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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23. 2017

#3. 사랑에 빠지는 순간

다시 볼 일 없을 거라는 거짓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때로 어리석고 무모하고 폭력적이다.

 사람 동물들의 사랑은 그렇다. 단 한순간에 불과하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 고양이들의 세계와는 미처 다르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나였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본능이라는 진리는 비슷한 걸까. 나이 성별 국적 불문이라면 그건 비슷할 테니깐. 미국 고양이라고 다르지 않을 테니깐.


 사람 세계에선 다른 두 존재의 인간들이 서로가 탐색을 하기 시작하며 이윽고 새로운 세계로 넘나드는 그 시간, 그게 사람 동물들의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이 감히 있다면 고양이 여자인 나를
매우 불량하게 조종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고백할 게 있어요”


 진지한 목소리는 가벼운 목소리에 때론 밀리고 만다.

 중간에 말을 걸어준 그 아르바이트 사람 여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잠깐 주체할 수 없이 쿵쾅대는 빌어먹을 심장을 잠깐 진정시킬 수 있었으니깐.


“주문번호 A-21번이요”
“아… “


 마음은 점점 편해진다. 대화에서 같은 말이 겹쳐지는 순간은 항상 기분이 좋다. 현지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도 이 사람이랑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앞 뒤 논리 1도 없는, 맥락 없는 자신감이 나를 감싼다.


“빵도 시킬래요?”
“괜찮습니다. 아까 많이 먹었어요. 배는 안 고픈데 목이 좀 마를 뿐이어서..”
“아 나도. 사람들 따라 주기만 했지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네.”
“커피 좋아하세요?
“헤라 씨 커피 좋아해요? “
“아…”
“하하. 우리 가끔 말이 겹치네. 네. 커피 좋아합니다. 하루에 한두 잔은 꼭 마시는 편이니깐 좋아하는 편인가?”
“저는.. 커피 못 먹어요”
“아 정말? 몰랐네”
“네.. 흔치 않죠. 커피 못 마시는 여자라, 대신 다른 걸 주로 마시는 편이에요”
“신기하네요. 커피 못 마시는 사람도 있구나”
“못 마시면 사람 아닌가요? (헛…. 고양이 미쳤네. 왜 이 사람만 보면 고양이 본모습이 나오는 건지)


 그를 보면 그랬다.

 그냥 이상하게 나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끊임없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는 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고 픈 첫 번째 사람 동물에 속했다. 그래서였을까.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내 꼬리가 자꾸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간지러운 느낌은 불쑥불쑥 나를 찾아왔다.


“오….. 반항할 줄도 알아요? 요즘 신입사원들 무섭네”
“풉. 정 차장님 그거 아십니까. 지금 좀 편해 보이십니다.”
“아 그런가. 일하는 모습만 보였으니. 아참 오늘 같은 회식은 처음이죠? 프로젝트 회식 같은 거”
“네… 그래서 재밌었습니다”
“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
“네…아 근데 아까 하시려던 말씀 있으신 거 같았는데”
“아… 내가 그랬었나요?”


 사람 동물이 발뺌을 한다. 애써 모른 척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너무 궁금해서 나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고백할 게 있다는 그 말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사람들은 곧잘 내게 말했었다. 고양이는 길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길러지는 동물이라고. 그런데 그들은 모른다. 알려고 들지도 않는 게 사람 동물이다. 그들은 스스로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애초에 인정이라는 감정은, 사람 동물이 가진 심리적 강박으로 변하는 순간, 그들의 삶을 지배하기도 하니깐, 굳이 나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자. 말도 안 통할뿐더러,  우리도 너희들처럼 길이 들여져야 유순해진다는 걸 말이다. 속여볼 생각이다. 이왕이면 오랫동안.


