상도 없는 듯 하다.


 명상의 이론에서 Mindfulness (마음챙김) 를 알게 된 건 구글의 엔지니어인 '차드 멩 탄'의 책과 고엔카의 '위빳사나' 덕분이었다고 감히 말해본다. 문제의 원인과 객관적인 제 3의 시각에서 나와 내 삶을 바라보는 걸 연습하는 조용한 시간들을 가지려 공들인 명상의 시간들 덕분에, 지금의 쓰고 읽는 삶을 유지하는 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만 쳐다보면 잘 모르지만, 전체를 바라봤을 때 그 부재를 아는 느낌이랄까...


 각자의 공들임, 그 정성 어린 시간들

 사랑하는 사람의 공들임이 나의 것과 흡사할 땐, 왠지 모르게 기쁘다.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애가 느껴져서일 지 모르겠다. 나의 그가 육아라는 공들임을 함께 움직여 주는 그 정성 어린 인고의 시간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오늘이다. 반대로 나의 그는 여전히 뜨뜨미지근한 인정 아닌 배려를 해 줄 뿐, 그 어떤 뜨거운 응원도 해 주진 않고 있지만,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나의 글쓰기라는 간절한 뜨거운 정성들임을 스스로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챙김은 글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나를 되돌아 보게 만드는 침묵의 시간이 주어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젠 하나의 단단한 나만의 근육이 되어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


인내란 '좋은 일이 있을 때 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여전히 마음에서 기억하고 있다..


 공들임에 인고를 겪은 시간의 마법이 존재한다면 난 여전히 기다리겠다.

 그 마법이 눈 앞에 기적처럼 펼쳐지는 오늘이 분명 현실 세계에도 있을 거라고... 현실은 다큐가 아닌 때론 믿지 못할 문학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좀 더 정성껏, 꾸준히, 아파도 견뎌내 보는 거다. 흐르다 보면 그 마법은 곧 현실이 될 지도 모를테니깐.


오늘의 공들임은 치열한 다큐일지언정,
결국 아름다운 내 삶의 문학작품이 될 어느날을 상상한다.

당신의 공들임도 부디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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