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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11. 2020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





동생 내외의 방문이 있던  토요일 오후 4시

손님맞이 도중 내내 바깥으로 나가기를 주창했던 아이들의 성화에 힘입어 그 '손님들'과 헤어진 이후, 아이들을 위해 비눗방울 놀이 키트를 급히 만들었다. 세 사람이 잠시 옥상으로 올라간 틈에 정신없이 집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린 후 케이크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기름진 그릇을 키친타월로 한 번 닦고 다시 2차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손은 그릇을 향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사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숙제 하나를 치러낸 듯했다. 께름칙하게 남겨진 어떤 표정과 문장, 잔상들이 평소의 주말 풀 육아데이에 별책부록처럼 붙어 버린 것 같은 무거움을 등에 진 채로...



93년생의 젊은 그녀는 생기 있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곱게 화장을 한 그녀의 웨이브가 조금 들어간 긴 생머리. 아이들은 '예쁜 누나'가 왔다며 좋아했다. 다과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문득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민낯이 부끄러웠지만 이것은 현재 나의 책무에 대한 최선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요즘은 뭐든 그러려니 하는 습관이 체득된 듯싶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시간이 갈수록 무게감이 덜하기는커녕 배로 늘어나는 어떤 일상의 피로함을 덜어내려는 지극히 개인 정신력에 의지한 최선의 선택...'그러려니'...



누군가에게 적잖은 슬픔과 묘한 모멸감과 분노를 앉긴 채

그럼에도 한 가족이 되려 하는 그들의 선택에 마냥 반갑거나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 마음이었다. 모친의 눈물과 늘어나는 술잔, 울부짖는 문장들 속 쓴 마음을 이미 곁에서 대부분 지켜보고 있었기에. 동생에겐 내내 침묵이었고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나아지기를, 회복되기를, 시간이 모두의 편이기를 바란 채로.



시간.... 그것이 '신' 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한다 했던,  그 말은 언제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나였다.

조심스럽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위트 있으면서도 언중유골의 문장을 고르고 고르다가 결국 이런 문장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아마 젊은 두 사람은, 아직 기혼으로 영입되지 않은 그들이 알아채기란 쉽지 않을 지도 모름에도.... 참던 문장들이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93년생 그녀의 짧고 건조한 단답형 혹은 문장 중간의 침묵은 뭐랄까 나름의 방어로 느껴졌다. 그 또한 '그러려니' 싶어서 나는 나 대로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목소리의 강약에 묘한 빡침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나 이외의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 마냥 축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으니... 솔직히 걱정이 될 뿐이에요.

- 네.

- 한쪽의 수고스러움이나 마음고생을 등진 채 한쪽의 행복만을 좇는 건 그리 건강하지도 못하니... 말이 헛 나가지만 그저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의 불행이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았음 해요. 부모님 완전 안 보고 살 게 아니면 불편함 없이 살아야 할 테니까... 어른들은 태도를 봐요. 겸손이 미덕인 세대에겐 때로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자기 낮춤이 있을지언정, 먼저 '주려고' 하면 그다음에 '받게' 되어 있어요...

-....

- 친정 부모님도 마냥 좋아하시진 않으실 것 같은데.. 힘들어하진 않으세요?

- 아니죠.

-....

- 당연히 반대쪽에서 강하게 나오시니 저희 쪽도 솔직히 하지 말라 하세요. 작용과 반작용처럼.

-... 힘들... 겠네요.

- 네. 안 힘들리 없죠. 그래도 시간은 지나니까 그걸 믿어요.

- 그래요. 안 힘들리 없죠. 누구라도 이런 식이면. 시간이 지나도 해결해 주지 않는 것들도 있죠. 개인의 행복만을 생각한 채로 내내 닫힌 상태라면.

-...



그녀와 나의 눈이 지속해서 마주쳤다. 서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또렷하게.

나를 똑바로 직시하던 그 고운 얼굴에선 이미 처음 웃음기는 가짜인 것 마냥 없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때 동생은 그녀의 턱을 마치 강아지 다루듯 매만지며 마치 노여움을 달래주기 위한 하나의 제스처로 말을 더 하며 지속해서 그녀를 쓰다듬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표정은 다시 동생과의 눈 맞춤으로 인해 조금 풀리는 듯싶었고 그렇게 다시 분위기(?)는 원래로 되돌아오는 듯싶었다. 그들의 모습이, 그녀의 부끄러움도 주저함도 안타까움도 묻어 있지 않은, 명랑하면서도 단호한 화법이, 내내 불편했던 걸까. 동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며 지나가듯 한 마디를 건넸다.



- 애정 표현은 굳이 남 앞에서 들키지 않아도 될 텐데. 앞에서 보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 보니 데이트할 시간 필요할 것 같구나.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야지. 버스 시간 몇 시랬지.



바다가, 석양이 보고 싶을 떈 마음이 뜨거워질 때이다. 어떤 이유로든, 삭히지 못하는 뜨거움이 차오를 때...



문장에 가려진 불편함과 따가움의 노골적 표현은 전달에 실패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이의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동생 내외를 '잘' 보내주고 난 이후, 청소를 하고 이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 아이들의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취침 전 놀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이내 진이 다 빠진 사람 마냥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그이가 말을 건다. 그이는 알아챈 듯싶었다.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 괜찮아?

- 엄마가... 이해됐어. 내가.. 꼰대잖아... 빡치지 않으려고 존나 참았네. 빌어먹을...

- 아냐.... 나도 장모님이 어떤 면에서 불편하셨는지 알 것 같았는데 뭐.

- 나이스였어? 팀원이라면.

- 그다지...  

- 당신이 오죽.....

- 일단 처남이 많이 좋아하는 게 느껴지던데. 무슨 문제겠어.

-... 자신의 상식이 세상의 기준인 젊고 예쁜 여자....'아이' 였어..

- 내 눈엔 세 '아이'만 보이니 걱정 마시라. 그리고 화장 안 한 둥이 어미가 더 예쁘니 걱정 마시라.




생경스러운 그이의 농담에서 묘한 위안을 느끼고 말았다.

같이 산 세월이 그냥 흐르는 건 아닌 듯싶었고, 한편으로 지울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을 씻겨 내려는 듯, 설거지를 하는 동안 같이 먹은 케이크가 묻은 접시만 힘을 주고 닦아낼 뿐이었다. 표정은 지속해서 건조해지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 근육의 작은 움직임들을 통해 나는 내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돌려놓고 싶었던 걸까. 무미건조해지고 싶지 않은 나는 웃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려 했다. 소리를 지르며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는 그들이 눈에 들어온다.



몇 시간 전의 불편했던 공기와 목소리는 조금씩 흐려져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들조차, 그럼에도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우스꽝스럽게도 바라면서...

피곤하고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러려니' 하면서.



흘려 버린 이후, 곁에 남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 남는 것들만이 진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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