 그도 그랬다. 아니 그래 보였었다.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싶었던 마음을
애써 부정하려 했던 밤 11시의 그와 나는
말없이 앞에 놓인 찻잔 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백할 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하. 헤라씨 너무 로봇 같은걸. 하긴 그게 헤라씨 매력이기도 하니깐”
“에?”
“하하 농담입니다. 다나까체 참 잘 사용해요 하긴 우리 회사가 좀 그런가?
아니 음 유독 헤라씨가 그런 말투를 잘 사용하는 직원임에는 분명하네. 배웠어요?”
“네…. 사실 그 말투를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입사… 했습니다.
그래서 연습 중인데 역시 어색 한가요?헷…”
“네. 어색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접어 두는 걸로 해 주시죠”
“네 사실 접고 싶습니다. 아.. 접고 싶어… 요”
“그래요 그냥 편하게. 좀 가끔은 편해도 좋은 법이니깐. 괜찮지. 그런 것도”
“네… 아 근데 아까 하시려던 말씀이”
“아.. 딴 게 아니고 그게”
“네”
“아… 근데 원래 그렇게 눈이 큰 편이에요? 뭔가 되게 진지하게 쳐다보니깐 더 눈이 커지네”
“아.. 네?”
“아 미안 미안. 내가 자꾸 딴 소리를 하게 되네. 그거 알아요? 헤라씨랑 얘기하고 있음 가끔 내가 딴소리하게 되는 거”
“몰라요”
“아 미안. 거봐 지금도 내가 딴소리하게 되네. 하. 참 헤라 씨 이상한 매력이 있군요.
원래 그런가. 나도 내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말이 많지 않은데 말이죠..”
“네. 알고 있어요. 말 원래 잘 없으시단 거…”
“아니 틀렸습니다. 난 원래 말을 곧잘 하는 편 이예요.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남자 동물들이 원래 말 없는 동물이란 거 알고 있습….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하하 거봐. 재밌어요 헤라 씨. 그래서 내가 자꾸 딴소리도 하게 되고. 편해서 그런가. 뭔가 편안한 친구 같아서."
“친구... 제가 편하세요?”
“불편하진 않아요”
“아… 말 잘하시네요”
“못하지 않습니다.”
“저랑 지금 말장난하시는 거죠?”
“하하 들켰네. 화났어요?”
“아니요. 지금 좀 고양이 화나려고 합니다만, 아 그게 아니라..”
“헤라 씨 말투 매력 있어요. 하하.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고마워요 오랜만이네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하는 게 얼마만인지 하…”
“회사란 곳에서 대화하기 쉽지 않으니깐요… 일도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일이 참 많아요. 자리에 앉을 세가 없네... 정신이 없네 요새….”
“아이도 키우신다고…”
“아… 알고, 있었어요? 뭘 들었죠?”
“들어서 알게 되었어요 우연히….”
“그렇구나. 에이 내가 속이려 해도 실패였겠네 하하 내가 미혼으로 헤라 씨한테 고백하려 했는데.”


 그때 그 말 어디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사실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화의 원인이 뭔지도 모른 채 난 그저 앞에 있던 거의 다 식은 그린티 라테를 한 번에 들이켜 마셨다.  이 사람 남자 동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에. 취기가 올라와서 울렁거리려던 쓰린 속 핑계로 나는 그렇게 최대한 내 화를 감추고 그를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상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죄다 발설해 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깐.


“저 속이 안 좋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늦어서요”


거짓말을 못하는 내 표정이 들켜 버렸던 걸까. 이상하게 눈물이 곧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아… 헤라 씨 화났어요?”
“….. 아닙니다. 이만 가시죠”
“아.. 미안해요. 화났구나”
“아니라니깐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급히 스타벅스를 뛰쳐나와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게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버스가 끊긴 걸 원망하면서. 몇 분이 지났을까. 그때였다. 내 앞에 그림자가 비쳤다. 차 한 대가 섰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헤라 씨. 미안… 데려다 줄게요. 타요."
“술 드셨잖아요. 음주 운전은 안 됩니……다 흑...
“울어요? 왜.... 아니 세상에 어떤 남자가 술 취해서 우는 여자 놔두고 집에 가나”
“신경 쓰지 마세…아?”


그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힘이 빠진 상태에서 급하게 몰아붙이는 힘은, 어쩔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뒷좌석으로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짧은 거리니깐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신고하진 않을 거죠? 음주 운전 아니니 걱정 안 하는 걸로”
“음주 시잖아요… 거짓말쟁이”
“그래요 나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럼 좀 속아주는 걸로 합시다. 집이 어디 예요.


