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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05. 2020

측은지심

그래도 미소를 잃진 말아요.

미소마저 잃으면 사랑했던 것조차 부정하게 될 테니까


- 비커밍 제인 -




정원이라고 전혀 말할 없는 공간이지만

집 근처에서 현관까지 보의 걸음을 옮겨야 문으로 들어갈 있는 돌다리 주변엔 무성한 잡초가 엉성하게 뿌리를 내리곤 한다. 시기에 맞춰 정리하지 않으면 그대로 잡초들에게 길이 먹혀 버리고(?) 말지도 모를 일, 그이는 어김없이 주말이면 그런 '바깥'의 사소한 소일거리들을 챙긴다. 물론 육아도 병행한다. 주말의 일과는 비슷하게 흐른다. 메인 집안일은 나의 몫이고 아이 돌봄의 주된 보호자는 그이의 몫이다.



옷을 갈아입는 그와 마주치며 전신을 보고 말았다.

하얀 피부가 나름의 자랑이었지만 그 하얀 피부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건 늘어진 뱃살이었다. 운동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건 이미 몇 년 전부터 짐작했었고 그랬었기에 밥을 꾹꾹 눌러 주지 말라던 그이였지만, 이상하게 집밥을 몇 번 먹지 못하는 일주일의 한 두 번의 식사이기에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리 주는 것이다. 꾹꾹 눌러 담았던 건 사실 밥이 아니라 어떤 마음들이었던 걸지도 모를 테지만.



- 자기, 많이 쪘네.

- 그러니까 밥 조금만 주라니까. 눌러 담지 마시라

- 집에서 몇 번이나 챙겨 먹는다고... 알겠어. 이제 협조하겠다.

- 간헐적 단식을 허하시라

- 수박은 드시라. 그건 수분이다.

- 협조가 안 되는구만 ㅋ 알겠다.



조용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조용함을 지키기 위한 조용하지 못한 분투의 날들이 있다는 걸 안다. 당신의 지금처럼.



육신에서 느낄 수 있는 직관적 본능이 상위에 선 성적 매력은

이미 우리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도 퇴화기를 거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로가 거의 헐벗은 몸(?)을 하고 온종일 집 안을 왔다 갔다 함에도 전혀 부담(?) 없는 시선과 몸을 가진 상대(?)라고 생각되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고. 여하튼, 성적 매력 대신 그 자리에 더 크게 자리한 건 인도애적 동료애로서의 어떤 지지와 응원들, '측은지심'이다.



가엽게 여기는 마음, 그로 인한 나의 어떤 일부분들을 계속 주고 싶은 마음.

함께 살면서도 사실 이런 감정은 흔치 않았었다. 나의 사랑은 충만하지 못했고 이기적이고 '나'만 아는, 그야말로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는 걸,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마냥 좋아야 했던 신혼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던 우리들의 시간을 들춰내 보니, 과거의 나는 굉장히 세속적이었고 속물이었고 상처 주는 발언을 쉽게 잘하곤 했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가장 최측근의 관계들에게 어쩌면 우리는 가장 불편한 감정을 주고받는 건 아닐까... 너무 가까워서, 내가 힘드니까 당신도 힘들어야 한다는 묘한 시기와 질투, 가족이니 손쉽게 대해도 괜찮다는 무례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가장 많은 낮과 밤을 함께 지내는 사이일수록.... 가장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이제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아이를 함께 기르는 '보호자'로서의 우리 두 사람이 되고 나서야

이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비례해가는 느낌이다.. 당신의 고통이나 슬픔을 같이 짊어지고 덜 수만 있다면 함께 덜어내고 싶은 마음... 몇 번의 전생에서 인연을 맺은 (좋든 아니든) 연들이, 다음 생에 부부나 부모 자식의 관계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 생의 영적 채무가 있었던 이들은 현생에서 그 영혼이 깃들어진 육신을 통해, 나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관계들에게 선심과 성의를 쏟아야만 그 채무가 지워지니, 세상에 느껴지는 고통은 모두 의미가 있고, 그 슬픔이나 좌절의 시간들이 내게 다가온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고통은 그저 피하고 싶은 괴로움만이 아니고 어쩌면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일 수 있다는 것을...



착한 사람이 행복하지만도 않은 세상이지만

좀처럼 거짓을 뒤집어쓸 모르는, 선심으로 가득하고 이들은 스스로 상처 받기 일쑤일 테지만, 그런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고, 아울러 엉뚱하지만 나보다 더 착한 사람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나 보단 그이가 더 잘 지내기를, 나보단 아이들이 더 잘 살기를, 나보단 부모님들이 안온한 시간을 보내며, 남은 생들을 채워 나가기를. 그렇게 이상한 마음들이 생기는 요즘이다. '나'가 중요하다 말하는 시대에 역주행하는 느낌이지만. 아무렴 어떨까. 어떤 사랑은 꽃이 피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던데, 현재 나의 사랑은 어쩌면 이런 형태로 꽃이 펴지는 시기를 이제 겨우 맞이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진짜 사랑을 찾아 가는 기분이랄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것 같아...



일시적인 마음이 아닌,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 가득한 '측은지심'이 쉽게 드는 건 아닐 테니까...

그이가 등을 긁어달라 한다. 나는 곧 앉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그의 등 뒤로 가 뭉뚝한 손가락 끝으로 등을 매만지기 시작한다. 7월의 여름밤은 많이 달라졌다. 7년 전의 우리였다면 아마도 서로의 육체에 뜨거웠을테지만, 이제는 비록 뜨겁거나 끌림이 확연히 달아오르는 성적 매력이 충만한 사랑에선 많이 벗어났으나 대신 서로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과 마음으로, 이렇듯 하루들을 채워간다. 서로의 일상 속 분투에 서로가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조용히 가지며...각자의 평화에 큰 이탈 없이 고요하게 잘 흐르고 싶은 그 마음으로. 효자손 대신에 친히 등을 긁어주며 등짝을 한번 확 내리 치며 당신에게 건넸던 나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박장대소를 하던 그 목소리를, 나중에라도 오래 기억하고 싶은 여름밤이다...



- 누구 등짝인지, 참 잘 생겼다.






등짝'도' 잘 생긴 세 사람...사랑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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