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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Sep 25. 2020

혼자의 기억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 바다는 잘 있습니다 中 이별의 원심력 -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어지럽기 시작한 건 이틀 전 하원길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오늘은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 누구와 어떤 놀이를 했는지. 시시콜콜한 일상의 문장을 아이들과 주고받으며 집으로 가는 길, 다른 날보다 조금 더 피곤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걸었지만 예상치 못한 현기증이 갑자기 찾아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았어도 아이들은 길가의 풀들에 손을 대며 까르르 웃으며 달려 나가고 있었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발걸음을 떼고 겨우 집에 도착해서 저녁 일과를 마치자마자 그에게 문자를 보내려 핸드폰을 여니, 이미 문자가 와 있었다.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다.



- 미안, 오늘 회식 잡혔다.

- 응... 너무 늦지 않았음 해

- 그래.



오늘은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고, 어지러움이 더해졌다고, 건강검진 날짜를 좀 당겼다고. 별 건 아니라고.

그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을 먹었던 건 왜였을까. 아이들을 재우고 다 된 빨래를 널고 나니 어느새 밤 10시가 다 되어 가려할 때 그이가 들어왔다. 옷에 베인 냄새로 인해 이미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대충 짐작할 순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 말을 건넸다.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 할 것도 같아서. 당신과 일상의 문장마저 내내 잇지 못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형식적인 '가족' 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대로 닫혀 버리게 될 것 같아서.



- 오늘은 뭘 드셨나

- 양꼬치?

-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

- 응. 1차에서 보통 끝내. 요즘은 그것도 눈치 보여.

- 그렇지... 씻어.

- 애들은?

- 보시다시피. 내일은 송편 만든대. 한복 입혀 보내야 하는데 그냥 챙겨 보내려고.

- 그래.

-... 나 먼저 잘게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기분은 이러할까... 닿고 싶으나 닿을 수 없는.




몇 시간 선잠에 들었을까, 새벽에 이상하게 눈이 떠져서 드라마 한 편을 봤다.

그리고 주인공이 상대 배우에게 건네는 한 마디로 엔딩이 났을 때, 그때부터 눈물이 절로 나기 시작했다. 정말 우습게도, 정말 유치하게도, 정말 별 거 아닌 그 문장에서 도대체 왜. 이 간절한 슬픔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가끔 이런 순간에 나는 나에게 당황한다. '좋아해요'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왜 나는 울먹였던 걸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에서

당신도 압축된 거짓을 사용했습니다.

서로 오래 물들어 있었던 탓이겠지요.

우리가 마주 잡았던 손도 결국은 내가 내 손을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것,

그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인생의 절반이라는 시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릅니다.


-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의 원심력 中 -




'좋아합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던, 아주 오래전 기억이 흐릿하게 살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좋아했고, 보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좋아한다고, 보고 싶다 했던 당신의 목소리가 이제는 좀처럼 들리지 않게,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지금이 슬퍼서인지. 아니면 '좋아한다'는 그 동사와 가깝고 싶지만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가까워서는 안 되는... 어른이 되어 버린 건지, 눈물의 근원엔 분명 감정을 건드린, 미처 자각하지 못한 어떤 이유들이 있을 테지만.



혼자 떠났던, 그 해의 내가 생각났던 건 왜였을지.




아득한 어떤 감정들의 그리움에 마취된 듯,

내내 어지럽고 찔리듯 아픈 머리가, 울렁거리던 속이, 아주 잠깐 없어지는 것 같았다. 스크린 속 배우의 문장이, 아주 예전의 내게도 존재하는 것이었나 싶은 머쓱한 마음과 함께. '엄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가끔은... 예의 없이 경박한, 불온한 생각을 하는 나를 질책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추려는 듯,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얼른 닦아 냈지만.



가끔씩, 기억은 자꾸만 흘러내린다...

그것은 좋아했던, 그리고 좋아한다 했었던, 그리운, 앞으로도 그리울... 혼자의 기억이다.



혼자 묻은 기억은 환하게 떠올라 가끔 나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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