  그렇게 차를 타고 몇 분이 지났까. 밤이라 막히지 않은 탓에 꽤 일찍 도착했다. 12시가 되기 20분 전이었고, 내 심장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저 이제 진짜 가야 해요 (진짜 가야 한다고! 안 그러면 진짜 네가 까무라 친다니깐 이 남자 사람 동물아!)
“알아요. 헤라 씨 화난 거 아니죠?”
“네 저 가보겠습니다 (하아 나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왜 안 떨어지지)
“헤라 씨”
“네..”
“저 고백할 게 있다 했었던 건 진짜예요”
“말씀 자꾸 안 해 주시잖아요”
“이상하게 헤라 씨 보면 말을 아끼게 되다가 딴 소리를 하게 되니깐…. 그런 사람이니깐”
“어렵습니다. 차장님 말씀하시는 거”
“미국으로 갑니다. 조만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네….?”
“주재원으로 가게 될 거 같은데, 아직 위에서 결정만 된 거라 6개월 정도 준비 기간 두고 천천히 가게 될 것 같아요”
“아….. 네 축하… 드립니다..”
“하하 축하할 일인가.. 그건 잘 모르겠고”
“네. 인정받으시단 소리 아닌가요. 제 주변 분들 다들 못 가서 난리시던데. 아.. 죄송.. 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하하. 아니 맞아요. 근데 그래요. 축하받을 일이지. 미국 좋지. 다들 탐내는 자리니깐. 근데… 가기가 싫어지는 요즘이군요”
“네?”
“가기가 싫어 진단 말입니다. 한국에 놓고 가는 게 참 많아서 가기가 싫어져요”
“가족들 다 같이 가시는 거 아니셨나요?”
“일단 나 혼자 가고, 가족... 아... 가족.... 아무튼 더 늦게 올 거 같아요”
“네…”
“헤라 씨랑 좀 더 같이 일하고도 싶었는데 아쉽네요. 뭐, 하긴 아직 시간이 있으니깐? 하… 하.”
“네. 저도 일 많이 배워서… 아직 사실 더 일 배울 것도 남아 있는데 저도 아쉽…습니다”
“아쉽긴 해요?”
“네.. 아쉬워요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도, 20분이 채 남지 않은 이 시간도 너무 아쉬워요. 사람이었음 달라졌을까요 이 아쉬움이)
“그래요. 내가 미국에 곧 가게 될 거라는 건 사실 오늘 결정 났어요. 근데 그거 처음 말하는 사람이 헤라 씨네."
“아…..”
“나름 의미 있는 걸로 해 둡시다 오늘의 고백?”
“나쁘.. 십니다. 왜 제게 그런 말씀 하세요?”
“내가 …. 헤라 씨랑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는 내가 가끔 튀어나와요. 그래서 처음엔 신기했죠.
그러면서 사실 의심했죠. 이 감정은 뭔가 하고.
음… 설명을 못 하겠지만, 아니 굳이 안 하겠지만 아무튼, 그 말 제일 먼저 해 주고 싶었어요. 미안합니다”
“왜 미안하세요?”
“아…”
“저도 그럼 한 마디 해도 될까요?”
“아…?”
 “하…?”
“전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사실 3개 국어가 아니라 4개 국어 꽤 할 줄 아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전….. 12시 전에는 꼭 반드시 집에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 또 전…. 그냥 저도 처음입니다.
이런 말을 이 시간에 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사람은, 남자분은 어쨌든 아빠 이후론 처음이에요.
이런 늦은 시간에는 말이죠. 저도 그러니 처음이니깐…. 서로 비긴 걸로 하시죠”
“말 참 잘하네. 고헤 라”
“좀 친해졌다고 벌써 반말이십니까”
“하하.. 아니. 아니에요. 헤라 씨. 정말 내가 뒤늦게나마 알아서 아쉬운 사람이야 당신 하하..”
“네. 그래도 늦지 않고 안 게 어디십니까..."
“내가 배워야 될 점이 많은 거 같은데 헤라 씨에게?”
“지금 또 저 놀리시는 거죠?”
“아니.. 아니에요. 솔직하고 그냥. 잘 될 거예요 헤라 씨. 앞으로도”
“네... 사실….”
“?”
“사실 저도 아쉽습니다. 모든 게….”
“어떤 게 아쉬워요?”
“지금 그냥 다 아쉬워요. 지나가는 시간도, 그리고 이제 겨우 알게 된 것도. 그럼에도 바뀌는 건 없다는 걸잘 알아요. (더군다나 제가 사람도 아니죠. 이 모든 게 아쉬워요) “
“그래요…”
“네 그래요…”
“다음 주에 출장 갑니다.”
“네… 잘 다녀오세요”
“그래요 다녀와서 봐요 조심해서 들어가고”
“네….(하아 10분 전 이예요. 다행이네요. 안 들켜서)


나는 차 뒷 좌석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꽤 빠른 도보로. 그때였다.


“헤라 씨”
“네?”
“잠깐만”
“…..?”


  예감이 틀리길 바랐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예감은 틀렸을 거라고. 그가  힘껏 나를 안았다. 난생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 동물에게 안긴다는 게 이런 감정 인 걸까?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운 소름과 동시에 눈물을 흘렀다. 알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우는지. 다만 그의 낮은 듯하면서 여린 듯한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웽웽 울릴 뿐이었다.


“잠깐만.... 고소해도 좋습니다. 잠깐만요”
“맞고소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잠깐은…”
“미안….”
“후회하실 겁니다. 아마 오늘을”
“후회할 거 같군요. 아마 오늘을”
“다시 뵐 수 없겠죠”
“다시 볼 일 없을 겁니다”
“저 갈래요. (5분 남았어요……. 당신이 놀랄 거예요)
“… 잘 가요”


나는 뛰었다.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집으로 달려갔다.


자정 12시.

 꼬리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리고 손과 발이 점점 날카롭게 변하고, 입고 있던 스커트와 블라우스는 이미 바닥에 내려앉은 채, 온 데 간데없는 나의 맨 몸은, 이미 하얀 털과 갈색 털의 귀를 쫑긋 내세우고, 어느새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칠 뿐이었다.


  너무 추운 밤이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그의 체온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만 걸까. 졸음이 밀려오면서도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곧 먼 곳으로 떠나갈 거라는 그 이별의 짧은 인사 때문에, 혹은 당장 다음 주면 비행기를 타는 그를 당분간 마주치지 못하는 내일이 아쉬워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답답해져 오는 마음 하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고양이 사람이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또한 그는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내게 보였고, 나는 동조했었다. 뿌리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속으로 외쳤다. 망했다. 모조리 망했다고. 고양이인 내가 감히 쳐다봐선 안될 사랑에 빠졌다고. 그런데 그 사랑은 나만이 아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아니 착각할 수 있게 만드는 현실이 더 비참해졌다. 제대로 망하는 순간이었다.


“뱅 앤 올룹슨….? 아… 음악… 기억하고 있었나... 나쁘네"


 출장지에서 복귀한 그가, 단 한마디의 인사도 없이 그저 나의 책상 위에 놓고 간 이어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퇴근 전,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저주스러웠지만 멈출 순 없었다.


“선물…. 고맙습니다. 저도 보답을 드려야 될 텐데 여전히 바쁘시겠죠”


 답장을 바라지 않고 쓴 나의 메일에 5분이 채 되지도 않아서 답이 왔다. 점점 무서워졌다. 넝쿨에 걸려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이상하게 무서우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의 메일에 답을 하는 나도, 그리고 그도, 우리는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걷는 듯했다. 우리 두 사람의 시작은 그랬고, 내 고양이 생의 남은 몇 년 이기도 했다는 걸 난 그때 알지 못했다.


“오늘 안 바쁩니다. 잠깐 볼까요”


15분이 흘렀을까… 나는 답을 보냈다.


“다시 볼 일 없으시다 한 건 거짓말이었네요 역시. 거짓말쟁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 거짓말에 다시 속아볼 까 합니다. 지난번 가려다가 못 가셨다는 그곳 어떠세요. 회식은 아니지만….”
“봅시다. 거짓말쟁이니깐. 30분 후에 메일 한 통 쓰고 나가죠”
“네….”


 심장이 떨려왔다. 아차 싶었다. 잘못된 행동은 돌이키려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감당해 낼 자신은 사라져 간다. 아니 실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걸 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양이가 아니라 꼬리가 아홉 개는 달려도 모자란 미친 여우인 셈인 걸까.


 현지의 말을 빌리자면 난 분명 그래야 하는데. 피해야 하는데, 이미 그 날 이후 현지의 1시간가량의 퍼부어대는 충고와 걱정은 이미 마음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남아있는 거라곤, 그냥 한번 그와 가까이서 마주 보고 싶다는 그 터무니없는 바람뿐이었다.


 그가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는 그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체크무늬 와이셔츠에 이번에도 여전히 청바지다. 나는 이상하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가 저기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몇 걸음만 걸으면 우리는 마주한다.


 두 번째였다. 처음엔 그가 고백을, 그리고 이번엔 내 차례였다.


둘 사이의 온도는, 고양이인 나로서는 체감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사건은 순식간에 찾아오고 만다.


“저도 고백할 게 있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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